잠 깐 만.....♡/Music Cafe♪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moon향 2014. 5. 18. 16:28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으로

18년 장기 집권을 누려온 군사독재자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유신체재가 붕괴됩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다가올듯 아지랑이로 피어오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회라는 군 사조직을 이용하여

전두환은 그 해 12월12일 군사쿠테타를 성공,

이듬해 계엄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자리를 차지하며

정권쟁탈의 마수를 뻗치게 됩니다.

 

 

1980년의 봄, 들이 결집합니다.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1980년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 학생을 위주로 20만명이 운집합니다.

 

여기서, 그 통탄할 서울역 회군 사건이 일어납니다.

현장의 중심에는 매파라고 불리던 대의원회 회장 유시민과
비둘기파라고 불리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있었습니다.

잠시 두 사람의 그 날 연설을 보시겠습니다.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사분오열되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지 모른다.
일단 각 학교로 해산 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진군하자"

심재철의 주장 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해산을 명하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 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걸 끝내야 한다."
시민의 주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20만은 군중은 각 학교로 일터로 돌아갑니다.

이틀 후인 5월17일 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학생운동 지도부와 주요 민주 인사들이 체포 또는 수배됩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은 이렇게 무산되고 맙니다.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는 19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합니다.1980년 5월18일...전국이 침묵하던 그날 아침..

등교를 하던 전남대생들은 통제를 하던 진압군에게 항의하며

'계엄군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항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시내로 향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시작하자 오후 3시 계엄군은 무차별 진압을 시작합니다.

만류하는 노인과 여성들을에게 곤봉세례를 가합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금남로로 몰려옵니다.

5월19일 오전...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11공수여단 천여명이 트럭 30여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작전명 화려한 휴가 진압작전을 전개합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합니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광주시민들은 맨주먹 또는 몽둥이, 각목을 들고 나옵니다.
이 날 최초의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고 김경철님은 말을 들을 수 없는 농아였습니다.

[1980년 5월18일 금남로 제일극장 에서 그는 계엄군에게 걸렸고 "하나, 둘, 셋" 이라는 구호소리를 듣지 못하고 장갑차에 올라가지 않자 2명의 계엄군이 철로만든 특수살상용 곤봉으로 그를 마구 구타했다. 결국 그는 심하게 다쳐 국군 광주 통합병원으로 이송, 치료를 받으면서 취조를 받았으나 결국 19일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29살.]

5월 20일 항쟁 3일째...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명이 넘어섭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시위를 감행합니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중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를 합니다.

이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합니다.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전남대 교내에서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합니다.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합니다.

5월 21일 석가탄신일...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오전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합니다.
오전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합니다.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됩니다.

 

 

시민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오후 3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합니다.

오후 4시, 인근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합니다.
거센 항쟁에 밀린 계엄군은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합니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교도소로 퇴각합니다. 이 날 돌아가신 최미애님입니다.

 

최미애님 (당시 23살)은의 전남대 앞에서 M16총알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당시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최미애씨의 어머니 김현녀씨(58)씨의 증언입니다.

『전남고 영어 교사와 중매 결혼한 딸은 내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 신방을 차렸다. 80년 5월에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나중에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 애기를 들어보니 미애가 평화 시장으로 들어오는 골목 맨홀 뚜껑 위에 서서 남편을 찾고 있는데, 인근 전붓대 뒤에 서 있던 공수 부대원 한 사람이 미애에게 총을 겨누고 이어 총소리가 났다고 했다. 미애는 임신복을 입고 있어서 누구의 눈에도 잘 뛸 수밖에 없었다. 총소리와 함께 미애가 쓰러지자 사람들은 미애가 기절한 줄 알았단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 가보니 남색에 붉은 색 무늬의 임신복이 먼저눈에 들어왔다. 일으켜 세우려고 보니 머리 뒷부분이 없었다. 땅바닥에는 보리밥 같은 덩어리가 흩어져 있었다. 학생 하나가 잘못하면 시체마저도 뺏길지 모르니 어서 집으로 데려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갑자기 미애의 배가 불쑥불쑥 깊은숨을 쉬듯이 튀어나왔다. 뱃속에 있던 아기가 뛰고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살려야 한다고 발버둥을 치며 여러 군데 병원에 연락했지만 소용없었다. 사위는 1시20분경에 집에 돌아왔다. 「자네 마누라가 죽었네 」그 소리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23일에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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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보이는 영정사진은 고 박금희님이십니다.

[박금희님은 당시 전남여상 3학년이셨습니다. 당시 시내를 돌며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차량을 보고

기독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오다가 계엄군에게 하복부관통상을 입고 사망하셨습니다.]

사망자 중 30명은 만 18세 이하였다고 합니다. (고등학생 11명, 중학생 6명, 초등학생 2명)


5월22일 해방구..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합니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공무원의 지원으로 전기, 수도 등도 해결합니다.

치안력 부재의 상황에서도 단 한건의 금융기관 사고가 없는 유래없는 질서를 만들어 냅니다.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합니다.

아래는 가족의 시신을 찾기 위해 영안실로 몰려든 시민들입니다.

5월 23일 금요일 -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를 갖습니다.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 작업 시작합니다.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이 사망합니다.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고,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됩니다.

5월 24일 토요일
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가합니다.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하고,

그 분풀이로 인근 마을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5월 26일 월요일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합니다.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합니다.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시킵니다.
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충정작전 개시..
오전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합니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가두방송이 도시를 울립니다.
오전 4시, 총성과 수류탄 소리를 시작으로 진압작전이 시작됩니다.

도청 주변 완전 포위작전개시 1시간 30분만에 진압이 완료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민중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립니다.

 

5.18 기념재단의 자료에 의하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상이 5,019명이라고 합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피해사진※

믿기 어렵겠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보기 불편하거나 징그럽게 느낄 수도 있으나 그나마 간추려 약한 사진으로 올립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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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과 12·12사태를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암살되고 유신체제가 붕괴되면서 한국은 민주화를 향한 정치적 격변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유신체제의 전 기간을 통해 억압받아온 민주주의와 생존권에 대한 열망은 기존의 집권세력을 위협하면서 급격하게 확대되어갔지만, 12·12사태를 계기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은 최규하(崔圭夏) 과도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다가 사북사태로 대표되는 노동자 생존권의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시위 등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신군부세력을 위협하자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했다. 집권세력은 그들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분출되는 국민들의 저항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면서 민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투옥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시민들은 집권세력에 의해 폭도로 매도당한 채 군의 잔악한 진압과 학살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적 무장을 갖추고 10일간의 투쟁을 전개해나갔으나 군의 대대적인 폭력진압으로 민주화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계기 및 배경
신군부와 전두환정권은 광주민주화운동이 '김대중(金大中)의 배후조종'과 '계획적인 무장봉기'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의 조사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이 주장은 사실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오히려 신군부세력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이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통해 국민을 억압하려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군대의 무력진압이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유발했고, 진압의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민적 저항으로 발전한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발생은 당시의 몇 가지 역사적 조건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먼저 국민의 저항을 가능하도록 한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갈등구조에 기인한다. 이러한 사회적·경제적 배경은 유신체제를 붕괴하도록 만든 배경과 동일하다. 또한 광주라는 특정한 지역에서 시민적 저항이 폭발하게 한 지역문제를 동시에 배경으로 안고 있다.

 

5·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대외의존적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결과 박정희 대통령은 상당한 수준의 공업화를 이룩해낸 반면 여러 방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경제의 대외의존도 심화와 산업부문간 불균형의 결과 농업부문이 황폐화되고 이농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는 농촌문제와 도시문제를 동시에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공업화 위주의 경제성장정책은 민주주의와 국민생존권 문제를 동시에 야기시켰다. 이같은 국가 시책이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통해 갈등을 억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상황에서 1970년대말의 세계적 공황은 수출주도형의 우리나라 경제를 심각한 위기국면으로 몰아넣었고, 그결과 국민의 불만이 증대되었다. 더구나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저항해온 학생·종교인·지식인의 민주화운동 역시 끊임없이 유신체제를 위협했다. 야당진영 역시 유신체제에 대항, 반독재 기치를 강화하고 있었으며 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파동'을 계기로 제도권 정치영역은 조절능력을 상실했다. 유신체제의 이러한 내적 문제점은 일련의 국민들의 저항을 통해 증폭되어오다가 1979년 10월 16일 부마사태(釜馬事態)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결국 10·26사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의 배경이 된다. 게다가 이 운동이 광주·전남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데는 박정희의 집권기간에 심화되어온 호남의 정치적·경제적 차별, 갑오농민전쟁·광주학생운동 등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의 역사적 경험, 유신체제에 의해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반독재운동을 계속해온 김대중이라는 지도자의 존재 등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이 갖는 특수성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김대중의 구속은 호남대중의 정서를 신군부에 대한 반대로 결집시키는 구체적인 촉매제로 작용했다.

 

전개과정
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섯 국면으로 구분된다. 제1국면은 5월 18일 학생시위에 의한 항쟁의 발단기이다.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사전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집결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강력한 저지로 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열이 점차 불어나자 계엄군이 다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공수부대의 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계엄군의 무력진압은 첫날의 시위를 해산시켰으나 오히려 시민·학생들의 분노를 야기시켜 시위를 항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2국면은 학생시위에 시민이 합세하면서 봉기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19일부터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학생·시민들이 군경(軍警)과 공방전을 벌이면서부터 시위는 점차 격화되어갔다. 이 시기에 계엄군은 간선도로·주요시설 등을 확보하여 시위대를 포위하면서 대치했고, 이에 따라 시민들은 화염병·돌 등으로 초보적인 수준의 자위적 무장을 시작했다. 제3국면은 도시빈민·노동자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투쟁의 선두로 나선 20일부터 시작되어 무장항쟁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신문사·방송국·세무서·파출소 등 공공기관이 습격받았다. 특히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탈취한 소총 등의 무장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시점에서 시위대 대표와 도지사(道知事) 사이에 협상이 열렸으나 결렬되었고, 계속되는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급증했다. 제4국면은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시가전에 돌입하고 항쟁이 전라남도권으로 확산되면서 농민들의 참여가 시작된 21일 오후부터 시작.

 

항쟁지도부를 구성한 시위대는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목포·영암·장성·나주 등으로 진출했으며, 22일 오전의 총공세로 도청과 도경에서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광주시내를 장악했다. 제5국면은 22일부터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다시 점령되는 27일까지의 시기이다. 광주를 장악한 시위대는 치안확보 등 자치활동을 수행했으며, 23일부터 매일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투쟁목표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이때 구성된 수습대책위원회가 광주시민의 요구를 수렴하기보다는 원상복구와 사태회복에만 주력함으로써 수습대책위원회와 광주시민 사이에 분열이 야기되었다. 이에 시민들은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수습대책위원회를 규탄하고 25일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구성했다. 동시에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대비해 시민군을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그러나 27일 새벽 0시를 기해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 등으로 무장한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으로 10일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일단락되었다.

 


성격 및 의의
광주민주화운동의 성격은 항쟁의 배경을 이루는 한국 사회의 갈등구조 속에서 제기된 운동의 주체·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유신체제의 대외의존적이자 성장일변도인 경제정책과 이를 위한 경직된 정치구조 속에서 누적되어온 시민의 불만이 10·26사태 이후 일련의 과정을 거쳐 증폭되어오다가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따라서 시민항쟁의 목표는 민주주의와 생존권확보로 집약되었고 특히 민주주의 문제가 중심목표로 제기되었다.

 

한편 이 기간에 미국이 보여준 일련의 태도, 특히 집권세력의 진압을 정당화해준 사례와 군대동원 방조는 이후 미국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을 새롭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광주민주화운동은 집권세력에 대항하여 최초로 무장항쟁을 전개한 사건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이후 급격하게 고양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자 준거점이 되었다. 전두환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한 1987년의 6월항쟁 역시 근본적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이러한 원동력은 결국 제6공화국 노태우정권으로 하여금 광주청문회를 열도록 했으며 그 과정에서 1980년의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게다가 노태우정권 하에서 유보되었던 광주학살자 처벌문제는 1993년 이후 김영삼정부가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재조사하면서 12·12사태와 광주학살의 주역들이 국민적 심판을 받았으며,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은 수감되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1995. 12. 21)·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 등이 제정되어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한편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공로자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으며 그 자격을 박탈했다.

 

鄭大和 글 | 崔章集 감수

 

 

 

 

 

 

 

광주 ...." 전라도 새끼들은 다 죽여야 돼 ! "

독재정권과 언론에서 빨갱이 소굴이라 떠들던 그곳

그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던 역사의 현실과 진실

유일하게 전두환에게 굴복하지않고 저항한 지역의 이름 " 호남 그리고 광주 "

독재나 치의 유태인 학살처럼 광주의 호남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김대중은 감옥에서 신문을 접하고 신문을 다 적실정도로 가슴 찢어지는 통한의 오열을 하게된다

힘없던 자신과 지켜주지 못했던 자책감은 평생의 짐이된다

 

광주민주화운동후 해외유명인사들의 적극적 김대중석방운동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은 김대중을 석방

감옥에서 해방되고 난뒤 곧장 광주로 직행 망월동 광주민주화 영령들과의 만남

한서린 서러움의 통곡 지울수없는 상처...

호남과 광주 .... 대한민국 평생의 상처와 아픔.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딱맞는 도시였다

29년이 지난 현재, 409명은 여전히 행방불명자로 등록되어 있으며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996년 1심에서 전두환 사형, 노태우 22년 6개월 선고

항소심에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으로 최종 선고.

추징금 각 각 약 2,205억 2,629억원, 후에 전 재산 29만원 발언

 

김영삼은 1997년 12월 22일, 국민화합이라는 명목으로 이들을 사면복권 시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두 살인자의 당당한 모습을 봐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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