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으로
18년 장기 집권을 누려온 군사독재자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유신체재가 붕괴됩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다가올듯 아지랑이로 피어오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회라는 군 사조직을 이용하여
전두환은 그 해 12월12일 군사쿠테타를 성공,
이듬해 계엄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자리를 차지하며
정권쟁탈의 마수를 뻗치게 됩니다.
1980년의 봄, 들이 결집합니다.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1980년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 학생을 위주로 20만명이 운집합니다.
여기서, 그 통탄할 서울역 회군 사건이 일어납니다.
현장의 중심에는 매파라고 불리던 대의원회 회장 유시민과
비둘기파라고 불리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있었습니다.
잠시 두 사람의 그 날 연설을 보시겠습니다.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사분오열되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지 모른다.
일단 각 학교로 해산 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진군하자"
심재철의 주장 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해산을 명하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 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걸 끝내야 한다." 시민의 주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20만은 군중은 각 학교로 일터로 돌아갑니다.
이틀 후인 5월17일 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학생운동 지도부와 주요 민주 인사들이 체포 또는 수배됩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은 이렇게 무산되고 맙니다.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는 19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합니다.1980년 5월18일...전국이 침묵하던 그날 아침..
등교를 하던 전남대생들은 통제를 하던 진압군에게 항의하며
'계엄군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항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시내로 향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시작하자 오후 3시 계엄군은 무차별 진압을 시작합니다.
만류하는 노인과 여성들을에게 곤봉세례를 가합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금남로로 몰려옵니다.
5월19일 오전...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11공수여단 천여명이 트럭 30여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작전명 화려한 휴가 진압작전을 전개합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합니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광주시민들은 맨주먹 또는 몽둥이, 각목을 들고 나옵니다.
이 날 최초의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고 김경철님은 말을 들을 수 없는 농아였습니다.
[1980년 5월18일 금남로 제일극장 에서 그는 계엄군에게 걸렸고 "하나, 둘, 셋" 이라는 구호소리를 듣지 못하고 장갑차에 올라가지 않자 2명의 계엄군이 철로만든 특수살상용 곤봉으로 그를 마구 구타했다. 결국 그는 심하게 다쳐 국군 광주 통합병원으로 이송, 치료를 받으면서 취조를 받았으나 결국 19일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29살.]
5월 20일 항쟁 3일째...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명이 넘어섭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시위를 감행합니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중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를 합니다.
이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합니다.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전남대 교내에서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합니다.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합니다.
5월 21일 석가탄신일...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오전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합니다.
오전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합니다.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됩니다.
시민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오후 3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합니다.
오후 4시, 인근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합니다.
거센 항쟁에 밀린 계엄군은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합니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교도소로 퇴각합니다. 이 날 돌아가신 최미애님입니다.
최미애님 (당시 23살)은의 전남대 앞에서 M16총알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당시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최미애씨의 어머니 김현녀씨(58)씨의 증언입니다.
『전남고 영어 교사와 중매 결혼한 딸은 내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 신방을 차렸다. 80년 5월에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나중에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 애기를 들어보니 미애가 평화 시장으로 들어오는 골목 맨홀 뚜껑 위에 서서 남편을 찾고 있는데, 인근 전붓대 뒤에 서 있던 공수 부대원 한 사람이 미애에게 총을 겨누고 이어 총소리가 났다고 했다. 미애는 임신복을 입고 있어서 누구의 눈에도 잘 뛸 수밖에 없었다. 총소리와 함께 미애가 쓰러지자 사람들은 미애가 기절한 줄 알았단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 가보니 남색에 붉은 색 무늬의 임신복이 먼저눈에 들어왔다. 일으켜 세우려고 보니 머리 뒷부분이 없었다. 땅바닥에는 보리밥 같은 덩어리가 흩어져 있었다. 학생 하나가 잘못하면 시체마저도 뺏길지 모르니 어서 집으로 데려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갑자기 미애의 배가 불쑥불쑥 깊은숨을 쉬듯이 튀어나왔다. 뱃속에 있던 아기가 뛰고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살려야 한다고 발버둥을 치며 여러 군데 병원에 연락했지만 소용없었다. 사위는 1시20분경에 집에 돌아왔다. 「자네 마누라가 죽었네 」그 소리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23일에 장례를 치렀다』
아래 보이는 영정사진은 고 박금희님이십니다.
[박금희님은 당시 전남여상 3학년이셨습니다. 당시 시내를 돌며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차량을 보고
기독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오다가 계엄군에게 하복부관통상을 입고 사망하셨습니다.]
사망자 중 30명은 만 18세 이하였다고 합니다. (고등학생 11명, 중학생 6명, 초등학생 2명)
5월22일 해방구..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합니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공무원의 지원으로 전기, 수도 등도 해결합니다.
치안력 부재의 상황에서도 단 한건의 금융기관 사고가 없는 유래없는 질서를 만들어 냅니다.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합니다.
아래는 가족의 시신을 찾기 위해 영안실로 몰려든 시민들입니다.
5월 23일 금요일 -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를 갖습니다.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 작업 시작합니다.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이 사망합니다.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고,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됩니다.
5월 24일 토요일
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가합니다.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하고,
그 분풀이로 인근 마을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5월 26일 월요일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합니다.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합니다.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시킵니다.
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충정작전 개시..
오전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합니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가두방송이 도시를 울립니다.
오전 4시, 총성과 수류탄 소리를 시작으로 진압작전이 시작됩니다.
도청 주변 완전 포위작전개시 1시간 30분만에 진압이 완료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민중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립니다.
5.18 기념재단의 자료에 의하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상이 5,019명이라고 합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피해사진※
믿기 어렵겠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보기 불편하거나 징그럽게 느낄 수도 있으나 그나마 간추려 약한 사진으로 올립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 되시길.......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암살되고 유신체제가 붕괴되면서 한국은 민주화를 향한 정치적 격변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유신체제의 전 기간을 통해 억압받아온 민주주의와 생존권에 대한 열망은 기존의 집권세력을 위협하면서 급격하게 확대되어갔지만, 12·12사태를 계기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은 최규하(崔圭夏) 과도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다가 사북사태로 대표되는 노동자 생존권의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시위 등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신군부세력을 위협하자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했다. 집권세력은 그들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분출되는 국민들의 저항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면서 민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투옥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시민들은 집권세력에 의해 폭도로 매도당한 채 군의 잔악한 진압과 학살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적 무장을 갖추고 10일간의 투쟁을 전개해나갔으나 군의 대대적인 폭력진압으로 민주화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광주 ...." 전라도 새끼들은 다 죽여야 돼 ! "
독재정권과 언론에서 빨갱이 소굴이라 떠들던 그곳
그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던 역사의 현실과 진실
유일하게 전두환에게 굴복하지않고 저항한 지역의 이름 " 호남 그리고 광주 "
독재나 치의 유태인 학살처럼 광주의 호남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김대중은 감옥에서 신문을 접하고 신문을 다 적실정도로 가슴 찢어지는 통한의 오열을 하게된다
힘없던 자신과 지켜주지 못했던 자책감은 평생의 짐이된다
광주민주화운동후 해외유명인사들의 적극적 김대중석방운동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은 김대중을 석방
감옥에서 해방되고 난뒤 곧장 광주로 직행 망월동 광주민주화 영령들과의 만남
한서린 서러움의 통곡 지울수없는 상처...
호남과 광주 .... 대한민국 평생의 상처와 아픔.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딱맞는 도시였다
29년이 지난 현재, 409명은 여전히 행방불명자로 등록되어 있으며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996년 1심에서 전두환 사형, 노태우 22년 6개월 선고
항소심에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으로 최종 선고.
추징금 각 각 약 2,205억 2,629억원, 후에 전 재산 29만원 발언
김영삼은 1997년 12월 22일, 국민화합이라는 명목으로 이들을 사면복권 시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두 살인자의 당당한 모습을 봐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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