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알고 있는 Franz Schubert 는 베토벤의 그늘 아래서...
실력을 인정 받지 못하고...베토벤이 사망한 다음해 31세 라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요절 한 안타까은 음악가입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요약하면...Romantic Lyrical Genius of Piano and Melody
German Song King...
Ranking World 7th (음악사에서 순위 7위)Musician
그의 음악은 가곡,교향곡,실내음악,피아노곡 으로 크게 분류를 할 수있습니다...
그의 기악곡들중 제일 연주 많이 되는 곡은 미완성 교향곡인 8번 교향곡이며
다음은 실내악곡으로 피아노 5중주 <TROUT>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음반과 연주등으로 주요한 곡인 지금 듣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9번 < THE GREAT> 입니다...슈베르트의 전체 음악중 top 5 에 드는 곡입니다...
물 흘러가는 것 처럼 아름다운 멜러디의 음악 입니다....
슈베르트의 이 9번 교향곡은 10년 이상을 고심하며 작곡한 걸작이다.
그 초고에는 1828년 3월이라고 적혀 있으며 그가 31세 되던해의 봄에 완성되었다.
슈베르트는 결국 이 곡을 들어보지 못한채 죽어야 했다.
그 이유는 너무 어렵고 길다는게 협회사람들이 말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후 슈만이 슈베르트의 묘에 들른다음 그의 형을 찾아가
여러가지 유품들을 보던중 5선지 철을 발견하고 미친듯이 펼쳐보며
그 아름다운 표현에 감동받아 그 음악의 연주와 출판을 권유하고 알선도 하였다.
1839년 3월 21일 게반트하우스에서 멘델스존의지휘로 초연을 하게 되었고
출판또한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비인에서의 초연은 1839년12월15일에 있었는데,최초의 2악장만 연주 되었다.
슈만은 계속해서 1840년 이 교향곡에 관해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곡을 "쟝 파울의 4권의 소설에비유할 만큼
천계의 유장함"이라 형용하였다.
대곡다운 면모가 첫 악장부터 느껴지며 애수와 미소 또한 느껴지는 장대한 곡이다...
베토벤이라는 거인이 길고도 당당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빈의 고전시대를 마감해 가고 있을 때,
슈베르트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 떠돌이 생활을 영위해 가며 선율미가 넘쳐 흐르는 작품들을
속속 써내고 있었다. 천재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슈베르트는 모짜르트에 못지 않으면서도
당시 빈의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던 베토벤의 그늘에 가리어 생전에는 결코 빛을 보지 못한 채
31년의 짧은 생애를 마쳐야만 했다.
슈베르트 음악의 본질은 그 무궁무진하게 솟아 오르는 가락에 있다.
이러한 특성에 가장 완벽하게 제자리를 잡은 것은 그의 900여곡에 달하는 가곡이며,
따라서 가곡을 떼놓고서는 슈베르트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흔히 '슈베르트는 관현악도 가곡처럼 썼고 베토벤은 가곡도 관현악곡처럼 썼다.'는 말은
이 두 작곡가가 음악적 본령이 어디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풀이해 주고 있다.
슈베르트의 관현악 작품에는 확실히 가곡적이고 멜로디에 풍부한 악상이 넘쳐 흐른다.
31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에 남겨 놓은 9개의 교향곡 작품들 역시 이러한 윈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교향곡을 가곡처럼 음미할 때에 그 아름다움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년의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같은 구축력이 강한 작품들을 써보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결국 삶의 여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채 절필해야만 했다.
31세라는 나이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음악사에는 슈베르트만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가 없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슈베르트가 음악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 방대한 가곡에 있을 것이다. 슈베르트 없이 가곡을 생각할 수 없고
가곡을 얘기할 때 슈베르트를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이루어져
이들 양자의 의미를 함축시키고 있다. 따라서 슈베르트 음악의 기본은 가곡에 입각한
가락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특수성을 기악곡이나 관현악곡에서도
그대로 침투되어 있어서 모든 메세지를 아름답게 노래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 결과 '슈베르트에게 있어서 관현악곡도 가곡적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베토벤에게 있어서 가곡도 관현악적이다'란 말과 아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두가지 비유는 베토벤과 슈베르트라는 두 작곡가의 기질적 차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관과 음악관을 모두 함축시킨 단적인 표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년의 슈베르트는 가곡 위주의 작곡생활에서 크게 전향하여 대편성 교향곡이나
오페라에 몰두해 있었다. 특히 1821년에 손을 댄 E장조 교향곡 D.729가 제 1악장의 첫 부분만을
악보로 남기고 그 이하는 스케치에 그친 데다가, 곧 이어 착수한 여덟번째 교향곡 b단조 D.795도
2악장만으로 그쳐버린 '미완성'이어서 그는 대편성 교향곡에 대한 작곡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1823년 슈베르트가 쓴 편지에 의하면, 그는 이미 소편성의 실내악적 교향곡은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또한 뒤따라 작곡된 두 곡의 4중주, 그리고 관과 현을 위한 8중주 등도
대편성 교향곡을 쓰기 위한 연습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이 편지는 시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슈베르트가 의도하는 대편성 교향곡의 작곡은 그의 뜻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심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1828년 3월, 죽음을 불과 3개월 밖에 남기지 않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가곡은 이제 그만 쓰겠다'고 스스로 심경을 밝힌 뒤에
본격적인 교향곡을 쓰기 위해서 벼르고 벼르다가 착수한 작품이었던 만큼
슈베르트는 이 교향곡을 마무리하는 데 온 힘을 다 바쳤다.
그 결과 착수한지 한 달만에 '장대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교향곡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이 곧 <그레이트>라고 불리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인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베토벤의 교향악적 정신을 이어 받기 위한 생각으로 슈베르트는 이 대곡에
손을 댔지만, 결과는 베토벤이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로까지 접근시켜 가지는 못하고 말았다.
오히려 그가 7년전에 써 두었던 제8번 <미완성>의 세계로 더더욱 파고 들어가
그것을 대폭 확장시켜 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바로 거기에 슈베르트적 관현악법의 장점이자 한계점이 공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 작품이 베토벤의 교향악적 세계로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 이후 슈베르트를 뒤따르는 낭만주의 교향곡 작곡가들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슈베르트의 관현악 세계를 총결산하는 대작업이었고,
어찌보면 슈베르트라는 하나의 인간을 종결짓는 클라이막스이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쓰고 난 9개월 후인 1828년 12월에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교향곡 제9번의 1, 2, 3악장은 연이어 나타나는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찼다가
4악장에 이르러 소나타 형식의 장대한 악장으로 발전한다.
힘차고 생명력이 넘치는 격렬함으로 고양되는 데서 베토벤적 의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슈베르트의 관현악이 내뿜는 정신의 열기는 한도를 갖고 만다.
'고뇌를 뚫고 환희로' 끝없이 비상하는 베토벤이 아니라 적당한 선에 멈추어 서서
스스로 자지러지는 슈베르트의 특유의 격렬함이다.
당초 이 곡은 빈악우협회에서초연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로부터 악보를 받아 본
빈악우협회는 이 곡이 너무 장황하고 길다는 이유로 연주를 거부했다.
본래 섬세한 기질을 타고나 심성이 여리기만 했던 슈베르트는 악우협회의 결정에
한 마디 불평도 못하고 악보를 되돌려 받은 채 연주를 포기하고 말았다.
만약에 베토벤이었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악우협회와 맞서서 연주를 강행했을 테지만
슈베르트는 그렇지를 못했다. 이 곡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슈만의 공이 있었다.
이 곡이 작곡된 지 10년 후인 1838년, 그러니까 슈베르트가 31세의 짧은 생을 마친지
10년 후인 당시 28세의 청년 작곡가 슈만은 빈으로 가서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묻혀 있는
베링중앙묘지를 참배했다. 슈만이 가장 존경했던 이들 두 선배 작곡가는
그가 한번도 상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슈만으로서는 무척 감개가 깊었다.
비록 그들이 이미 땅에 묻혀 말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해후였으나,
슈만은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마음 속의 열망을 조용히 풀어헤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선배 작곡가의 무덤을 참배하고 나서 곧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상당량의 슈베르트 유고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슈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얻어 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간 것이다.
슈만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슈만의 방문을 받은 페르디난트는 동생 슈베르트의
유품들을 이것 저것 뒤적이다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묶여 있는
악보 뭉치 하나를 보여 주었다. 그 악보를 받아 본 슈만은 깜짝 놀랐다.
아직까지 발표되지 않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였기 때문이었다.
슈만은 페르디난트로부터 이 곡을 초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후
악보를 즉시 멘델스존에게 보냈다.
당시 멘델스존은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슈만과는 각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악보를 받은 멘델스존은 곧 연습에 착수하여
다음 해인 1839년 3월 21일 역사적인 초연이 이루어진다.
그 자리에는 물론 슈만도 참석해 있었고 페르디난트도 빈에서 달려와
동생의 마지막 교향곡의 초연을 감명 깊게 지켜봤다.
작곡된 지 꼭 11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해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차츰 여러 교향악단들에 의해 연주 레퍼토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아름답고 리드미컬한 여운은 때때로 우수를 불러 오기도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슈베르트적 명선율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낭만주의 교향곡 역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모든 연주자와 애호가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초연 연도: 1838년 3월 21일 (작곡가 생전에 빈 악우협회의 연주회에 발표될 계획이었으나 무산)
초연 장소: 게반트하우스 연주회, Leipzig, Germany
초연자: 슈만이 슈베르트 형의 집에서 악보를 발견, 초연에선 멘델스존이 지휘함 (축소된 형태로),
이후 슈만은 곡에 대한 찬사를 Neue Zeitschrif fur Musik에 게재.
악기 편성: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트럼본 3, 팀파니, 현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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