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읽고말거야, 테드 휴즈의 시작법
테드 휴즈의 시작법을 왜 꼭 읽고 싶었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작하는 방법이 아니라, 詩를 作하는 法이다. 연애를 시작하는 법, 뭐 이런 거 아니다.)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으니, 더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다. 품절인지 절판인지 현재 구할 수가 없는데, 중고서점에서 딱 만났다. 어차피 그리 비싸지도 않은 책이라서 어느 정도는 웃돈을 주고라도 구하고 싶은 책이었는데, 절반값에 데려 왔다. 중고서점 흥해라!
시인 지망생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읽고 나서 보니, 꼭 읽어볼만한 책이 맞다. 꼭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시적 감수성이나 글쓰기, 생각하기 등 여러모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이다. 학생들을 위해서 쓴 책인데, 실제로 학생들이 읽으면 참 좋을 책이다. 문제는 학생들은 이런 책 읽을 여유가 없다는 거.
어줍잖은 방법론이 아닌 근본적 접근
책 구성도 상당히 흥미롭다. 시를 쓰는 법 혹은 글쓰기에 대한 방법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동물과 시, 바람과 기후, 사람들에 관한 글쓰기, 생각하는 법, 풍경에 대한 시 쓰기, 산문 쓰는 법, 주변 인물에 관한 글쓰기, 달에 사는 (환상 속의) 생물에 대하여 등 글쓰기를 위한 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부분들을 다룬다. 이 흥미진진한 주제들에 대해 장황하지 않게 엑기스만 전해준다. 그렇다고 쪽집게 과외는 아니다.
백 가지 설명보다 시 한 편으로 주제를 전달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핵심과 뼈대 위주로 전달하고는 바로 시를 소개한다. 해당 주제에 관해 생각해볼만한 시를 선별해서 수록했다. 시에 대한 구차한 설명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주제를 알려줬으니 한번 음미해보라는 식이다. 시를 이해하는 법은 시를 그대로 호흡하는 것이고, 한번 읽어서 잘 모르겠으면 설명이 필요한 게 아니라 느껴질 때까지 다시 호흡하는 것이다. 라고 테드 휴즈가 말한 건 아니고, 그냥 내가 한번 해본 말이다. 말하자면, 돌팔이 처방.
원서보다 번역본이 더 좋은 점
원서는 Poetry in the Making인데, 영어로 시를 쓸 계획이 아니라면 굳이 원서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난 안 읽어봐서 모른다. (영어를 못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겐 번역본이 원서보다 좋은 점이 있는데, 역자인 한기찬 시인이 주제에 부합하는 비교 한국시들을 각 장마다 몇 편씩 수록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오소리, 파리, 모기, (에프킬라..는 아니고..) 당나귀, 나의 고양이 죠프리, 알프레드 코닝 클라크 등 도무지 와닿지 않는 번역시들만 있는 것보다는, 화사, 풀, 풀잎, 남사당, 성북동 비둘기, 해, 별 헤는 밤 등의 주옥같은 시들을 비롯한 잘 와닿는 우리 시들이 더 반갑다. 각 장의 주제와 비교적 가까운 시들이 수록되어 한번 음미해볼 만하다.
상상하라, 나의 심원한 일부와 함께 침잠하라
"이제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라는 순 뻥에 가까운 홍보문구가 뒤표지엔 적혀 있지만, 테드 휴즈가 본문에서 실제 숙제로 내는 건 소설 쓰기다. 생각하고 표현해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해보는 것과 글로 옮겨보는 것은 천지 차이기 때문이다. 생각도 그냥 해선 안된다. 낚시할 때 추를 뚫어지게 보면서 그것과 연결된 물 속 세상 전체를 머리 속에 생생하게 그려보듯이, 에너지를 모아서 쏟아부으면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동물도 풍경도 바람까지 깊이 느끼고 생각해서 표현해보도록 가이드한다. 텅 빈 사고가 아닌 생명으로 가득찬 사고를 해야 하고, 흩어지려는 사유를 붙들어 움켜쥐고 깊숙이 침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게 시작법이다.
읽은 날: 2014년 6월 28일 ~ 6월 29일
기억하고 싶은 구절:
나는 내가 동물들의 삶을 휘저은 데 대해 나 자신을 꾸짖었다. 나는 동물을 동물들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 그리고 거의 그와 같은 시기에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p.23)
낱말이 생명적이며 시적인 것은 바로 낱말 속에 있는 이 작은 마귀 때문이며 시인이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바로 이 작은 마귀인 것이다. (p.25)
당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과 더불어 살아보라. 마치 마음으로 산수셈이라도 하듯 그것을 힘들여 생각하지는 말라.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귀기울여 보고, 스스로 그것의 속으로 침잠하라. (p.25)
시는 사상이나 일시적인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찰나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간에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변화케 하는 경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p.45)
글쓰기의 전기술은 당신의 독자의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일인 것이다. (p.67)
어떤 것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상상력으로 움켜쥐고는 그것의 모든 조각조각을 조사할 때까지 놓아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남아 있어서 존속하려고 들지 않는다. (p.90)
삶조차도 더욱 흥미로운 것으로 되는데 왜냐하면 글쓰기가 우리 대부분에게 가르쳐 주는 한 가지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 사물들을 밀접하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필요한 만큼 그것들을 깊이 이해하고 있지도 않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p.142)
(어떻게 해야만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직 진실로 여러분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재미있게 쓰면 된다는 것이다. (p.153)
이런 참된 관심들, 즉 여러분이 그것에 대한 진정한 개인적 감정과 진정한 경험을 갖게 되는 것들은 여러분이 쓸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 그래서 글을 쓸 때 여러분은, 단순히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지난 주에 들었거나 어제 읽은 것-과 여러분의 삶에 있어 심원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사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따라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있어서도 오로지 생명력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p.157) [출처] 시작법 - 테드 휴즈가 알려주는 글쓰기의 기본|작성자 이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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