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만 있어주오, 서로의 손이 풀릴 때 우리가 외치는 말…
김별아 『영영이별 영이별』
여기서 그만 돌아가시오! 노산군은 오늘 밤 안으로 양주까지 가야 하오!
당신을 영월까지 호송할 첨지중추부사 어득해가 질그릇 깨지는 목소리로 내게 호령합니다. 그의 휘하에 당신을 감시하는 오십여 금부나졸들이 창을 엇갈려 세워 휘청대는 내 걸음을 막습니다. 나는 그 단호한 금지의 표식 앞에 스르르 무너집니다. 더는 당신께 가까이 다가서지 못합니다. 다만 허공에서 뒤엉킨 당신과 나의 눈빛을 지푸라기 삼아, 물에 빠진 사람처럼 애원의 손을 뻗쳐 허우적거립니다.
피가 끓고 살이 타는 조취가 진동하는 궁성에서 유배의 교지를 받아 들고도 우리는 마지막 한 가지 소망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영월이 아무리 산간 오지 벽촌이라 하나 당신과 내가 함께 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초부 초동이 되어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맨손으로 흙을 파고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리라 하였습니다. 초근목피로 배를 채우고 샘물로 목을 축일망정 살아라, 살아남으라는 생명의 명령 앞에 배를 깔고 복종하며, 왕이었고, 왕비였던 시절 따윈 봄꿈처럼 까마득히 잊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분에 넘치는 소원이라던가요? 당신은 유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대역 죄인으로 유배되는 것이니 동부인은 당치 않다며 생이별을 강요하였습니다. 애초에 나의 소망은 얼마만큼의 무게와 부피를 갖고 있었는지요? 나의 소망은 점점 줄어들고 작아져 마침내 사금파리와 같은 한 점 빛으로만 남았습니다. 당신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살아남고 싶었습니다. 다만 그뿐이었습니다.
하늘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뒤척이는 검은 물이랑 위로 빗방울이 독화살처럼 내리꽂히고 있었습니다. 땀이, 눈물이, 비가, 역류하는 피가 나의 몸과 혼마저 질펀하게 적셨습니다.
부인, 부디 자중자애하시오!
전하, 부디 옥체를 보존하소서!
우리가 나눈 마지막 말은 피맺힌 절규였지요.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는, 살아서 다시 만난다면 아무 소원도 없으리라는, 삶의 아우성이고 비명이었지요.
당신의 눈동자 가득 내가 있었습니다. 놀라 질려 검붉은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함을 하는 나. 내 눈 안으로 당신이 밀려들었습니다. 태연하게 웃어 보이려 애쓰지만 어느새 북받치는 현연한 눈물로 얼룩진 당신의 얼굴, 우리는 사랑했습니다. 어느 왕과 왕비보다도, 남편과 아내보다도, 열에 들떠 뜨거운 정인들보다도, 하지만 그래도 더 사랑해야 했습니다. 고작 두 해 남짓의 짧은 동거가 백년, 천 년까지도 대신 하도록 하루하루를 잘게 쪼개어 사랑하여 보듬고 위로하여야 했습니다.
어쩌면 그 안타까운 후회와 깨달음이 이별보다 사무쳐, 당신을 태운 사인교가 다리를 건너 멀어져갈 때 나는 차마 안녕이란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끝끝내 이별의 인사를 건네지 못한 채, 우리는 영원히 열일곱의 소년과 열여덟의 소녀로 붙박여버렸습니다. 그날 이후 아무리 오랜 신간이 흘러도, 그처럼 슬프고 아픈 열일곱과 열여덟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이별 다리라 부른답니다.
▶ 작가-김별아-소설가. 강원도 강릉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2005년 『미실』로 세계문학상 수상.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후, 실존 인물을 재해석하는 시도로 『영영이별 영이별』 『논개』 등을 썼으며, 아들과 함께 오른 백두대간 이야기 『이 또한 지나가리라』 등이 있다.
▶ 낭독_ 채세라 – 배우. 연극 ‘우리 읍내’, 뮤지컬 ‘루나틱’, 드라마 ‘궁’ 등에 출연.
노계현 – 성우. 외화 ‘구름 속의 산책’, ‘보통사람들’ 등에 출연.
배달하며
사랑은 강처럼 유장하고, 멀리 가는 길이다.
그 길이 총과 칼에 의해 막힐 때
다리를 놓으면서 더 멀리, 영원까지도 간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견된 나란히 누운
두 구의 미라 위엔 ‘천세불변’이라 쓰인
붉은 비단이 덮여 있었다고 한다.
사랑만이 ‘영영이별’위에 천세불변의 다리를 놓을 수 있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_『영영이별 영이별』(해냄출판사)
▶ 음악_ BackTraxx-mellow1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김태형
'詩 詩 詩.....♡ > 떠 오 르 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등(風燈) - 이문재 (0) | 2016.08.06 |
---|---|
멸치 - 김기택 (0) | 2016.08.06 |
개천은 용의 홈타운 - 최정례 (0) | 2016.07.23 |
'빈집' 모음 (0) | 2016.05.02 |
차를 마셔요, 우리 - 이해인 (0) | 2016.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