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시집『잎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1989)
빈집 - 김용택
봄볕에 마르지 않을 슬픔도 있다.
노란 잔디 위의 저 타는 봄볕, 무섭다. 그리워서
몇 굽이로 휘어진 길 끝에 있는 외딴집
방에 들지 못한 햇살이 마루 끝을 태운다.
집이 비었으니, 마당 끝에 머문 길이 끝없이 슬프구나.
쓰러진 장독 사이에 애기똥풀꽃이 핀다.
집 나온 길이 먼 산굽이를 도는 강물까지 가고 있다.
강물로 들어간 길은 강바닥에 가 닿지 못해 강의
깊은 슬픔을 데리고 나오지 못한다.
사랑이 허공인 줄 알기에, 그러나 봄볕에 마르지 않는 눈물도 있다.
바닥이 없는 슬픔이 있다더라.
외로움이 없다면, 그 생은 낡으리.
봄볕에 불붙지 않은 잔디도 있다.
속으로 우는 강물이 땅을 딛지 못하는구나.
목줄이 당기는 사랑이 없다면, 강물이 저리 깊어질 리 없다.
집이 왼쪽으로 기울었으나, 나는 집 뒤안에 가서 하늘을 본다.
바닥없는 슬픔을 깊이 파는 강물 소리를 나는 들었다.
-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 2010)
빈집의 약속 -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몽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 시집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
빈집 - 백무산
빈집을 보면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거든
멀쩡하다가도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지
그건 말이야 사람이 독해서야
벽과 기둥을 파먹는 것들
돌을 갉아먹는 이빨 날카로운 시간들
사람 사는 걸 보면 질려 달아나지
삶이 독해서야 그건
그랬지 내가 허물어지던 때마다
내게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였지 그땐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마저 나를 허물었지
타인의 욕망이 나를 버티게 하는 나의 욕망에 대해 무지했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념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풍요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상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삶의 하찮은 몸짓들 하찮은 욕망들 하찮은 구원들
그 비루하고 모진 기득권들이 빠져나가면 곧 허물어지지
나는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수십 년째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굼벵이처럼 비루한 것이 싫어서 그랬고
슬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
사람의 모진 것들이 자꾸 슬퍼서
- 계간 『창작과 비평』, (2010 여름호)
빈집 - 송찬호
지붕 밑 다락에 살던 두통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그 집은 빈집이 되었다
가구를 들어내 휑하니 드러난
벽들은 망설임 끝에
좌파로 남기로 결심했고
담쟁이넝쿨들이 넘겨다보던
아름답던 이층 창문들은
모두 천국으로 갔다
그리고, 거실에 홀로 남은 낡은 피아노의
건반을 고양이들이 밟고 지나다녀도
아무도 소리치며 달려오는 이 없다
이미 시간의 악어가 피아노 속을
다 뜯어먹고 늪으로 되돌아갔으니
구석에 버려져 울고 있던 어린 촛불도
빈집이 된 후의 최초의 밤이
그를 새벽으로 데려갔을 것이었다
벌써 어떻게 알았는지
노숙의 구름들이 몰려와
지붕에 창에 나무에 각다귀 떼처럼 들러붙어 있다
이따금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그들의 퇴거를 종용해 보지만 부력을 잃고
떠도는 자들에게 그게 무슨 소용 있으랴
철거반이 들이닥칠 때까지
한동안 그들은 꿈쩍도 않을 것이니
- 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빈집 - 윤제림 - 시집『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 2008)
기김문백송윤 사진 출처 : Daum 이미지
울타리에 호박꽃 피었고
사립문 거적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안 갔다는 표시였다
금방 돌아온다는 표시였다
옛날엔,
그런 날이면,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대청마루에 누웠다 가곤 했다
뒤꼍엔 말나리 피었고
방문 창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갔다는 표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표시다
지금은,
오늘 아침엔, 억수장마를 따라온
황토물이 사흘을 묵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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