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 詩.....♡/동 시 ♬ 좋 아

꼴찌 만세 - 류선열

moon향 2015. 11. 4. 11:21

 

 

꼴찌 만세
- 류선열

 

 


1
내가
'새들은 왜 날아다니는가'를 물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바보는 지루해” 하고 대답하셨어요.
나는 다음부터 궁금한 것이 있어도
선생님께서 지루해 하실까 봐
질문을 않기로 했어요.

 


2
선생님께서 시험 점수를 발표하시던 날
나는 꼴찌가 되어 있었어요.
내 시험지는 온통 나비 투성이였으니까,
꼴찌가 된 건 아주 당연한 노릇이지요.
아이들은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낄낄거렸고,
나는 그 날부터 꼴찌가 되어갔어요.

 


3
엄마가 잊지 않고 챙겨 주시는
책가방과 도시락과 신발주머니를 들고 와서는
어물어물 머릿수나 채워 주고
청소나 열심히 하고
사랑하는 반 친구들을 위해
가끔 웃음거리도 되어 주는 게
나의 임무랍니다.
꼴찌는 어디에나 꼭 있게 마련이지만
아무나 하는 건 아니랍니다.
꼴찌하기가 얼마나 힘들다구요.

 

 

4
어쩌다 선생님께서 나를
부추겨 주시려 하시면
아이들은 눈들이 빨개져서 방정을 떨고
자주자주 구박을 받을 때마다
신이 나서 법석이지요.
천재들은 원래 은혜를 모른다구요.

 

 


5
시작이 나쁘면 끝까지 나쁜가 봐요.
어제는 선생님께서 늦으셨고
오늘은 내가 늦었는데
말은 안 했지만 길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다가 늦었는데
회초리는 선생님 것이고
매 맞은 빨간 자국은 내 것이었어요.
아무래도 생각이란 건 안 하는 쪽이 편해요.

 

6
내 맘 속엔 아무런 근심도 없는데
선생님은 내 머리를 아프게 하시지요.
쓰는 글자와 읽는 소리가 달라야 하고
나누기는 곱하기로 바꿔야 하고
쓸 것 없는 일기까지 써야 하니까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요.
그렇지만 무슨 상관인가요?
지구가 둥글건 길쭉하건
땅에는 곡식이 자라고
하늘은 또 저렇게 맑아 있잖아요.

꽃잎이 산성이건 염기성이건
나비들은 즐겁게 춤추고
벌들은 또 하루종일 저렇게 윙윙거리잖아요.


 

7
선생님!
아무도 사랑할 줄 모르는 꽉 막힌 천재들보다
들꽃과 멧새와 풀벌레까지 사랑하는 나를
친구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내 이름을
좀 더 부드럽게 불러 주세요.
그리고 한 번쯤 만세도 불러 주세요.
“꼴찌 만세! 만만세!”라고.

 



「잠자리 시집보내기」 중에서

 

 

저자 : 류선열

1952년 충북 제원에서 태어나 청주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 ‘아동문예 신인문학상’에 동시 「샛강 아이」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1988년 ‘계몽사 어린이문학상’ 장편동화 부문에 『솔밭골 별신제』가 당선되기도 했다. 토속적이고 질박한 분위기가 물씬한 작품 세계를 추구하던 중, 1989년 11월에 60편의 동시를 이 세상에 남겨 둔 채 37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2002년 유고 동시집 『샛강 아이』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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