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 김시습(金時習·1435~1493)
가을은 노을을 잘라내어
옅은 색 짙은 색 붉은 천을 만들고
서슬 퍼런 서리는 웬 정이 많은지
끝도 없이 솜씨를 보인다.
저무는 낙조 아래로 점점이 불에 타오르고
이 산 저 산 속에 층층이 화폭이 펼쳐진다.
몇 줄의 사연은 심사를 구슬프게 만들며
이런저런 시름 끌고 저녁 바람에 떨어진다.
깊어가는 가을 향해 조락을 원망하지 말자.
봄바람은 또 시든 풀숲에서 풀을 엮고 있을 게다.
紅葉
秋霞翦作淺深紅
(추하전작천심홍)
靑女多情巧不窮
(청녀다정교불궁)
點點欲燒殘照外
(점점욕소잔조외)
層層如畵亂山中
(층층여화난산중)
數行書字悲心事
(수항서자비심사)
幾 牽愁落晩風
(기개견수낙만풍)
莫向秋深怨零落
(막향추심원영락)
東君應又綴殘叢
(동군응우철잔총)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청산을 떠도는 비애를 즐겨 읊었다. 단풍을 보면 늘 마음이 설렌다. 형언할 수 없는 단풍의 아름다움은 가을 하늘을 수놓은 노을의 변신도 같고, 서리의 짓궂은 장난도 같다. 시선은 단풍잎 하나하나에 머물다가 어느새 산의 위아래로 옮겨간다. 낙엽에는 숨겨놓았던 사연이 몇 줄 쓰여 있는 듯 아픈 추억을 떠올리면서 어수선하게 바람에 나부낀다. 그렇다고 이 가을에 너무 조락만을 말하지 말자! 죽은 풀숲 곳곳에서 봄바람은 또다시 생명을 키워내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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