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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란 시인 별세

moon향 2015. 9. 27. 21:27

 

문병란 시인 별세

별세 9월 25일
발인 9월 29일

빈소 :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

대표적 민중시인이자 저항시인인 문병란 전 조선대 교수가 25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분단의 아픔을 절절한 그리움으로 노래한 이 시는 1981년 출간된 문병란 시인의 시선집 <땅의 연가>에 실렸다. 이를 가수 김원중이 노래 <직녀에게>로 만들어 부르면서 대중에게 친숙해 졌다. 남과 북을 각각 견우와 직녀의 연인 관계로 비유하며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고 노래했던 시인은 결국 ‘연인의 만남’을 보지 못했다.

시인이자 교육자,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했던 문병란 시인이 암 투병끝에 25일 오전 6시 별세했다. 향년 80세. 1935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시인은 조선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3년 다형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가로수’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시인은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저항하면서 현실의 부조리를 형상화는 시들을 줄곧 발표했다. 1970년대 이후 <죽순 밭에서> <벼들의 속삭임> 등을 발표하며 저항의식을 바탕으로 한 민중문학을 선보였다. 문병란은 실제로 5.18 광주민주화 운동당시 내란음모선동자로 수배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석방된 뒤에도 꾸준히 시로서 저항하기도 했는데 뉴욕 타임즈는 ‘ 화염병대신 시를 던진 저항시인’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는 민중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의 시어는 “별다른 지식 없이도 한번 읽으면 이내 그 뜻을 알 수 있는 평범하고 친숙한 언어”였다. 그의 ‘쉬운 시 쓰기’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문학의 기법이며, 지식인을 위한 모더니즘 시를 극복하는 그의 문학적 방법이었다.

유신독재에 저항해 온 문병란은 광주민중항쟁 이후 “광주사태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구속되기도 했다. 80년 이후에는 광주라는 역사적 공간을 더욱 치열하고 비장하게 다룬 시 “죽순밭에서”에 이어 “땅의 연가”가 판매금지 조치를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는 80년대 ‘정당성’ ‘죽순 밭에서’ ‘벼들의 속삭임’등이 판금 조치를 당하는 등이 고난을 겪었지만 정의의 붓을 놓지 않고 무등산의 등신대, 또는 파수꾼으로 살면서 남도사람들의 삶을 서정적으로 보여주었다.

한편, 문시인은 대학 졸업 후 순천고, 광주일고, 전남고 교사를 거쳐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근무하다 해직된 바 있다. 1988년 조선대학에 복직,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시창작법’ ‘현대시론’ ‘민족문학론’ 등을 강의해 오다 2000년 8월 정년퇴직하였다. 대학재직 시절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남북민족교류협의회 이사, 광주전남민족작가회의 고문을 맡은 바 있으며 활발한 문학활동으로 요산문학상, 금호예술상, 광주시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마지막 공적활동으로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이사장을 맡아 문화교류를 통한 지역문화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