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낼 때, 네 사람이 모두 찬성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구 하나라도 반대하면 출간하지 않는다."
문학과지성사가 문을 연 1975년 12월 12일 '김(Kim)' 씨 성을 가진 문학평론가 4인은 이렇게 약속했다. 이른바 '4K'로 불리는 '문지 1세대' 김병익·김주연·김치수·김현 문학평론가는 이 같은 편집원칙을 세우고, 한국 문학의 집대성을 다짐했다. 오생근·김종철 평론가가 1977년 합류하면서 '문지 1세대'가 출발했고 그들은 문학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갔다.
40년이 흘러 문지사는 어느덧 불혹의 나이로 성장했다. 중년기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세대 교체는 불가피했지만 그 명맥은 꾸준히 이어져 한국 문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어졌다. 문지가 배출한 소설가와 시인은 무수했고, 깊이와 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작품은 각각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굳어졌다. 문지가 배출한 대표 소설가와 시인을 만나본다.
한국 소설의 지평을 넓힌 문지사가 배출한 소설 가운데 그 무엇보다 사랑받아온 작품이 있다. 작가 최인훈의 '광장'이다.
1960년부터 월간지 '새벽'에 발표된 '광장'은 정향사와 민음사를 거쳐 1976년 문지사에 정착한다.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좌도 우도 선택할 수 없는 회색인이 돼 버린 명준의 선택을 통해 작가는 1960년대 인간 군상을 조명한다. 양면으로 갈린 처참한 시대 속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은 최인훈의 작품 정신으로 승화한다. '구운몽'과 엮여 출간된 이 책은 바야흐로 200쇄 대기록을 바라보고 있다.
소록도에서 투병 중인 주민들 삶에 틈입한 이상욱 보건과장과 조백헌 원장 간 갈등을 조명한 작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도 문지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김태환 평론가는 "세계의 질서와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권력에 대해 회의하고 또 그 회의를 회의한다"고 소설의 의도를 정의했다. 올해 10월 말 132쇄를 찍은 책은 지난달 다시 1쇄를 추가하면서 지금도 인기가 현재 진행형이다.
작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은 분단의 현실에 마주한 냉혹한 가정사를 조명한다. 편모 슬하 13세 소년의 시각으로 쓰인 '마당 깊은 집'은 나약한 가정사로 근현대사 속 우리네 삶을 조명한다. 2005년 MBC 프로그램 '책을 읽읍시다' 코너에서 추천 도서로 선정돼 60만부 넘는 판매량을 쌓는 대기록을 세우며 사랑받은 책이다.
문지사 현재 나이인 불혹에 등단(1970년)한 작가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도 문지 대표작 중 하나다. 1998년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이후 9년 만에 세상에 나온 '친절한 복희씨'는 암('대범한 밥상') 중풍('친절한 복희씨') 치매('후남아, 밥 먹어라'와 '그 남자네 집') 등에 놓인 삶의 저변을 관찰해낸다. 단편 9편이 한 권으로 묶이며 사랑을 받았다.
소설가 한강의 첫 소설집인 '여수의 사랑'도 문지사 명작선에 이름을 올린 수작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인간의 운명적 슬픔을 짊어지고 어디론까 떠난다. 세상에서 만날 수 없는 인물들의 부재는 실존하는 존재들의 그리움과 맞닿아 있다.
시인들 시집도 문지 시인선으로 끊임없이 묶여 나왔다.
문지 시인선 1호는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다. 황 시인은 문지가 배출한 대표 시인 중 한 명이다. 1978년 이 시집을 필두로 황 시인은 '악어를 조심하라고?' '몰운대행' '미시령 큰바람' 등 시집 10권을 써냈다. 부지런한 시작(詩作)은 황동규를 증거했다.
3호 시집인 '나는 별아저씨'를 시작으로 시집 7권을 문지사에서 낸 정현종 시인도 문지와 연이 깊다. 관념적이면서도 사물의 존재 의의를 밝히려는 시인의 의도가 그의 작품 세계라면 그는 문지와 함께 그 작업을 진행해왔다.
13호 시집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낸 이성복 시인은 개인적인 삶의 고통을 보편적인 삶으로 확대하는 시세계를 보였다. 이 시집은 1980년 출간된 이래 49쇄를 찍었고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도 20쇄를 가뿐히 넘기며 한국 시의 정수로 자리매김했다.
마종기 시인은 시인선 2호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8권을 냈다. 최근 문지사에서 출간된 '마흔두 개의 초록'은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드물게도 '의사시인'의 길을 걷는 마 시인의 창작 활동도 문지와 함께였다.
오정희·복거일·박상륭·이인성·최수철·임철우·백민석·정이현·한유주 소설가, 오규원·김광규·황지우·최승자·김혜순·황인숙·장석남·유하·기형도·심보선·진은영·황병승·김경주 등도 문지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국 문학 주역들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4년 전 문지 시인선 400호를 기념하면서 "이것은 어느 출판사가 33년 동안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라고 썼다. 다시 4년이 흘렀으니 이제 37년간 한국 사회가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읽힌다. 문학과지성사가 40년간 그토록 생동했다는 건, 어찌 보면 '한국 사회가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 폐간된 문지 41호, 35년만에 빛봐
35년. 책 한 권이 출간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이를 두고 "잉태는 했지만 출산은 못한 불운한 책"이라고 썼다. 문학과지성사 40주년을 앞두고 그는 1980년 7월 31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책을 기억해냈다. 계간지 '문학과지성' 41호 얘기다. 이 '41호'는 의미가 사뭇 남다르다. 문학과지성사가 현재 발간하고 있는 계간지는 '문학과사회'이지만 40호까지만 발행됐던 '문학과지성'은 그 모태로서 존재했다. 한때 출판사 정체성이기도 했던 이 계간지는 35년 전 신군부 정권에 의해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처분을 받아 강제로 폐간됐다. 문지사는 12일 창사 40주년을 앞두고 '41호'를 만들었다. 1980년 가을호, 통권 41호 문학과지성 복각본(復刻本)이다.
문지사는 당시 교정지 50부는 만들어 간행되지도 못할 잡지를 애써 간직했다. 문지 편집팀과 몇몇 필자들이 나눠 가졌다. 책은 1980년 복각본인 만큼 인쇄 상태가 1980년대 그것과 다르지 않다. 책에 인쇄된 활자 흔적은 잉크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소설로는 이청준의 '탕자의 마귀-언어사회학서설·4', 조해일의 '임꺽정', 백도기의 '우리들의 불꽃', 김상렬의 '붉은 달', 황순원의 '신들의 주사위·11' 등이 실렸다. 송욱의 '도의 생리학', 오규원의 '네 번째의 대답', 박경석의 '인동(忍冬)' 등 시도 대거 실었다. 김주연은 마종기를, 김현은 김광규를, 이태동은 황순원을 비추는 글을 실었다.
문지사는 '41호'와 함께 '한국 문학의 가능성'과 '행복한 책읽기' 등 저서 두 권도 함께 냈다.
한국 문학의 가능성은 40년 넘게 문지의 핵심이던 1~4세대 문지 동인들 평문을 모은 선집이다. 동인 21명 가운데 한 편씩 글을 선정했다. 이근혜 문지 수석편집장은 "한국 문단에 깊은 성찰이 요구됐던 2015년 '문지 담론'의 자의식을 다시 되새기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 숫자로 본 문지의 40년
문학과지성사 40년은 한국 문학의 공론장이 열린 시대와 그 맥락을 나란히 한다.
네 차례 세대 교체로 현 5세대 체제가 오기까지 '문지'는 무수한 기록들을 남겼다. 이근혜 문지 수석편집장에게 도움을 받아 '문지 40년'을 숫자로 돌아봤다.
◆ 2600
문지가 1975년 창립된 후 40년간 발행한 책 숫자. 문지사는 문학뿐만 아니라 학술, 인물, 아동, 청소년 분야까지 총망라했다. 문지 표지 책등에는 붉은 사각형이 출판사 상호와 함께 인쇄돼 있다. 시인선 등 일부를 제외하고, 이들 문지 책을 책장에 꽂으면 '빨간 띠'가 형성된다.
◆ 191
문지가 발행한 책 판매 부수는 과거 판매된 책을 디지털화하지 않은 까닭에 합산이 불가능하다. 문지 최고 베스트셀러 판매 부수는 발행쇄 수치로 가늠해 볼 수 있다. 1976년 초판 발행된 최인훈의 '광장/구운몽'은 191쇄를 기록해 현재까지 66만5000부 팔린 문지 최고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김유태 기자]
문지사는 '41호'와 함께 '한국 문학의 가능성'과 '행복한 책읽기' 등 저서 두 권도 함께 냈다.
한국 문학의 가능성은 40년 넘게 문지의 핵심이던 1~4세대 문지 동인들 평문을 모은 선집이다. 동인 21명 가운데 한 편씩 글을 선정했다. 이근혜 문지 수석편집장은 "한국 문단에 깊은 성찰이 요구됐던 2015년 '문지 담론'의 자의식을 다시 되새기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 숫자로 본 문지의 40년
문학과지성사 40년은 한국 문학의 공론장이 열린 시대와 그 맥락을 나란히 한다.
네 차례 세대 교체로 현 5세대 체제가 오기까지 '문지'는 무수한 기록들을 남겼다. 이근혜 문지 수석편집장에게 도움을 받아 '문지 40년'을 숫자로 돌아봤다.
◆ 2600
문지가 1975년 창립된 후 40년간 발행한 책 숫자. 문지사는 문학뿐만 아니라 학술, 인물, 아동, 청소년 분야까지 총망라했다. 문지 표지 책등에는 붉은 사각형이 출판사 상호와 함께 인쇄돼 있다. 시인선 등 일부를 제외하고, 이들 문지 책을 책장에 꽂으면 '빨간 띠'가 형성된다.
◆ 191
문지가 발행한 책 판매 부수는 과거 판매된 책을 디지털화하지 않은 까닭에 합산이 불가능하다. 문지 최고 베스트셀러 판매 부수는 발행쇄 수치로 가늠해 볼 수 있다. 1976년 초판 발행된 최인훈의 '광장/구운몽'은 191쇄를 기록해 현재까지 66만5000부 팔린 문지 최고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 56 시인 기형도 육체는 1989년 사라졌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평론가 김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기형도)의 시에 충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의 육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어서"다. 시인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현재까지 56쇄가 인쇄돼 30만부 가까이 팔렸다. 27쇄를 돌파한 '기형도 전집'까지 합하면 36만부로 추정된다. 문지가 배출한 시인 중 최다 판매량이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