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 한권의 책에 인생의 모든 답이 들어 있습니다!"
- 캘빈 밀러
기독교 신앙의 교훈은 우리가 가방에 넣어 갖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책 한 권에 기초해 있다.
하나님이 우리가 알도록 의도하신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책 한 권에 담겨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렇지만 처음 믿을 때에는 그 성경조차도 엄청나게 크고 닫혀 있는듯 보인다.
중요한 단어들, 수많은 이름들, 매우 이상야릇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책으로 보인다.
사실 성경을 처음 접한 새신자들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성경은 엄청나게 이해하기 어려운데
예수님과 신앙은 어쩌면 그렇게 간단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
신앙 생활의 처음 몇 주 동안 많은 새신자는 아주 불필요한 일종의 성경 공포증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이 두려움을 평생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성경을 다이너마이트처럼 여긴다.
의미있는 삶으로 가는 그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애물을 날려버릴 힘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두껍고 둔탁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새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을 섬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어린아이를 본받아야 한다.
어린아이들에게서는 성경 공포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이들은 낭만적으로 성경을 사랑한다.
그러나 성장해 가면서 성경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거나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경에는 중요한 단어들과 어려운 개념들 그리고 내 마음을 좌절시키는 긴 문장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최선의 방법
우리는 하나님이 그 분 자신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로 결정하신 것들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진정한 속성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공표하시기 위해 그 숨으신 곳에서 나오겠다고 결정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그 분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공표하기로 결정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기록이다.
어린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며 논다.
나는 어릴 때 이 놀이를 하면서 친구들이 결코 나를 찾을 수 없을만큼 은밀한 곳을 참아 숨으려고 애쓰는 것이 재미있었다.
친구들이 완전히 포기하고 나를 찾아내지 못해 아주 실망해 있을 때 숨은 곳에서 훌쩍 뛰어나와 “여기 있지!” 하고 소리치는 맛이란!
하나님도 “여기 있다!” 고 외침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로 결정하시기 전까지는 우리에게서 영원히 숨어 있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시기 때문에 가련하고 곤궁한 우리 인간은 결코 그분을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발견해 낼 수 없기에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기로 결정하셨다.
“여기 있다!” 는 하나님 외침의 일부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다양한 거짓 종교들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자 애쓸 때 얼마나 잘못되는지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다.
바울은 마음이 때로는 어두워질 수도 있으며, 위선적이고 천박한 예배로 끝나게 된다(롬 1:19-23)고 말했다.
흔히 그들 자신의 육체와 기본적인 욕망만 숭배하는 것으로 끝맺고 마는 것이다.
그리스․로마의 신전, 남신과 여신들을 보라.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지 보여 준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과 매우 닮은 신의 형상을 만들었고, 그런 후 그것을 숭배했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음을 깨닫는(그리스도인처럼)대신 그들은 자기들의 형상대로 신들을 창조한 것이다.
그 신들은 그들의 모습보다 훨씬 이상적이긴 해도 상당 부분 그들과 닮았다.
남신들은 키가 크고 근육이 탄탄하며 여신들은 풍만하고 매력적이었다.
육체적인 면에서 볼 때 그 신들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신들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가?
이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그들을 조각한 사람들을 너무도 빼닮았다.
그들은 온갖 음모와 쾌락을 추구했고 문잡한 음행과 난잡한 성에 탐닉해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이교도들은 우리 마음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강렬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4세기의 그리스도인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에는 우리 마음이 쉴 수 없다고 증언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희한하여, 맹렬하고 끊임없는 탐구를 계속하다가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불안하고 인간적인 신만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참 하나님은 발견할 수 없다.
그분이 마치 숨어 있다가 뛰어나오는 아이처럼 “여기 있다!” 하시며 우리의 갈급한 영성 안으로 뛰어들어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Revelation)은 가끔 사도 요한의 묵시(Apocalypse of St. John)라고도 불린다.
묵시리는 단어는 이어지는 공연을 위해 감추어져 있던 무대장치를 일시에 드러내 보이도록 막을 올리는 것과 연관이 있다.
이전에 어떤 공연이라도 관람한 적이 있다면 한번 떠올려 보라. 아내와 나는 연극을 무척 좋아한다.
연극을 보러 갈 때는 항상 막이 오르기 전에 미리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제껏 수많은 뮤지컬을 봤지만 나는 서곡이 울리는 그 매력적인 순간을 지루하게 느낀 적이 결코 없었다.
심벌즈가 챙챙거리고, 팀파니가 쿵쿵대며, 바이올린이 소리를 높이고, 뮤지컬이나 오페라 혹은 연극은 개막을 기다린다.
그리고 막이 오른다. 이 매혹적인 순간 막이 올라가면 숨이 막할 만큼 아름다운 무대가 그 놀라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진짜 살아 잇는 사람인 배우들이 등장하여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실감나게 전달한다.
우리는 예술가나 극작가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기 원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무대로 달려 올라가 막을 걷어 내고 금지 구역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그 작품을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계시했기 때문에 즉 막을 올렸기 때문에 보게 된 것이다.
그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세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첫째,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아름다운 노을이나 이슬을 머금은 장미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하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선포한다. 시편 기자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거한다고 말했다(시 19:1).
이 증거는 매우 확실하기 때문에 바보만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것이라 했다(시 14:11).
둘째, 자연계를 제외하고 하나님이 일찍이 “여기 있다!”고 말씀하신 가장 분명한 방법은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서 그분이 하실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화신(化身)이셨다.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사람은 누구나 “여기 있다!”고 외치시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아버지의 우편으로 돌아가셨고,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는 최선의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다.
성경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선언이다.
성경을 한 장씩 읽어갈 때 하나님은 “여기 있다!”고 선언하시기 위해 숨어 계시던 곳에서 뛰어나오신다.
40여 명이 천 년 이상 집필한 66권의 책
성경 자체는 사람들(첫째는 유대인 그 다음은 그리스도인)의 역사와 삶을 응축한 것이다.
이 책은 길고도 매혹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복잡할 만큼이나 아름답다.
이렇게 작은 부피의 책이 방대한 문서들의 응축이며, 수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정제된 것이다.
성경 시대 동안 쓰여진 책들 중 많은 책이 성경에 포함되지 않았다.
모세는 언약서에 기록되었던 여호와의 모든 말씀에 대해 언급했지만(출 24:4) 이 책은 유실되었기에 우리에게는 없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율법 책을 언급했지만(수 24:26), 이 책 또한 우리에게 없다.
바울의 언급에 따르면 그가 고린도 교회에 써 보낸 편지는 둘이 아니라 넷이었다(고전 5:9, 고후 7:8).
이로 미루어 볼 때 편지 네 통 중 둘이 유실되었음이 분명하다.
사도 요한은 기록된 다른 복음서들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없지만(의심할 여지없이 있었다)
우리가 성경에 포함된 책들에서 얻을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정보는 단편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요한은 예수님이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다고 기술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기록된 많은 복음서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네 권만이 성경에 포함시킬 만큼 근거 있고 믿을 만하며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믿는다.
1940년대 후반에 나그 하마디(Nag Hammadi, 영지주의 본문들) 전체를 발견한 것은 고대 세계에 사본들이 풍부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것들 중 다수는 나일강 계곡에서 발견된 것들처럼 거짓 문서였다. 극소수만이 성경에 포함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었다.
그렇게 인정받은 책들에는 정경(can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초대 기독교 회의들은 어느 책을 포함하고 어느 책을 뺄지 결정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수많은 선택안을 숙의했다.
그리고 명백하게 사도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책들(어떤 면에서든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하나와 믿을 만한 연관성이 있는)만 포함시켜서
마침내 신약이 완성된 것이다.
이 책들은 교회가 대대로 성경에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던 것들이다. 그 책은 66권이다.
1,400~1,700년의 기간에 걸쳐 40명 이상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책이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받아 쓰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특별하게 영감되었다는 개념을 어디에서 얻었는가? 바로 성경 자체에서다!
바울은 그의 젊은 친구 디모데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베드로도 두 번째 편지에 동일한 내용의 진리를 기억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
성령 자신이 성경의 저자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이 금으로 된 판들 위에 여러 책을 손수 기록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하신 모든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우선 그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성령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레미야에게 “자리에 앉아 진지한 자세로 편지를 써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성령은 예레미야의 내면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예레미야 자신의 깊은 사랑 속에서 그분이 말씀하셨다.
그 당시 예레미야는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세상에 살고 있었다. 머지않아 전쟁의 소용돌이가 그의 조국을 멸망시킬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을 공경하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한 예레미야는 세심하게 귀를 기울였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 중심에서 말씀하셨고, 선지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록했다.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속삭임을 유다 사람들에게 전했다.
유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여 이 시대가 큰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참으로 위험한 시대라는 것을 그들이 알기 원했다. 예레미야는 약 BC 6세기에 그 말씀을 전파했고,
그 설교는 모든 시대에 속한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진리를 담고 있었다.
모든 성경은 영감되었다. 영감되다(inspired)는 말은 숨을 불어넣다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에서 파생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숨결은 얼마나 능력 있는 것인가!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리라.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시는 것마다 생명을 얻는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첫 인류인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명 없는 피조물인 사람이 생명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구약 전체에서 ruach(루아흐)라는 단어는 바람과 숨결 둘 다 가리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하실 때 성경은 하나님이 강한 동풍으로 홍해의 물을 억류하셨다고 말한다(출 14:21).
그 바람이 바로 하나님의 숨결(ruach)이다.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숨을 불어넣으시며, 그분의 숨에서 생명이 나온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이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당연히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
하나님의 숨이 생명을 준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강한 바람(바로 하나님의 숨)으로 임하셨다(행 2:2).
니고데모에게 새로운 출생을 설명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바람으로 묘사하셨다(요 3장).
우리를 구원하는 바람은 언제나 성령의 바람, 하나님의 숨결이다.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시는 곳에 생명이 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보통의 펜과 잉크에 숨을 불어넣으셔서 그 말들이 생명을 갖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God breathed)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진정한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히 4:12).
당연히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
나는 성령이 그 말들에게 생명을 주실 때에 하시는 일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간단히 말해 그 말들은 영감된 것이다.
그러면 마가렛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썼을 때 영감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녀의 영감은 퓰리처 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것이었지만 우리가 성경이 영감되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것이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그렇지 않다.
그 소설이 인간 재능의 최고봉일 수는 있지만 세월을 넘어 전달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 세기의 여러 사람이 하나님 영감의 숨결을 느낀 글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을 받은 책으로 우리가 삶에서 성취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훨씬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단지 훌륭한 히브리 문학이나 그리스 문학 혹은 영문학 작품을 만드시려고 성경을 기록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분이 그분의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실 것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성경을 기록하셨다.
그래서 그 책에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숨결에 사로잡혀 글을 썼고,
세상은 하나님이 인류에 대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령의 숨결을 받아 기록된 진리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책에 영감을 불어넣으시는가?” 이 방법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제시되어 왔다.
어떤 이는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영감받은 작가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단지 고전적인 방법으로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보다 훨씬 더 영감되었다.
또 역동적 견해(Dynamic View)라고 알려진 더 구체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셔서 구체적인 일들을 기록하게 하셨지만
단지 일반적인 방법으로 영감을 불어넣으셨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는 성경에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들은 단지 일반적인 방법으로 영감되었기 때문에
사상은 어느 정도 정확하지만 본문의 실제 단어들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견해는 성경 영감에 대한 축자적 견해(Verbal View)다.
이 견해는 20세기 초에 복음주의자들이 결정한 것이다.
19세기 말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 무오설(교황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선언했다.
이 무오 개념으로 인해 개신교도들은 재빨리 성경을 무오한 말씀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역사 초기에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확고하게 결정했다.
무오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그것을 말씀하여 존재하게 하셨고, 무오한 방법으로 성경이 기록되게 하셨다.
복음주의 역사의 시초부터 성경 무오 사상은, 성경의 말씀들을 고찰하여 그에 따라 이론을 형성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성경의 저자이시며 그분에게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축자적으로 성경 말씀에 영감을 불어넣으셨다는 견해는 성경 저자들의 독창성을 폐기시키지 않는다.
성경 무오설을 믿는 복음주의자들을 혹평하는 사람들이 자주 제기하는 비난은 이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성경 단어마다 영감을 불어 넣으셨다면
왜 서로 다른 40명의 성경 저자들이 자기 특유의 문체를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만일 하나님이 성경 전체의 단어마다 영감을 불어넣으셨다면 마태와 예레미야가 똑같은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이 성경의 단어를 낱낱이 받아쓰게 하셨다는 견해를 구술 영감설(Dictation Theory)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양식과 문체의 차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계적인 구술 이론을 외면한다.
하나님이 성경을 구체적으로 영감되게 하셨지만 문체는 저자 각자의 특성에 맡기셨다는 주장을 선호한다.
각 저자들의 뚜렷한 기록 양식의 차이는 개개인의 개성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풍성하고 다양한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실수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기록 양식의 차이가 하나님이 성경 저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원하는 바를 기록하시되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하나님께 받아 말한(벧전 1:21) 옛날의 거룩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성경은 구술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 저자들에게 개성을 버리도록 명령하시는 하늘의 CEO가 아니시다.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은 그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개성을 유지하도록 허락하셨다.
이 사상에는 부력의 개념이 담겨 있다. 결국 영감은 바로 부력이다.
강물 위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우리를 뜨게 하는 것이 부력의 성질이다.
나뭇잎은 고유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강물이다.
나뭇잎의 방향, 속도, 목적지 이 모든 것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강물이다. 성경 저자들은 각자 다른 나뭇잎이었다.
예레미야는 시인 같은 나뭇잎이었다. 아모스는 시골 풍의 목자 같은 나뭇잎이었다. 마가는 신문이나 잡지 기자 같은 나뭇잎이었다.
누가는 의사 나뭇잎이었고, 바울은 법률가 나뭇잎이었다. 단풍나무 잎이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종려나무 잎과 다르듯 각 나뭇잎도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각 성경 저자의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저자가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다.
그들 특유의 사고방식, 독특한 문체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경 전체를 통해 흘러내리는 권능 있는 동일한 성령의 강물에 감동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물줄기는 성경의 권위다. 그것은 모든 나뭇잎이 동일한 동기 유발을 품도록 한다.
그래서 나뭇잎들은 모두 동일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물줄기를 거슬러 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견해는 예수님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 느끼셨던 바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단언하셨다.
바울은 구약의 유대교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위임받았다고 생각했다(롬 3:2).
구약의 어느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말할 때
그는 자기의 기록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인간의 어떤 개정이나 해석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성경 자체를 파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다.
사도들 또한 하나님의 영감 아래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령을 힘입어 말한다고 확실히 주장했다(벧전 1:12).
그들은 자기들이 가르치는 형식과 방법 모두를 그분께 속한 것으로 돌렸다(고전 2:13).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울 뿐 아니라(살전 4:2, 살후 3:6),
자기들이 기록한 명령의 수용을 영적인 순종에 대한 시금석으로 삼았다(고전 14:37).
심지어 그들은 구약을 대하는 것과 동일한 경의를 품고 서로의 글을 언급하기도 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숨을 불어넣으신다
하나님 영감에 있어 최고 요소는 긴 연접부(synapse) 양쪽 끝 모두에 영감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영감을 불어넣으셔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령은 바울의 삶 속에서 일하셨고, 이 영광스러운 신약 최초의 책의 내용을 그에게 불어넣으셨다.
한줄 한줄, 그리스어 한 자 한 자를 써 내려갈 때 바울의 펜 끝에서 놀라운 편지가 탄생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숨을 받았다는 이해 없이는 아무도 놀라운 믿음으로 그 편지를 읽을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을 기록했다고 해서 영광이 끝난 게 아니다.
성령은 그분의 옛 연인인 바울을 감동시키셔서 편지를 기록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읽을 때 다시금 우리 삶 속에 숨을 불어넣으신다. 그럴 때에만 영감이 최상의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성령은 2천년 된 호(弧)의 양쪽 끝에서 일하고 계신다. 호의 한쪽 끝에는 바울이, 다른 쪽 끝에는 우리가 있다. 성령은 양쪽에 계신다.
바울 사도가 기록할 때에는 그 정확성을 보장하셨고 우리가 읽을 때는 그 확실성을 보장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영광을 나타낸다. 나는 이를 영감 연접부(inspiration synapse)라 부르고 싶다.
기록을 명하신 동일한 성령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성경 말씀을 읽고 성장하기 시작할 때에 이르기까지
세월을 가로질러 그 구절에 역사하신다.
성경 번역본 이야기 그러나 우리는 영감에 대한 견해에 있어 감상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그리스어로 말했다. 예레미야는 히브리어로 말했다. 예수님은 아람어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들의 삶 속에 일하셨을 때 단 한 경우도 국어로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우리가 성경을 국어로 읽는다는 사실은 어떤 사람이나 그룹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성경은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형식으로 주어졌다.
성경은 가장 훌륭한 고전 언어로 쓰여지지 않았다.
바울은 학식 있는 사람이었지만 1세기 그리스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던 코이네(Koine)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4세기에 제롬이 처음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도 상황은 똑같았다.
제롬(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은 바울과 다른 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길거리 그리스어를 길거리 혹은 벌게이트(Vulgate; 통속적인)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바울은 플라톤이나 호머의 문학적인 고전어를 피했다.
제롬은 오비디우스나 키케로의 고전 라틴어를 피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항상 보통 사람의 보통 언어로 전달되어 내려왔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나님은 길거리의 보통 사람들과 보통 방법으로 의사소통하고 싶어 하셨다.
코이네 신약성경은(라틴 벌게이트를 참조하여) 마침내 옥스퍼드의 학자 윌리엄 틴데일에 의해 영어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최고의 영문학자들이 번역한 킹 제임스역(KJV)의 문체를 만들어 냈다.
그가 번역한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으로 다소 고전적인 양식을 지니게 되었다.
킹 제임스 번역은 매우 훌륭한 영어의 형식을 띠기 때문에 흔히 세익스피어나 다른 고전 작가들의 작품들과 조화를 이루며 비교된다.
이 위대한 번역물은 대영 제국의 확대와 현대 선교 운동의 세계적인 추진이 이루어지는 동안 영어의 발전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 두가지 운동은 킹 제임스 성경의 힘과 세력을 전 세계에 확산시켰다.
Story of English(영어 이야기)에서 저자들은 킹 제임스 성경을 출간하던 당시 세상에는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 3백만 명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후 4백년 동안 영어는 만국 공용어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영어가 미친 광범위한 영향의 상당 부분을 킹 제임스 성경 및 세익스피어의 희곡과 시 덕분으로 돌리고 있다.
조지 버나드 쇼는 그의 희곡 <피그말리온(Pygmalion)>에서 세속적인 현자 헨리 히긴즈 교수로 하여금
영어가 세익스피어와 밀톤 그리고 성경의 언어라고 고백하게 한다.
최근 성경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와 같이 비고전적인 형식이라는 방향을 지향한 새로운 번역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새로운 번역본들은 일반적으로 중학교 2학년 수준으로 쓰여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킹 제임스 성경은 고등학교 3학년 수준이다.
새로운 번역본들은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 친근감을 더하고 있는데 특히 지적 능력을 저하시키는 서구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네일 포스트맨은 서구 문화가 인쇄 문화에서 비디오 문화로 옮겨갔기 때문에 독서 수준이 심각하게 하락했다고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독서 수준의 계속적인 하락은 비탄할 만하지만 성경은 언제나 대중이 접근하기가 더 쉬워질 것이다.
새로운 번역본들은 조상들이 지녔던 독서 기술이 부족한 현대 독자들에게 훨씬 더 친근감이 있다.
다시 한번 코이네 성경의 길거리 언어가 덜 복잡하고 더 읽기 쉬운 번역본들에게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이렇게 읽으라! 어떻게 하면 새신자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읽기 시작할 수 있을까? 모든 신자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는 성경을 일평생 체계적으로 공부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도의 헌신이다.
제자(disciple)라는 말은 훈련(discipline)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는 것을 기억하라.
게다가 제자라는 단어는 학생을 의미하고, 학생의 정의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어느 분야에서 학생이 되려 한다면 반드시 공부하기로 결심해야만 한다.
이렇게 결심해야 평생 훌륭한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다.
일단 결심했다면 다음으로는 공부할 장소에 필요한 도구를 갖추어야 한다.
적당한 조명, 필기 도구, 파고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공책 등이 있다.
그리고 항상 연구할 하나의 성경 번역본을 선택하라.
많은 주석 성경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는 성경을 권하고 싶다.
그런 성경을 갖고 있으면 때때로 필요한 내용을 얻기 위해 다른 책이나 주석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신이 사용할 만한 많은 주석 성경들을 가능한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살펴보라.
거주 지역의 기독교 서점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성구 사전도 꼭 필요하다.
반드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단어와 구문을 포함하고 있는 성구 사전을 마련하라.
성경을 읽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나는 성경 전체를 일독하는 13주 통독을 권한다.
보통 성경이 2,000페이지(한글 성경들은 약1,600~1,800페이지)이므로 13주 통독을 하려면 한 주에 약 100페이지를 읽어야 한다.
하루에 약 15페이지를 읽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충실하여 가능한 주의 깊게 실행하라.
때로는 에스겔이나 레위기처럼 어려워서 읽기 힘든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멈추지 말라.
가능한 주의 깊게 이 구절들을 읽으라. 창세기나 시편, 복음서처럼 쉽게 읽을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정된 일독을 통해 성경에 다양한 종류의 책들과 문학적인 글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읽을 때 이 점에 유의하라. 매일매일 성경을 읽어 나가면 흥미 있는 등장 인물들을 만날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왜 성경에 등장하는지 공책에 기록해 보라. 당신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은 다른 성도들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해 보라.
아무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혹 당황해 할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질문해 준 것을 감사히 여길 것이다.
성경의 책들은 기록된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주석 성경에는 각 책들에 대한 해설이 있을 것이다.
언제 기록되었고, 이스라엘의 삶(구약)속에서나 교회의 역사(신약) 속에서 어떻게 존속되어 왔는지 설명해 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문학 양식의 범주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각 책들을 확인해 보라.
구약에서는 지금 모세오경(모세에 의해 기록된 처음 다섯 권), 역사서(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
성문서(시편, 잠언, 욥기 같은 시가서), 선지서(구약에서 개인의 이름을 따라 불리는 길고 짧은 모든 책) 중 어디를 읽고 있는지 확인하라.
신약에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서신, 공동서신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서로 분류되기도 하고 때로는 교회들에게 보낸 또 하나의 일반 서신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오래지 않아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성경이 길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될 것이다.
누군가가 잘 이야기했듯이 성경 사랑하기에도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의약단계(Medical Stage)다. 우리가 성경을 처음 발견하는 단계다.
어렵기도 하고 입맛에 맞지 않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억지로 성경을 삼켜 버린다.
두 번째는 으깬 감자 단계(Mashed Potato Stage)다.
물론 솔직히 말해 여전히 딱딱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다소 괜찮은 맛이라고 느끼면서 미각이 더 자극된다.
마지막은 아이스크림 단계(Ice Cream Stage)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영광과 풍성한 맛을 알게 되었으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영원을 실현시키는 그 책을 홀로 대하기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마치 벌꿀이 넘치는 벌집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풍성해진다.
홀로 이 책을 대할 때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되고, 우리의 비전이 회복되며, 삶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열정으로 재충전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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