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민의 문화의 발견]
공모전 출품 소설, 이것만은 피하라
평범한 보통명사를 제목으로 쓰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어떤 소설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신인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서 제목은 중요하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무렵부터 였다고 기억한다.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소설을 쓰고 싶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장래희망을 적어내는 시험지에 ‘소설가’라고 적었다.
초등학교 때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으리라. 좀 더 오래 꿈꿨다는 건 다르지만.
국어국문학과에 적을 두면 소설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입학해 보니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향가, 이런 것만 가르치더라.
그게 싫었다는 게 아니라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를 배우지 못했다.
적어도 전공시간에는. 쯧쯧 이놈아, 그런 걸 배우려면 문예창작과에 갔어야지, 라는 핀잔만 잔뜩 들었다.
할 수 없다. 혼자 쓰자.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
하지만 엿장수도 아닌 마당에 그게 마음대로 될 리 없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글’을 써보신 분이라면 동의해 주겠지만
글이라는 게 무작정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써지는 건 아니다. 그런 건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대가에게나 쓸모가 있을 뿐, 얼마간의 물리적인 압력이 필요하다.
도스토옙스키나 발자크 같은 대천재들도 “마감일이라는 존재에 강요당해
이성적인 정신이 어려운 일을 해내고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작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던 중 ‘소설 습작’이라는 2학점짜리 강의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교양선택이다. 현직 소설가가 수업을 진행하고 학기 중에 소설 두 편을 써내는 것이 과제라고 한다.
이거다 싶어 당장 신청하고 구상에 들어갔다.
장르는 미스터리. 나는 밤마다 책상에 앉아 갉작갉작 원고지를 채워나갔다.
이상적인 미인과, 이해하기 어려운 타입의 범인과, 깜짝 놀랄 만한 반전과, 도마뱀을 넣어 휘휘 저으면서.
여름밤은 길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낸 긴긴 밤이 죄다 ‘뻘짓’임을 깨닫는 데는 탈고하고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주위의 몇몇 친구들은 단지 도입부를 읽는 것만으로도 범인을 알아맞혀 버렸다.
나 혼자만 깜짝 놀란 반전이었던 거다. 막연히 예상했던 것보다 허들은 훨씬 높았다.
걸려 넘어진 정도가 아니라 까마득해서 보이지도 않을 만큼.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근성이 없다고 하겠지만 애초에 재능도 독서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언젠가는’ 하는 마음가짐으로 후일을 도모하자. 그때부터 마음에 드는 소설을 읽고 나면 작가 약력에 적힌 나이를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 사람은 나보다 빨리 태어났네, 아직 안 늦었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재작년부터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공모전에서 심사를 맡을 일이 생기곤 했다.
북스피어가 내는 책이다 보니 아무래도 장르소설을 쓰는 작가 지망생들의 작품을 읽을 일이 많아졌다.
한때 소설가를 꿈꿨던 인간으로서 그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부러운 마음이 든다.
세상에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이들은 적어도 나처럼 도망치지는 않았구나.
한편 그와는 별개로 작품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아쉬움도 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물론 몇 편의 습작 경험이 전부인 내가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식의 매뉴얼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 정도의 인간이 그런 글을 쓰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느냐. 그 답은 세계문학전집에 전부 나와 있으니까 열심히 읽으면 된다.
진부한 비유를 비틀어서 사용하자
다만, 어떻게 해야 좋지 않은 소설을 안 쓸 수 있느냐에 대해서라면
나도 여러 공모전의 심사에 참여하면서 깨달은 바가 조금 있으니 그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 몇 마디 적고자 한다.
‘참내, 너 따위에게 소설 강의를 듣고 싶진 않은데’라는 분들은 패스하셔도 무방하다.
읽으실 분들이라면 ‘심심풀이 삼아 거들떠보지, 뭐’ 하는 정도로 여기고 부디 고까워하진 말아주시기를.
<주간경향>의 담당자분이 이 글의 제목을 ‘공모전에 출품할 때 이런 설정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정도의 뉘앙스로
달아주면 좋겠는데, 어떨지.
그럼 슬슬 시작해 보자.
1) 장면 전환을 위해 전화를 이용하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공모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죽 읽다가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는 문장을 사용하는 지원자가 많아서 놀랐다.
많아도 보통 많은 게 아니다.
주로 도입부나 단락 사이에서 드라마틱한 장면 전환을 위해 사용한다.
‘갑자기+전화벨이+울렸다’는 어절의 순서까지 똑같다.
전화기가 발명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시비를 걸고 싶을 정도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그 다음 내용을 읽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한순간의 뻔한 연출로 작품 전체가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2) 진부한 비유는 피하는 것이 좋다.
가령 “그는 마치 망부석처럼 앞쪽에 끊임없이 늘어선 차량의 행렬을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보았다”라는 문장을 보자.
‘망부석처럼’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비유다.
“그는 마치 뱃머리에 서서 불길한 물때를 읽어내는 노련한 어부처럼 앞쪽에 끊임없이 늘어선 차량의 행렬을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보았다”는 정도의 비유를 구사할 자신이 없으면, 절대로 삼가는 게 좋다.
세련된 비유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굳이 사용 해야겠다면 진부한 비유를 비틀어서 사용하자. “좀처럼 보기 힘든 천사 같은 웃음” 대신에
“평소에는 열리는 일 없는 서랍의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낸 듯한 웃음” 같은 식으로 말이다.
3) 평범한 보통명사를 제목으로 쓰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어떤 소설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신인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서 제목은 중요하다.
한데 의외로 ‘농담’이나 ‘미인’ 같은 제목으로 출품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의 내용과 부합하는가와 상관없이 이처럼 ‘단순+평범’한 보통명사를 제목으로 사용해 버리면 성의가 없다는
느낌을 주기 쉽다. 밀란 쿤데라 정도의 대가쯤 되면 이런 제목도 얼마든지 심오해 보이겠지만,
작가 지망생에게는 틀림없이 마이너스 요인이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말은 성철 스님이 했으니까 ‘역시 굉장하구나’ 하고 느끼는 거지,
만약 내가 했다면 ‘미친놈’ 소리나 들을 뿐이다.
내용을 고려하지 말고 제목을 지으라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읽는 이가 궁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아 할 말은 많은데 어느새 나에게 주어진 페이지가 다하고 말았다.
다음 내용은 2주 후에나 이어가야겠다. 그다지 기다릴 독자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공모전 소설도 첫인상이 중요하다
공모전에서 보여줘야 할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이지, ‘나는 지금 문학을 하고 있다’는 포즈가 아니다.
의미 없는 묘사 대신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수수께끼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모든 공모전의 사정을 두루 알지는 못하니까 일반론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내가 심사를 맡았던 공모전의 경우,
작품의 양에 비해 읽고 판단할 시간은 부족했다. 원고를 대하는 자세도 공정 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이건 어디까지나 신인들이 쓴 소설이야, 이 중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버금갈 걸작이 나올 리 없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뻔한 설정이나 허술한 문장이 반복해서 눈에 띄면 읽기를 중단했다.
잔뜩 쌓인 원고들 앞에서 마음이 조급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끝까지 읽는 일이 고역이겠다 싶은 소설은 설령 시간이 남아돌았다 해도 읽지 않았으리라.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굉장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지엽적인 부분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자세보다,
‘나는 아직 대가가 아니니까 구성이나 문장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공모전에 임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지난 주 내용을 이어가 보자.
뻔한 정보기관 말고 차라리 창조하라
4) 명확한 의도 없이 불필요한 묘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소설이니까 도입부에는 당연히 묘사가 있어야지’라는 식의 응모작이 많았는데,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지루할 뿐이다. 소설을 묘사로 시작해야 한다고 누가 정한 건지는 모르겠다. 서두는 사람으로 치면 첫인상이다.
우리가 면접을 볼 때 첫인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듯, 공모전에 출품하는 소설도 첫인상이 중요하다.
<과학 하고 앉아 있네>라는 이름의 팟캐스트도 있던데 소설의 주제와 동떨어진 묘사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문학 하고 앉아 있네’라는 생각이 든다.
공모전에서 보여줘야 할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이지, ‘나는 지금 문학을 하고 있다’는 포즈가 아니다.
의미 없는 묘사 대신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수수께끼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를테면 루스 렌들은 <활자 잔혹극>이라는 추리소설에서
첫 단락 첫 문장에 범인의 이름을 밝힘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냈다.
이런 소설의 도입부를 눈여겨봐 주면 좋겠다.
5) 뻔한 기관을 주요한 소재로 삼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추리소설 공모전의 경우, 추리적 분위기를 풍겨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국정원’과 ‘중앙정보부’ 같은 기관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았다. ‘CIA’와 ‘FBI’도 있었다. 이런 기관들에 대해 충실히 조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독창적인 묘사가 뒤따른다면 좋겠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내용을 짜맞추어 ‘적당히 그런 느낌만 주면 되겠지’라는 식의 설정은 곤란하다. 꼭 이런 기관을 등장시켜야겠다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거나 직접 창조하는 방법이 있겠다.
참신한 기관을 등장시키는 것만으로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6) 영화의 한 장면을 옮기듯 문장을 서술하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당사자가 허락할 리 없으니 하나하나 예로 들기는 어렵지만 ‘이건 드라마의 지문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드는 문장으로 점철된 소설이 많았다. 오로지 주인공의 시선과 행동만을 쫓아 소설을 전개해 나갔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내가 지금 소설을 읽는 건지 시나리오를 읽는 건지 구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읽는 이로 하여금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그냥 옮겨 적었구나’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문장은 쓰지 말도록 하자.
7) ‘한 줄 띄어쓰기’나 ‘1. 2. 3.’ 하는 식으로 짧은 장을 반복해서 만드는 일은 피하는 게 좋다.
이런 형식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단상을 적을 때나 구사할 일이다.
인터넷 글쓰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장면의 전환을 문장으로 만들지 않고 단락을 구분하거나 한 줄 띄어쓰기로 처리하려는 응모자가 많았다.
본인이 박민규 작가쯤 되면야 “이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라는 한 문장만 턱 써놓고
“이게 한 단락이다”라고 주장해도 가타부타할 사람이 없겠지만,
데뷔를 앞둔 신인이 무턱대고 이렇게 쓰면 역량이 부족해 보일 뿐이다.
실험적인 소설을 쓸 요량이 아니라면 평범한 문장이어도 괜찮으니
단락을 띄지 말고 시간의 흐름과 장면 전환을 서술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자.
지나친 유머 욕심이 유치하게 만든다
8)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유머나 지나친 과장은 삼가는 게 좋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평균 이상의 유머감각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오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듯 지나친 개그 욕심이 관계를 망치는 법이다.
본인에게나 재미있을 뿐이고, 읽는 이에게는 재밌기는커녕 유치하거나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과장이나 유머도 천명관 작가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정말 아래와 같이 쓸 수 있겠나?
“이날 쏟아진 구호 가운데, ‘벽돌을 못 쓰게 죄다 깨뜨려버립시다!’나,
‘가마를 부숴버립시다’ 혹은 ‘공장에 불을 질러버립시다!’와 같은 주장은
잔뜩 화가 난 일꾼들 사이에서 일견 나올 법한 얘기였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파쇼에게 죽음을! 노동자에게 생존권을!’이나 ‘재벌독재 타도하여 노동자 천국 이룩하자!’와 같은 구호는 산골짜기에 있는 벽돌공장에서 써먹기엔 다소 유난스런 감이 없지 않았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나 ‘수령님의 영도 따라 미제를 박살내자!’와 같은 구호는 다소 수상한 감이 없지 않은데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벽돌공장 웬 말이냐!’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독재 물러가라!’와 같은 구호는 다소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는데, 또 어디선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영숙아, 사랑해!’나 ‘씹할, 그때 홍싸리를 먹는 건데’와 같은 소리는 그야말로 구호도 아니고 뭣도 아닌,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내지른 잡소리에 불과했다 아니할 수 없다.”
9) 글쓴이가 먼저 흥분해서 주관적인 표현을 쓰는 것은 자제하는 편이 좋다.
예를 들어 “그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섹시했다”라는 문장을 보자.
관건은, 어떻게 하면 ‘섹시’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그 여자가 섹시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대목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소설의 무게감을 결정한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섹시했다”는 쓰는 사람만 납득할 수 있는 문장이다.
‘아름답다’, ‘그림 같다’고 표현하기 전에, 그것이 어떻게 생겼길래 아름다운지,
얼마나 아름답길래 그림 같은지 독자가 알 수 있도록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아아 이만큼이나 썼는데도 할 말이 남았다.
이 주제로 한 번만 더 쓰고 싶은데 <주간경향>에서 허락해 줄지 모르겠다.
이 주 후에 주제가 바뀌었다면 거절당한 거고, 마무리할 수 있다면 ‘그럭저럭 읽어볼 만한 글’이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공모전에 투고한 분들의 심정에 비하겠냐만,
그래도 건투를 빌어주시길.
<북스피어 대표>
'그 리 고....♡ > 문 화 계 소 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작가연구-매리 홀 예츠 (0) | 2014.11.01 |
---|---|
[스크랩] 제1회 한국평화인권문학상 (0) | 2014.10.27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0) | 2014.10.24 |
조원 - 담쟁이넝쿨 (0) | 2014.10.24 |
'다이빙벨' 영화 기사 (0) | 2014.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