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잘 선 칼은 부드럽다
이 빠지고 무디어진 칼 대신
새로 사 온 식칼은
도마 위의 김치 폭을 쓰다듬듯
부드럽게 썰어내었다
살짝만 눌러도 소리 하나 없이
무나 당근, 고깃덩어리가 뭉텅 잘린다
이 칼에 가슴 한 구석을 베인다 해도
아픔을 못 느끼고 웃을 것 같다
예리하게 파고드는 칼날에
핏물도 신음도
새어 나올 틈이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압력이
더하고 빼어지는 것을 어림하면서
손목이 구부러지는 각도를 치밀하게 가늠하면서
원하는 재료를 빈틈없이 파고들어
썰어내는 칼
그리하여 어느 새 칼날에 마음이 서려
사람의 가슴도 상처 하나 없이
부드럽게 베어주는 칼,
그렇게 사랑하는 칼
- 《다시올문학》 2013년 봄호
출처 : 시빛
글쓴이 : 황연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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