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 詩.....♡/떠 오 르 는 詩

[스크랩] 부드러운 칼 / 황연진

moon향 2014. 3. 4. 09:31

 

날이 잘 선 칼은 부드럽다

이 빠지고 무디어진 칼 대신

새로 사 온 식칼은

도마 위의 김치 폭을 쓰다듬듯

부드럽게 썰어내었다

 

살짝만 눌러도 소리 하나 없이

무나 당근, 고깃덩어리가 뭉텅 잘린다

 

이 칼에 가슴 한 구석을 베인다 해도

아픔을 못 느끼고 웃을 것 같다

예리하게 파고드는 칼날에

핏물도 신음도

새어 나올 틈이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압력이

더하고 빼어지는 것을 어림하면서

손목이 구부러지는 각도를 치밀하게 가늠하면서

원하는 재료를 빈틈없이 파고들어

썰어내는 칼

 

그리하여 어느 새 칼날에 마음이 서려

사람의 가슴도 상처 하나 없이

부드럽게 베어주는 칼,

그렇게 사랑하는 칼

 

 

 

 

- 《다시올문학》 2013년 봄호

 

 

 

 

 

 

출처 : 시빛
글쓴이 : 황연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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