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초심 닦기 (3) / 위선환
ㅇ 현대에 접어들어 문체(스타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희박해지고 있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글씨(개성적인 인격)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과 부합해 있는 것 같다. 문체라는 관념은 역사적으로 인격에 대한 인식과 함께 소장(消長)을 거듭해온 것 같다. 고대에 있어서는 글씨는 비인격적인 것이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개성적인 성격의 가치가 평가되기 시작했다 한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다시 글씨에 대한 이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활자가 의사전달의 민첩한 도구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우리들 둘레의 시(글)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주로 의미(시니피에)만이 다루어지고 표현(시니피앙)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자취를 감추고 있는 사실도 조급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 허만하. '정진규의 시적사유'(정진규 시집 '본색'에 붙인 발문) 중에서
ㅇ 제가 결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작품이 훌륭하고 그렇지 않고의 문제는 상상력의 문제이지 체험과는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물론 작품이 체험과 전혀 무관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체험을 소재로, 또는 체험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쓸 수도 있지요. 다만 작품이 좋고 나쁘고를 가릴 때는 체험이 아니라 체험에서 비롯된 시인의 상상력이 얼마나 깊고 광할하느냐 하는 것이 결정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상상력의 깊고 광할함이라는 것은 가장 원형적이고 원초적인 깊이에서 우러나와야 하니까, 결국 훌륭한 시라는 것은 원형적 상상력의 창조적 변형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문단에서 요즘 젊은 사람들의 시를 보면, 상상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그저 개인의 사변적인 체험이나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일상의 에피소드나 신문가십 같은 이야기를 그냥 재치 있게 묘사하는 정도죠. 저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깊이 있는 작품을 본다거나 훌륭한 시를 본 적이 거의 없어요. 물론 그렇게 되는 이유 가운데 평론가들의 책임도 크다고 봅니다.
- 오세영,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4년 7,8월호 '대담'에서
ㅇ 목마름 속에서 시인이 호명하는 대상이 선명하면 할수록 시는 이해하기 쉬어진다. 연시, 또는 연애시가 그렇다. 호명하는 대상이 전혀 낯선 존재(혹은 세계)일 때 시는 어려워진다. 낯선 상황 앞에서 다리가 꼬일 때처럼, 시어는 허공을 맴돌고 이미지는 미지의 세계로 빠져든다. 깨달음을 노래한 선시들이 그렇다.
그러나 연시와 선시는 극단의 시들이다. 대부분의 시들이 이 극단 사이의 공간을 떠돌면서 부유한다.
- 이홍섭, [시로 여는 세상]2002년 겨울호 "목마름과 폭식' 중에서
ㅇ 요즘의 시를 보면 자기의 독보적인 세계를 위해 달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두 가지 부류가 있겠는데요. 그만그만한 서정성을 담아가지고 아슬한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시들이 있습니다. 이런 시들이 상도 많이 받고 작품성도 수준 이하로 크게 떨어지지는 않지요. 그러나 자신이 아니어도 이미 그런 시는 많고 또 쓰여질 수 있는 것들뿐이어서 새로운 세계는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안이한 시쓰기라는 것이지요. 또 한 부류는 모호한 자기만의 언어에 빠져서 남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만 자패적으로 뱉어내는 시들이 있습니다. 그것 또한 읽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시를 쓰는 사람과 자기 안에 빠져서 혼자만의 암호 같은 시를 쓰는 사람, 두 부류의 시인들 밖에 안 보입니다. 자기 세계에서 스승을 뛰어넘는 독보적인 세계를 위해 달려가는 시인들이 없는 것 같아요.
- 배용제, [현대시]2004년 8월호 '이달의 시인' 대담 중에서
ㅇ 우리 시사는 서양근세사가 4,5세기를 실험했던 것을 단기간에 실험하고 폐기했어요 그래서 어떤 일정한 경향이 진득하게 전개되는 것을 바라볼만한 인내력을 잃어버리고 , 어떤 한 시인이 꾸준히 자기 음색을 지켜가는 것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지 않고 또 변모되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좀 찬찬하게 한 시인의 변모보다는 지속성에 관심을 가져주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 유성호, 2004..4. 24, [포항문학] 좌담 중에서
ㅇ .....한 가지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언젠가 이성복 시인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우리나라 시인들은 평생 삼아야 할 화두가 없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요. 유럽쪽 문인들을 보면 평생에 걸쳐 초지일관 하나의 주제를 놓고 치열하게 탐구해 나가는데 비해 우리나라 시인들은 그런 의식이 부족하단 말씀이에요. 우리 시에 사상성이 부족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 장옥관, 2004. 4. 24,[포항문학] 좌담 중에서
ㅇ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은 바로 인간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예술적 양식이라는 것이다. 세계와 '재현' 사이에 놓인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만들어내는 최고의 미학적 가치가 바로 '반성'이다.
'반성'에 선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마도 주체가 자신의 내부에 집중할 수 있는 강렬도일 것이다. 치열한 자기 내부와의 싸움과 이 싸움에 집중할 수 있는 내적 사유의 힘, 시가 가질 수 있는 비상한 존재론적 깊이는 바로 여기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의 시나 소설 모두 이러한 내적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거나 혹은 사라지고 있다. 의미 없는 수다나 어지러운 환상적 장치들이 난무하는 시대다. 형식은 더 이상의 상상력이 필요 있을까 할 정도의 화려함으로 피어나고 있지만, 정작 그 안은 빈 울림만이 가득하다.
- 정경운, [문예연구]2004. 여름호 '서정적 주체의 자기 반성력' 중에서
◎ 이름:객
◎ 2004/8/13(금) 01:33 (MSIE6.0) 210.123.137.154 1024x768
남의 글 좀 좋게 평하면 안되남?...
자신의 글은 엉망이면서 캐캐묵은 과거 이론으로 남의 글 깍아 내리는 사람들 많다..정말로 많다..
문학아카데미 강의에서 있었던 내용을 조금 소개한다. 요즘 사이버상에 존재하는 여러 평을 예로 들면서 현대시의 흐름에 대해 초청 강사(유명시인)는 우려 섞인 심정을 토로 했다..
우선, 평자나 독자는 글쓴이의 의도를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요즘 독자는 평론가 이상의 안목을 가진 경우가 많음에도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고, 평론가는 과거의, 출처가 불분명한 특정이론이나 말을 끌어와서 합리화 시킨후에 어느 한쪽으로 글쓴이를 난도질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럴경우 최소한 그 출처를 아래에 밝혀 두어야 함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소설가가 말한것을 시에 끌어 붙이는가 하면 시인이 말한 것을 소설에 끌어붙이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했다.. 분명 시와 소설은 다른 장르임에도(전혀 연관성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잘모르는 독자들로 하여금 오해를 하도록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또한 요즘 현대시는 구조나 소재 등등 많은 부분에서 미래지향적으로 패기 발랄한 다양한 실험적 시도가 행해지고 있음에도 과거 이론으로 잣대를 긋는다는 것은 과거회귀주의적 발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시에 있어서 구조란 그릇 또는 솥이나 다름없으며 그러한 그릇은 둥근것도 있고 네모난 것도 있고, 찌그러진 것도 있다. 색깔도 다양하며, 재료 또한 무쇠로부터 양은, 현대의 스탠까지 다양함에도 어느 한 정형적인 틀만을 중심으로 잘품을 해부하고 해석하는 것은시의 발전 가능성을 막는 행위라고 했다. 시의 형식(구조)는 자유로워야 함에도 소설의 경우처럼 틀을 중심으로 평을 하거나 인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층 자유로워진 장시가 주목받는다고도 했다. 구조를 중시하는 자들은 산문시나 장시를 경시하는데 그것은 어느 나라 이론인지 도통 이해가 안간다고도 했다.
다음 소재 측면이다. 시라는 그릇에 담는 소재에 생명이 있건 없건, 더럽고 깨끗함이란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생명이 없는 돌이나 썩은 가지..등등을 가지고 가마솥에 펄펄 끓여서 수증기에 향수를 담아내고 남다른 시선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될수 있고 그것을 보는 시인의 시선에 따라 글속에서 소재가 살고 죽는 것이지 겉으로 생명이 있고 없고를 가지고 단정적으로죽은 소재라느니, 살아있는 소재라느니 하고 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 측면에서 시를 감상하면 될것이지 남의 글에 대해 잘잘못을 떠나 평한 답시고 비난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은 글쓴이를 죽이는 것을 떠나 문학을 죽이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런 평을 하는 사람, 당신 글은 어떤지 스스로 평해 보라고 질문을 던졌다.
- 퍼온 글
ㅇ 최근에 발표된 시들을 한 번 보세요. 가령 100페이지나 되는 시집에 70편의 시가 들어 있다면 형태가 다 똑같지 않나요? 예를 들면 연 구분 없이 쓰는 시가 유행인데 시집 한 권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그런 거야. 그걸 질려서 어떻게 읽어요? 이건 찍어내는 거죠. 나는 개인적으로 형태가 오지 않으면 시를 못 써요. 그런 면에서 형태나 형식이 중요하다고 보는 거지.
나는 40년 동안을 시를 써 왔지만 형태가 변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초기에, 고등학교 때는 연 구분이 있는 시를 썼어요. 그런데 70년대 들어와서는 이게 지루하더라구. 형태가 지루하니까 새롭게 산문시를 썼지. 그래서 두 번째 시집에는 산문시들이 많아요. 그 후 80년대에 들어서서 또 형태가 바뀌는데, 단련 형태로요. 낱말 하나가 시행 하나가 되는, 길쭉한 형태의 시가 바로 그거지. 그런데 또 지친거야. 그래서 90년대에는 산문시 변형을 시도했지요. 산문시는 들여쓴 다음에 계속 이어 붙이는 형태이지만, 그러지 않고 옆으로 툭 쳐버리는 것, 4각형 형태가 나와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낸 시집에서는 그 사각형마저 깨버렸어요. 자유로운 산문시로 간거지. 끝도 시작도 없는 글쓰기, 그런데 최근에는 형태에 대한 불안이 또 오는 거야.
- 이승훈.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4년 9-10월호 '대담'에서
ㅇ 시인이 대량으로 쏟아지고 있는 요즘에는 난해해지거나 어불성설이 되고 마는 시들이 많다. 그것들은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이 의미있는 것이 되자면 난해할지언정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의 보편성의 어느 언저리에라도 닿아 있어야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기존 우리 시의 보편성의 테두리를 넓혀 주는 구실을 하게 된다. 시는 보편성이 희박하고 지나치게 특수성에만 치우치면 난해해지고 논리의 비약을 일으키며 아포리즘적인 문장 형식 속에 얼버무리는 폐단을 낳게 한다.
- 도광의, [생각과 느낌]2004년 가을호에서
'시는 언어예술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명제는 의외에도 뿌리가 깊다. 표현수단이나 매체로서의 언어는 떨쳐 버릴 수 없으나, 사물의 인식에서는 일단 언어를 개입시키지 말고 '직관' 해야 한다. 언어 너머에 있는 사물, 온갖 언어에 가려져 있는 사물에서 그 언어를 다 떨쳐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는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선다'는 명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니힐이즘을 바닥에 깔고 있는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로 '시는 언어예술이다'라는 스로건을 휘두른다. 지금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 깔려 있는 니힐을 초극해야 한다.
생명이나 사물의 현장을 박탈한 TV나 PC의 사이버 그림자가 도리어 리얼리티를 대신하는 언어, 자연에 대한 오염과 파괴를 일삼는 개발과 발전이라는 언어,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가 분단의 아픔과 더불어 위협받고 있는 폭력적인 내셔널리즘의 언어, 온갖 중상모략의 허위 언어, 이데올로기의 선전.선동의 정치 언어, 비방과 욕설로 넘치는 인터넷의 변종 언어, 개념화하고 계층화하고 추상화하고 차별화하여 진상을 은폐하는 문화적. 사회적 언어, 그리고 사물을 직관화하지 않고 사유나 사고나 무의미나 言弄. 語戱를앞세우는 시의 언어 - 지금은 이러한 무잡한 언어들 너머에 있는, 또 그러한 언어 이전의 사물, 진실, 眞如의 세계를 직접 직관하고 체험하고 인식해야 할 때이다.
- 문덕수 <시론> 언어 너머의 사물(축약)
그런데 시인이나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써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정신의 완전한 자유다.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강제에도 얽매이는 일이 없이, 또 사상사 속의 어떤 유파나 개인에게도 편승하는 일이 없이, 먼저 하늘만큼 훤출한 자기자유의 능동적인 관찰력과 자기류의 독자적인 느낌을 가지고 사상의 선택과 그 수립을 전달하라는 것이다.
- 문학을 공부하는 젊은 친구들에게(발췌)/서정주
◎ 이름:진대영
◎ 2004/12/25(토) 09:42 (MSIE6.0) 220.87.214.93 1024x768
? + ! = 지혜
┼ 심시미 : 현대가 산문시대? ┼
│ 소설 창작론을 읽다보니까 "현대가 산문시대" 라는 말이 나옵니다.
│ 현대가 산문시대라서 소설이 인기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맞는 것입니까?
│그래서 시들이 산문조로 쓰여지고 그러는 것입니까?
│ "현대는 산문시대"라는 이 말이 맞는지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산문'이란 말의 산 자는 '흩어지다'라는 뜻의 한자입니다. 그리고 '운문'이란 말의 운 자는 운치 할 때의 운 자인데, 즉 품격이나 멋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글자인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흩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며, 개인의 축적이 그 목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발전할수록 전문화의 성질을 가집니다.
전문화는 자본주의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효과적입니다만, 동시에 영역을 잘게 구분지어 서로 간의 소통을 차단하는 역효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는 구분성이나 분절성과는 거리가 먼 성질의 것인 것 같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도 자본주의 속에서 부대끼며 살다보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그 속성이 정신에 배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따라서 알게 모르게 흩어지는 성질이 길들여 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게 쪼개는 방식은 흩어지는 방식이며, 이것은 현상을 이해하는데 효과적입니다만, 잘게 구분지어 놓았다고 해서, 현상이 잘게 구분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몸에 정신에 밴 절단성을 부드럽게 이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시의 성질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가 산문적인 성향을 많이 띠는 것도 사회적인 바탕 때문일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산문적이다 또는 운문적이다 하는 것은 시를 쓰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에 대한 철학적(추상적) ?와 삶에 대한 현실적(구체적) !의 결합을 언어를 통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써야만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글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 라고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철학적 물음에 대한 감탄사는 나뉘어진 것들이 이어져 갈 때 터져나오며, 이것은 지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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