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감성과 예지의 시인
유안진 , 글 김광한
어쩌다가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여행 가이드가 따라 붙는다. 가이드는 초행길의 관광객들에게 현지의 풍경과 풍경에 대한 역사, 그리고 그곳의 인물들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듣고서야 관광객들은 고개를 주억거린다.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될 경우, 친근한 사람으로부터 그 낯선 사람을 친근하게 대하기 위한 약간의 설명을 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사귐에 있어 걸림돌이 된다. 소개장도 그렇다. 한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과 친근한 교제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사람을 알려주기 위한 소개장이 필요한 것이다.
문학작품의 경우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그 문학작품이 일반 독자들에게 생소하고 난해한 것이라면 더욱 그 작가에 대한 작품평이나 작가 개인의 신상에 대해 알아두어야할 점을 숙지해야만 한다.외국인명이나 현학적인 수사가 많이 들어갔을 경우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필요로한다. 그래서 그 작품을 해석하는 해설자가 필여하다. 마치 무성영화시대에 변사처럼 , 그래서 그 작품보다 해설이 더 잘됐다는 소리,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그래서 여행 안내자나 문학작품을 알기 쉽게 해설하는 평석자(評釋者)들은 나름대로의 선별된 지식과 문장의 기교로서 독자들에게 접근을 한다.마치 성경을 해석하고 해석한 것을 설교로 이어져 그 설교를 다른 목회자보다 더 재미있고 알기쉽게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이라 하겠다.
그런데 해설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작품과 그 작품을 쓴 사람이 있다. 유안진 시인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한국인으로서 문학에 관심이 있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ㅇ안진 시인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시는 많이 알려져있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그는 많은 관심을 끌고 잇다. 그것은 그의 시가 고급스럽고 시어하나하나에 연꽃같은 향기가 나고 그 향기에 취한 독자들이 그이 시와 함께 유안진 시인을 금방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인명은 백과 사전에 이렇게 적혀있다.
이름 : 유안진
출생 : 1941년 10월 1일
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
직업 : 시인,대학교수
학력 : 호수돈여자고등학교
취미 : 남편, 슬하 2남 1녀
경력 :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 교수
수상 : 2000년 제35회 월탄문학상 (시집-봄비 한 주머니)
1998년 제10회 정지용문학상 (시-세한도 가는 길)
그리고 그가 오래전에 쓰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만든 시, 그것이 바로 "지란지교를 꿈꾸며"이다. 그 전문을 소개한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열어 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자 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히 없을 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 이여도 좋고 남성 이여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그는 반드시 잘생길 필요도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 쳐주고 나서,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했다. 그럼에도 지금을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 두곳, 한 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두고두고 되새길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나는 도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라서 탄로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싶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눈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이,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 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보다 품위 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안겨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비웃지 않을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고 해도 그의 숙녀 됨이나 그의 신사다움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 이 돋아 피어,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좀더 길게 쓴 그의 약력은 이렇다.
1941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대전여자중학교, 대전호수돈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마산제일여자중·고등학교와 대전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1970년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하였고, 1976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신여자대학교·단국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가르치다가 1981년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아동가족학과 교수가 되었다.
1965∼1967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달〉 〈별〉 〈위로〉가 3회 추천되어 등단하였고, 1970년 첫 시집 《달하》를 출판하였다.
이향아·신달자와 함께 펴낸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1986)에 실린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기도 하였으며,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주로 발표하였다. 1996년 펜문학상, 1998년 제10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 시집 《절망시편》(1973), 《물로 바람으로》(1976), 《날개옷》(1978), 《달빛에 젖은 가락》(1985), 《영원한 느낌표》(1987),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1993), 《누이》(1997)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1985), 《그리운 말 한마디》(1987), 장편소설로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1990), 《땡삐》(1993), 아동교육 전공서적으로 《한국전통 아동심리요법》(1985), 《한국전통의 육아방식》(1988), 《한국전통사회의 유아교육》(1991) 등이 있다.
유안진 시인이 쓴 시 가운데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감흥과 인상을 준 시들은 아래와 같다.시어가 어렵지 않아서 금방 가슴에 와닿고 외울 수 있는 시들이다.굳이 시의 해설이 필요하지 않은 시들,그러나 읽기가 어렵지 않다고 해서 쓰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쉽고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정신적인 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앙에서 오는 절대적인 믿음과 사람을 사랑하는 짙은 마음이 근저에 자리잡고 잇지 않으면 결코 이런 시를 쓸 수가 없는 것이다.김소월의 시가 쉽다고 모방을 하지만 그것은 김소월의 시, 그분이 쓴 시로 나지 결코 모방을 하거나 흉내를 내지 못핟듯이 유안진 시인의 시는 언제나 그분만이 쓰고 그분의 영혼이 배어있는 시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유안진 시인의 영혼이 깊숙하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사리(舍利)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우면
그 이름만 남을거야
온몸에 옹이 맺힌
그대 이름만
차마
소리쳐 못 불렀고
또 못 삭여낸
조개살에 깊이 박힌
흑진주처럼
아아 고승(高僧)의
사리(舍利)처럼 남을거야
내 죽은 다음에는.
*가을 편지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겨울을 기다리며
겨울이 오면
나는
바람이 될 거야
더는 못 참는 침묵에서
더는 못 감출 이름을
마음껏 소리쳐 불러보는 목소리가
밤낮 주야 가리지 않고
천지사방 거침없이
목놓아 외쳐대는 북풍의 목청이
부르고 싶은 이름 하나에
미쳐버린 겨울바람
그 목소리 될 거야, 되고 말 거야.
꽃 지는 날에
열매 맺기 위해서
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꿈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낙엽 쌓인 길에서
한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또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눈물
그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뼈가 녹아 물이 되고
살이 녹아 물이 되고
살아가는 길
긴 여과의 과정에서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울부짖는
날이 날마다
사랑도
시도
그리고 학문도
배신을 일삼는
수치와 약점일 뿐
녹아도 녹아도
녹지 않는 뼈와 살
오직 그 하나
나의 참뜻은
마지막 그날에
생애를 걸러서
우러나는 한 방울
신이 정녕 계실진대
무심한 하나님
그로 하여 나는
*눈사람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이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하나 지어 눈맞춤 하리라
*들국화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랏빛 연보라
천상의 웃음 띄우고
마중나오신 성녀
*멀리 있기
멀리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리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서리꽃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꽃
내 이름을 어쩔래
*실패할 수 있는 용기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로
무수히 불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아침 기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 수 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無策)이 상책(上策)인 세상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가며
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어 있어
늘 미안한 자격미달자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약속의 별
Ⅰ
몹시 외롭고 쓸쓸해지는 때는
걸어온 옛길로나 돌아가게 되나봅니다
못내 초라하고 서글퍼지는 때에도
보물찾기하듯
그 길섶을 뒤적이게 되나봅니다
긴긴 겨울밤 얼어붙은 깜깜 하늘에는
왠지 낯익은 듯
눈물 머금은 별 하나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다가
까맣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약속 하나, 언약 하나, 맹세 하나를
Ⅱ
내 어려서 철없던 꼬맹이적에
심심해서 별이나 헤아리며
혼자 놀던 어느 밤에
문득 아름다운 별 하나에 넋이 빠져
단박에 나의 별로 점찍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별
이담에 나도 너처럼 빛날 거야」
턱을 괸 두 손 풀고 발딱 일어서며
나 혼자 중얼거려 약속했습니다
그 별도 기뻐서
더 크게 더 밝게 빛났습니다
그 이름은 놀림말로 개밥바라기라고 하지만
초저녁엔 금성이고 장경성(長慶星)이고 태백성(太百星)이며
새벽녘엔 샛별이고 명성(名星)이고 계명성(啓明星)이라 부르는 줄은
한참 뒤에 가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애들한테 따돌림받고
슬퍼지는 외토릴 때
손등으로 눈물 닦다가도
고개 들면 웃어주는 별
「힘을 내!
하마 잊었니 우리의 약속을?」
그때 이레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밤중에 잠이 깨어도 문 열고 내다보며
눈맞춤도 눈흘김도 눈쌈도 하였고
신새벽 뒷간 가는
나를 불러 세워놓고
짓궂게 놀려대어도 나는 행복했습니다
Ⅲ
꿈이 너무 많고
너무도 화려하여
눈물도 웃음도 변덕스럽던 여학생때는
단짝 친구랑 나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영원한 우정을
기막힌 야망을
여름밤 하늘의 별 하나를 정해놓고
손가락을 걸어서 우린 언약했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아득한 훗날 그 어디에서라도
우리의 우정은 언약의 별같이
밝고도 찬란할 것이라고
언약의 별 같은 인물이 되자고
새끼손가락을 세 번 잡아당겼습니다
Ⅳ
애인이라고는
차마 부르지 못했지만
난생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여
숫되고 서툴던 내 처녀적에
별 하나에 사랑을 맹세해 주던 이여
별 하나에 포부를 다짐해 뵈던 이여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몰라도
지금의 하늘에는
맹세의 그 별이
그날처럼 밝고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사는 일이 피곤할 때
더러더러 생각날까요
뜨거운 그 호소 그 맹세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까요
Ⅴ
덧없고 부질없어라
우정과 사랑이면 더욱 그러하여라
세월이 지나간 휑하니 빈 자리에는
그 약속, 그 언약, 그 맹세 모두
어처구니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달픈 퇴근길에 헛발을 디디다가
잠 안 오는 밤중에 안경알을 닦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약속의 별 하나
아이적 내 별이여, 우정의 우리 별이여
영원을 맹세하던 첫사랑의 별이여
어느 한 가지의 약속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살아온 오늘은
그저 할말이 없습니다
오직 미안할 뿐입니다
아이처럼 다리 뻗쳐 마구 울고 싶습니다.
*작정
모르며 살기로 했다.
시린 눈빛 하나로
흘러만 가는 가을 강처럼
사랑은 무엇이며
삶은
왜 사는 건지
물어서 얻은 해답이
무슨 쓸모 있었던가
모를 줄도 알며 사는
어리석음이여
기막힌 평안함이여
가을하늘빛 같은
시린 눈빛 하나로
무작정 무작정 살기로 했다.
* 조각달
사랑이 떠난 후에
알게 모르게 허물어진 몸
허공에 떠도는 줄
혹시 알리 또 모르리만
이 길이 내 길이리라 여겨
홀로 기웃대었다
그대 뉘 지아비 되고
나 또한 지어미 되니
운명이 꾸미는 장난에
맹물 같은 웃음뿐
가벼이 반공중에서
사라지고 말아라
무궁한 세월이 흘러
저승길 더듬을 제
그 누가 문책하면
품안에서 꺼내 뵈리
네 가슴 노리던 비수
*키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봄비 한 주머니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뿐이라서―.
*황홀한 거짓말
<사랑합니다>
너무도 때묻힌 이 한마디 밖에는
다른 말이 없는 가난에 웁니다.
처음보다 더 처음인 순정과 진실을
이 거짓말에 담을 수 밖에 없다니요.
겨울 한밤 귀뚜라미 거미줄 울음으로
여름밤 소쩍새 숨넘어가는 울음으로
<사랑합니다>
샘물은 퍼낼수록 새물이 되듯이
처음보다 더 앞선 서툴고 낯선 말
<사랑합니다>
목젖에 걸린 이 참말을
황홀한 거짓말로 불러내어 주세요.
*간고등어 한 손
유안진
아무리 신선한 어물전이라도
한물간 비린내가 먼저 마중 나온다
한물간 생은 서로를 느껴 알지
죽은 자의 세상도 물간 비린내는 풍기게 마련
한마리씩 줄 지은 꽁치 곁에 짝지어 누운 간고등어
껴안고 껴안긴 채 아무렇지도 않다
오랜 세월을 서로가 이별을 염려해온 듯
쩔어든 불안이 배어 올라가 푸르러야 할 등줄기까지 뇌오랗다
변색될수록 맛들여져 간간 짭조롬 제 맛 난다니
함께한 세월이 길수록 풋내 나던 비린 생은
서로를 길들여 한가지로 맛나는가
안동 간고등어요
안동은 가본 적 없어도 편안 안(安)자에 끌리는지
때로는 변색도 희망도 되는지
등푸른 시절부터 서로에게 맞추다가 뇌오랗게 변색되면
둘이서도 둘인 줄 모르는
한 손으로 팔리는 간고등어 한쌍을 골라든
은발 내외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반백의 주부들.
간고등어란 소금에 절인 간이 배인 고등어를 말한다. 생선이 귀한 시절에 자반고등어를 맛본다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자반 고등어 한드럼을 꿰어차고 들어오는 가장, 그 당시의 아버지들은 가족의 우상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한물이 간 고등어를 말하는 것같다.장옥관 시인의 설명이 압권이다.
간고등어 ‘간’자가 물‘간’ 고등어의 ‘간’자라고? 믿거나말거나 내 알바 아니지만, 물간 고등어 “한물간 비린내”가 “간간 짭조롬 제 맛”을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한 사실. 세계 2위 이혼율의 한국의 젊은 부부여, “풋내 나던 비린 생은”은 너무 위험해. 퍼들퍼들 살아 소리치는 퍼런 배추도 왕소금 맞고 풀죽어야 김치가 될 수 있을 터. “등푸른 시절”부터 서로에게 맞추는 동안 “뇌오랗게”(‘노랗게’가 아니다!) 쩔어든 속내평이 “간간 짭조롬 제 맛”을 낼 수 있다고. “함께한 세월이” 길면 길수록 삶은 깊은 맛 낼 수 있다고. 그래서 고등어는 한 마리씩 파는 것이 아니라 한 손으로 파는구나. 고등어 한 손 사들고 나란히 걸어가는 저 은발 내외의 뒷모습, “편안 안(安)자”에 들었구나.
한국인의 정서와 그 정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시인, 청소년에서부터 노인층에까지 그의 시 한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시를 쓴 유안진 시인,이제 그의 나이도 노년에 접어들고 있다. 우리가 이런 여류시인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여간 자랑스런 일이아니다.규격화,상업화에 물든 우리의 문화속에 한국인의 의식과 정서를 알려주는 시인, 유안진 시인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이름을 아는 그 자신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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