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리 고....♡/문 화 계 소 식

이성복 - 어둠 속의 시, 고백의 형식들

moon향 2014. 9. 16. 15:06

 

이성복(62) 시인은 1980년대 국내 시단의 '아이돌'로 통한다.

과감한 시적 문법의 파괴, 세련된 언어 조탁, 모던한 시풍 등 개성 넘치는 시 세계를 펼쳐보이며

황지우 시인 등과 함께 80년대 '시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40년 가까이 시인으로서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가 돌연 방향을 틀어 '출발점'으로 돌아가 청춘의 날에 쓴 시들을 불러냈다.  

1970~80년대 미발표 시를 묶은 시집 '어둠 속의 시'와 산문집 '고백의 형식들', 대담집 '끝나지 않은 대화'가 열화당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특히 시집 '어둠 속의 시'의 발간은 그의 시를 기다리던 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이번 시집은 무엇보다 시인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30여 년 전 쓴 시들을 정리하면서 그는 치열하게 시를 썼던 자신을 '발견'했다.  

'어둠 속의 시'에는 1976년에서 1985년 사이에 쓴 미간행 시 150편이 담겨 있다.

날 선 언어로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토해냈던 젊은 시절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시어가 펄펄 살아 날뛴다.  

"먹히고 입히고 가르쳤더니 기껏, 빌어먹을……어머니한테는 말이 안통한다/아무리 내가 어리석고 나의 시대가 어리석어도 할 말은 있다

카프카, 내 말 좀/들어봐 너처럼 누이들을 사랑한 사람은 없을 거다 누이들은 실험용 몰모트다"(시 '병장 천재영과 그의 시대 둘' 중)

 

 

 

예순을 훌쩍 넘긴 시인은 시집 제목처럼 어둠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젊은 날의 시를 왜 세상 앞에 꺼내놓은 걸까. 

경기도 파주출판도시 열화당 사옥에서 16일 기자들과 만난 시인은 자신의 최고 황금기로 1979년을 꼽았다.

시인은 1980년 파격적인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펴내며 문단에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1979년 모든 것을 다했다는 느낌"이라면서 첫 시집에 못 실린 시들을 이번에 새로 묶어 펴냈다고 소개했다.

시인은 이 시들을 "첫 시집의 지하실"에서 건져 올렸다.

"첫 시집은 굉장히 격렬하고 불안하고 기본 조류가 사회의식 그런 것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시의 방향을 잡아주신 분은 김현 선생이셨습니다.

선생이 제가 쓴 시 가운데 몇 편 뽑아주셨는데 제게는 그것이 앞으로 이렇게 시를 쓰라는 방향 지시였습니다.

그때 선생이 제시한 방향이 아닌 시들은 첫 시집에서 다 빠졌는데 성적인 것, 연애, 사랑 이야기가 많습니다.

첫 시집이 그해 10월에 나왔는데 그 당시 광주에 5·18(민주화 운동)이 있었고

9월에 검열받으러 시청에 갔는데 (검열에서) 잘린 부분이 접혀 나왔는데 상당 부분이 (시집에서) 빠졌습니다."

1986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에 빠졌던 시들도 이번 시집에 담았다.

시인은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들은 1980~85년에 썼는데 그 무렵 서정적이고 짧고 민감한 쪽에 많이 끌렸다"면서

"당시 거칠고 격렬한 고통이 나오는 시들은 마음에 안 들어 다 뺐는데 이번에 복원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고백의 형식들'에는 1976년부터 올해까지 써내려간 산문 21편이 묶여 있다.

시, 일기, 희곡, 편지 등 다양한 형식을 넘나들며 쓴 단편소설 '천씨행장'(千氏行狀), '글쓰기의 비유들'

'마흔 즈음에'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등 삶의 길 위에서 건져 올린 시인의 사유와 고민을 빼곡히 담았다.  

'끝나지 않은 대화'에는 1983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매체에 실린 대담 16편을 담았다.

대담들은 주로 시인이 새 시집을 발표할 무렵 이뤄진 것으로 시인이 품고 있던 고민과 질문들이 어떻게 시로 형상화됐는지

그의 작품 세계와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에 반복되는 슬픔에 대해 "시인, 예술가라는 사람은 자꾸 억지로라도 눈을 뜨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내가 사는 삶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면서 "극복한다는 말도 나한테는 성립 안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비유를 바꿔치기함으로써 얼마나 삶이 달라 보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게 예술가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양소설, 성장소설을 보면 나이가 들면서 드디어 인생을 받아들이고 화해하고 그런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 인생관의 밑바닥에는 정점이 있는 산봉우리가 있고 거기 올라가면 모든 게 보인다는 비유가 있다"면서

"나는 그런 비유를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해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인은 우리의 인생이란 산봉우리에 올라가 원숙한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절벽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10대에도 절벽, 20대에도 절벽, 마지막에도 절벽이 있을 뿐 어디에도 완성은 없습니다.

예술가와 시인이 할 일은 산봉우리 비유를 다른 것으로 교차함으로 우리가 겪는 잉여 슬픔을 줄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날 간담회에는 이성복 시인을 인터뷰한 문인과 지인 등이 참석해 시인의 젊은 시절과 추억을 공유했다. 

 

박준상 숭실대 철학과 교수는 "참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확고한 개성 있는 시학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서

"시인으로서 선생이 갖고 있는 가장 고유한 점은

동서양의 담론을 단지 이론으로 받아들인게 아니라 몸의 차원에서 받아들여 글로 표현한다는 점"이라고 평했다.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의 김민영씨는 "'문학이란 문엇인가'라는 저의 어쭙지않는 질문에

선생님이 '문학은 삶을 받아내는 그릇이며 가장 낮은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김민정 시인은 "선생님은 버리는 것을 잘 못하시는데 선생님의 책장에서 첫 시집의 초고를 본 교정지를 하나도 안 버린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숨어있던 시들을 볼 기회였다"고 말했다.  

시인과 고등학교·대학 동창인 소설가 이인성 씨는 "고등학교 때 8절지 시험지를 여러 번 작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생각나면 시를 써서 제게 보여주면 그 중에 골라 학교 교지에 실었는데 이렇게 문학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다"고 추억했다.

대학 같은 과 후배인 문학평론가 정과리 연세대 교수는 "대학 시절 김현 선생을 함께 모시고 문학 활동을 했다"면서

"1978년 제대한 성복 형이 저에게 '나무 가지에 시체 걸린 것을 봤느냐'는 이상한 질문을 했는데 데뷔 시집에 그 말이 다 들어 있었다"면서

 "처음으로 시를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정 교수는 "선생이 새 시집을 낼 때마다 항상 다른 시를 보였는데 매번 또 시를 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저를 깜짝 놀라게 하는 성복 형의 마술은 앞으로도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다른 용무차 열화당에 들른 김기덕 영화감독은 "선생이 글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영화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런 점에서 동질감을 강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경북 상주 출신인 시인은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아, 입이 없는 것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등의 시집을 냈다.

 

 

(파주=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yunzhe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