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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李陸史)

moon향 2012. 7. 3. 11:43

이육사(李陸史)

 

호가 '육사(陸史)'이고 본명은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 개명은 '활(活)'이다.

경북 안동(安東)에서 출생하여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0년에 육사란 이름으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시단에 데뷔하였으며,

1933년 귀국,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및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황혼(黃昏)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 꿇어야 하나

한발 개켜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작년 8월 광복 66주년을 맞이하여

이육사 시인의 삶을 다룬 특집드라마 <절정>이 방영되었다.

이육사시인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17번이나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중국 북경에 있는 일본 영사관 소속 감방중에서 폐결핵을 앓고 있던 육사는

해방을 앞둔 한 해 전에 1944년 1월 16일에 마흔의 나이를 못채우고 사망하였다.

그의 본명은 이원록이고, 필명 이육사는 죄수번호인 264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그룹 신화의 김동완이 저항시인 이육사의 역을 맡았는데,

그의 생에 최고로 의미깊고 자랑스러운 일이었지 않나 싶다!^^

이제는 뮤지컬로도 제작된다고 하던데,

이육사의 이름이나 유명배우만으로 일회적인 흥행몰이가 아니라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어느 언론에서 이육사시인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와 인터뷰를 하였다.

 

 

 

 

출처 : 이육사 문학관(http://www.264.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