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여덟시
- 최금진
보내지 못하고 서랍에 넣어둔 물고기 편지들은 해저에 산다
단어들은 허옇게 배를 내놓고 죽어가겠지
모래를 사랑한 사람은 모래가 되고
내게 남겨놓은 너의 눈먼 개들은 짖지 않는다
조개껍질이 되어 바다 밑을 구르는 일처럼
혼자 밥을 먹는 일처럼, 한없이
존재로부터 멀어져가는 말의 여운,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저녁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마다
세계는 투명하게 지워져갔다
쓰러져 누운 코스모스꽃들을 너에게 돌려보내야 하는 시간
바다 밑에 지느러미가 없는 새들이 기어다니는 시간
비늘이 다 떨어진 바다뱀이 산호초 속에 추운 몸을 숨기는 시간
내가 건설했던 왕궁엔 온통 혼돈과 무질서뿐이고
내 품에 안겼을 때 네가 남긴 물고기들의 머리카락
머리카락을 입에 넣고 오래도록 맛을 본다
너는 나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된다
서랍 속에 넣어둔 편지들은 조류를 타고 흘러가 뭍에 가서 썩고
네가 묶어놓고 간 개들은 입과 다리가 없고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간다, 다만 매우 느리게 갈 뿐
나는 내가 없는 해저에 살고, 너는 유리병처럼 금이 간다
세계는 매우 단순해지고 달은 어두운 바다에 혼자 떠 있다
죽은 새끼를 끌어안고 우는 듀공처럼 나는
서랍 속에 들어가 눕는다
—《문학 • 선》2012년 봄호
최금진 /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제1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 시집 『새들의 역사』『황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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