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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축으로 만들어진 피아골의 논들은 한 그룻의 쌀밥을 꿈꿨던 이들의 소망을 웅변하는 집체예술인 것처럼 아름답고, 눈물겹고, 놀랍다. |
ⓒ 전라도닷컴 |
1894년의 농민봉기를 다룬 소설 『녹두장군』(창비)은 고창 선운사 마애불 ‘배꼽’에서 시작해 장흥 석대들판에 이르러 대미를 장식한다.
총 12권의 시작과 끝 사이에 소설은 전주 정읍 부안 장성 나주 구례 강진 해남 운주사 등 전라도 전지역을 촘촘한 빗으로 머리를 빗듯이 훑어 내리는데, 그 훑음이 길어 올리는 전라도 땅의 풍속과 인심이 푸짐하다. 『녹두장군』의 공간을 사발을 엎어 통문을 썼던 고부로, 또는 성을 점령해 조선왕조의 간담을 서늘케 한 전주 등 몇 군데 지역으로 한정지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녹두장군』은 또한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제기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질문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질문과 답을 내는 방식이 ‘삶의 상식’이라는 데서 『녹두장군』만의 독보적인 자리가 마련된다.
예컨대 전주성 점령 이후 조선정부와 휴전을 맺은 전주화약(6월11일)은 대체적으로 ‘농민이라는 계급적 처지의 한계로 인한 정세판단 오류’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나 『녹두장군』은 그 때가 ‘농번기’였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변수로 본다. ‘자식 죽는 것은 봐도 곡식 타는 것은 못 본다’는 농민들 아니겠는가.
농민군들은 전주화약을 통해 안전망을 확보한 다음 자신들의 삶터에서 가능한 집강소를 꾸려 가면서 조직의 힘을 확대시켰다. 이후 2차 봉기를 일으켰으니 그 때가 추수가 끝난 11월 하순. 농민들의 정서를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비전투’ 시의 조직 약화를 막아낸 최고의 전략이었다는 게 전주화약에 대한 『녹두장군』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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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바닥만큼이라도 땅을 더 넓히려고 석축을 직각으로 곧추 세운 피아골의 계단식 논. 땅에 대한 놀라운 집념과 애정을 보여주는 이 논에서 소설 『녹두장군』은 '봉기'의 이유를 끄집어 냈다. |
ⓒ 전라도닷컴 |
삶의 상식으로 해석한 역사적 사건
역사적 사실로서 농민군들의 활동 지역이 명시적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녹두장군』은 느닷없다고까지 생각되는 지리산과 피아골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까닭은 차마 말로 형용하기도 어려운 당대 민중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아이콘들을 거기서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리산)골짜기에는 예로부터 평지에서 볕바르게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다. 역모에 연루되어 멸족의 화를 당하게 생긴 사람, 민란에 가담하여 모가지가 위태로운 사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병란 때 마누라가 겁간을 당하여 얼굴 들고는 살 수 없게 생긴 사람, 남의 여편네나 친척 혹은 상전의 딸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한 사람, 환자나 빚에 살림이 거덜이 난 사람, 지겨운 종살이에서 제 세상을 찾아 퉁긴 노비 등등, 하여간 이런저런 일로 남의 눈을 크게 기어야 할 사람들이 밤봇짐을 싸 짊어지고 몰려들던 것인데, 이 산은 어머니처럼, 세속의 구지레한 온갖 허물을 가리지 않고 그런 사람을 골짜기 골짜기마다 너그럽게 싸안아 깊이깊이 감추어 주었다.>
삼정이 문란해지고, 관리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이조말엽 철종∼고정 연간 난세에는 ‘볕바르게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한층 더 많아 <쇠다리에 진드기 붙듯 손바닥만한 평지만 있어도 초막을 얽거나 움막을 쳐 지리산 안통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부연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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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막을 얽고 초막을 쳤다"는 소설의 묘사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 논이 뒤뜰이자 마당이고, 산자락이 담인 것처럼 땅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살아 가는 모습이다. |
ⓒ 전라도닷컴 |
작가 또한 피아골 계곡으로 찾아든 적이 있다. 광주항쟁 주모 혐의로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부서진 어깨’를 감싼 채 『녹두장군』을 쓰기 위해 피아골로 들어간 것이다. 벌통을 치며 2년여 기간 동안 작가는 동학이 번지고 농민들이 봉기했던 19∼20세기의 시대상을 연구했고, 『녹두장군』의 초안을 잡아나갔다.
“골골이 가득 찼다고 보면 돼. 논인데 감나무가 있다면 거기가 집터야. 가장 가까운 관청이 구례관아인데 70리길이야. 골짜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집들이 있었어. 관군들이 오면 더 높은 산으로 숨거나, 돌이라도 굴려 싸울 요량으로 그랬던 거야.”
민중들의 ‘삶’에 주목하는 작가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삶이 역사고 삶의 흔적이 그에게는 유물이다. 그래서 피아골 최고의 역사유물은 국보로 지정된 연곡사 부도가 아니라 층층이 산을 따라 오르내리는 계단식 논이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내가 직접 세어 봤는데 130개까지 논둑이 이어지는 곳이 있어. 피아골에 와서 연곡사만 둘러보고 간다면 그것은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야. 한 뼘이라도 땅을 더 만들라고 90도로 깎아서 논둑을 만들었다고. 그 마음을 생각해봐.”
‘흰 쌀밥 한 그릇’이 그 마음의 최종 기착지 아니었을까. 등 따숩고 배부르면 그것이 보국안민이고 제폭구민이지 않겠는가. 마치 지도의 등고선처럼 겹겹이 산자락을 두르고 있는 피아골의 논들이야말로 한 그릇의 밥을 얻기 위한 노고의 위대한 흔적이다. 『녹두장군』은 이 논들의 소망을 제5권 공중배미 편에서 상세하게 풀어놓았다.
민중의 소망을 읽어내는 소설
가파르게 계곡으로 내리지르는 비탈진 산자락에 논을 만들자니 돌로 석축을 쌓는 방법밖에 없었다. 대개 사람 키만 하거나 조금 낮은 석축은 산세에 따라 사람 키 두 배나 되는 것도 있다. 놀라운 점은 거의 대부분의 논두렁이 직각 90도로 곧추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약간 경사지게 돌을 쌓아야 안전할 터. 아랫배미 논을 조금이라도 덜 잡아먹어 땅을 한 뼘이라도 더 넓히려고 곧추세운 셈이다. 논배미는 생긴 모양에 따라 삿갓배미, 치마배미, 항아리배미 같은 별명이 붙는 데 어떤 논은 벼랑 끝에 석축을 쌓아 논둑이 곧 낭떠러지인 형국이니 ‘공중배미’란 이름은 여기서 생겨났다는 얘기다.
『녹두장군』이 피아골의 논들과 공중배미를 바라보는 시각은 ‘탄식’이다. 나그네에게는 감탄일 수도 있겠지만, 민중의 한과 소망을 읽어 내려는 작가에게 그 논들은 ‘눈물’이었던 것이다.
한달 보름 동안 돌과 흙을 천 번이 넘게 져 날라야 다섯 평짜리 논바닥 하나를 만들 수 있고, 벼랑 끝 30평 짜리 공중배미는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일을 했대도 2년은 실히 걸렸을 법하다는 ‘계산’을 마친 작가는 당대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로서 이 논들의 의미를 파헤친다. 농민봉기의 원인과 방향도 여기에서 밝혀진다. 작중 인물의 입을 빌어 『녹두장군』은 말한다.
<우리 농부들은 모두가 땅이 마누라나 자식같이 사랑스런 사람들이다. 땅에 미치고 환장한 사람들이지. 저 땅을 그렇게 고생해서 일구고 그렇게도 사랑하는 것은 농부들인데, 정작 그 땅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냐?…아까 그 공중배미는 30평이 될까말까 했으니, 그런 논배미가 7개라야 겨우 한 마지기다. 그런 땅을 오백 마지기 천 마지기 가진 놈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렇게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 땅에 대한 사랑은 날려보내 버리고 그들은 재화로서 흙덩어리만 가지고 있으니 이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농부들이 피땀 흘려 가꾼 곡식을 빼앗아 간다는 것말고도 그들은 이렇게 또 다른 죄를 짓고 있다.> <이놈의 세상을 뒤엎는 수밖에 없소.>
이들의 분노, 함성은 이미 100여년의 시간 속으로 잦아들었지만 피아골의 논들은 여전하다. 골짜기의 입구인 외곡에서 해발 650m 농평마을에 이르기까지 빈땅 하나 없이 논들이 가득 들어차 있고, 『녹두장군』에서 묘사한 이런 저런 ‘배미’들을 확인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용도는 많이 변했다. 녹차나무 밤나무 등의 경제수들이 하나둘씩 논을 점령해 들어가고 있는 형편이고, 여름에 보면 노는 논들도 많이 눈에 띤다. 김제만경 ‘외배미들’에서도 수지를 맞추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손바닥만한 피아골 논배미들이야 오죽할까.
작가는 말한다. “문헌이나 자료는 참고하는 것이고,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민중의 소망을 읽어내는 것”이라고. 피아골 논배미들은 그 소망을 웅변하는 집체예술인 것처럼 아름답고, 눈물겹고, 놀랍다.
송기숙은 동학농민전쟁 3대 접주인 이방언 장군의 활동지에서 지척인 전남 장흥군 용산면 포곡리에서 1935년에 태어났다. 할아버지에게 농민군들의 마지막 싸움이었던 장흥읍 ‘석대들 전투’이야기를 들으면서 “알 수 없는 흥분과 분노를 느꼈다”는 그는 동학농민전쟁 발생 100년만인 1994년에 『녹두장군』(전12권)을 탈고했다.
전남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는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으로 문단에 나왔으나 곧바로 소설로 방향을 바꿨다. 전남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소설을 써 온 그는 소설가나 교수보다는 사회운동가로 더 잘 알려져 있을 정도로 시대의 부조리에 지속적으로 맞서 왔다. 1978년 교육지표 사건으로 해직되었고, 1980년 광주항쟁 당시 시민수습위원회 활동을 했다. 항쟁뒤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이듬해 석방되었다.
이후 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를 차려 5·18광주민중항쟁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하였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창립 초대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5·18 연구소 창립 초대 소장, 총선연대 공동 의장 등이 사회운동과 관련된 작가의 굵직한 이력이다.
소설집으로는 『백의민족』 『도깨비 잔치』 『재수없는 금의환향』『개는 왜 짖는가』『테러리스트』 등을 냈고, 장편소설로는 『자랏골의 비가悲歌』 『암태도岩泰島』 『은내골 기행』 『오월의 미소』 등이 있다. 역사이야기 『이야기 동학농민전쟁』, 민담집 『보쌈』을 썼고, 산문집으로는 『녹두꽃이 떨어지면』(1985) 『교수와 죄수 사이』(1988)가 있다.
평론가 염무웅은 송기숙 문학의 뛰어난 점에 대해 “인간의 원초적인 심성에 대해 근본적인 낙관과 신뢰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 왔는가를 냉정한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
펌글입니다~~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