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 詩.....♡/동 시 ♬ 좋 아

채송화 - 이안

moon향 2016. 8. 6. 14:16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41932.html?_fr=mt3

 

 

 

 

 

채송화
 
의자가 아무리 많아도
채송화 앞에는 절대
의자를 갖다 놓지 말자

 

 
채송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발바닥에 오르는
전기를 기다릴 수 있게

 

 
지금 채송화에
하양 노랑 자줏빛
꽃 전구가 켜져 있다면

 

 
방금 전까지
채송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발바닥 전기를 찌릿찌릿
채송화에 주고 간
한 아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게

 

 
─ 동시집 <글자동물원>
 

 

 

 

 
 
‘올해의 꽃’으로 채송화를 선정한 건 무슨 특별한 작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몇 해 전 여름, 충주 시내를 걷다가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 소복하게 돋아난 채송화를 만났다. 벌써 대부분 빤짝빤짝 꽃을 피웠지만 개중에는 아직 참새 발가락만큼 어린것도 있어서 가까운 슈퍼에서 종이컵을 하나 얻어 몇 포기 옮겨 담았다. 문 앞 화단에 심어두고 풀을 쫓아주니 야금야금 자라나 이내 몇 송이 꽃을 피울 만큼이 되었다. 그 얼마 안 되는 꽃을 신기하고 귀하게 보면서도 정작 씨앗 받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겨우 얻은 기쁨을 제대로 간수 못하고 잃은 것이 뒤늦게 서러웠다. 그러나 이듬해 풀을 뽑다 보니 어린 채송화 몇 포기가 갸웃갸웃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채송화는 씨앗으로 번식하는데 한 꽃에 드는 씨앗이 많아 따로 거두지 않아도 저절로 대를 이어간단 걸 새삼 깨달았다. 풀만 적당히 쫓아주면 대가 끊기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으니 가꾸는 데 그리 애먹을 일이 없다.
 

 

채송화가 자라는 문 앞 화단 자리는 특별하다. 한 해 동안 눈여겨보고 싶은 꽃을 심어두고 들며 나며 눈을 맞추곤 한다. 몇 해 전엔 아주까리가 주인이었고, 지난해엔 해바라기가 주인이었다. 그 사이 어느 해엔 접시꽃이 주인인 적도 있었다. 자라는 것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궁리해 보고 놓아주고 하면서 한줄 한줄 시를 길러본다. 가령 창밖 화단에 일렬로 해바라기를 파종하고 해바라기 블라인드를 설치했다고 짐짓 너스레를 떨어보는 식이다. 넉 달에 걸쳐 천천히 위쪽으로 올라가며 펴지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해바라기 블라인드. 발치엔 채송화가 자랄 테니 여름이면 하양 노랑 자줏빛 레이스가 달린 블라인드가 완성되리라. 모가지를 거두지 않는다면 딱새 박새 오목눈이가 날아와 일용할 양식을 물어 나르고, 어느 날엔 희끗희끗 쳐지는 첫눈 블라인드와 만나기도 하겠지.

 

 
어떤 시는 해바라기 블라인드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온다. 해바라기를 파종하기 전부터, 그러니까 해바라기를 좀 심어보자고 생각한, 아주 여러 해 전부터.

 

 
‘채송화’는 더 먼 시간을 건너서 내게 도착했다. 채송화 꽃잎에서 나는 빛은 유별나서 ‘반짝’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어렸을 적 뒷간이나 외양간 여물통 위쯤에 내걸렸던 오 촉 전구에도 채송화의 하양 노랑 자줏빛이 칠해져 있었다. 채송화에선 퀴퀴한 뒷간 냄새가 나고, 물컹한 소똥 냄새가 나고, 우적우적 씹어대는 암소의 여물 냄새가 나고, 아버지 어머니의 몸에 전 땀 냄새가 나고, 콧물에 절어 반들반들 광이 나던 어렸을 적 소매 냄새가 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추방당한 시간과 공간의 냄새.

 

 
이지(李贄, 1527~1602)는 견문(見聞)이 들어와 사람을 주재하게 되면서 타고난 본바탕인 동심이 사라진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여덟 살, 제도교육에 내던져진 순간부터 나는 동심의 세계에서 추방당했다.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모어가 아닌 표준어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방인임을 감추려고 아등바등 장만해온 의자를 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채송화에겐 의자에 앉은 채론 갈 수가 없다. 채송화에게 가자면 내 낡은 몸을 태워 얻은 발바닥 전기가 필요하다. 채송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의자처럼 딱딱해진 나를 연소시킬 때, “방금 전까지/ 채송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발바닥 전기를 찌릿찌릿/ 채송화에 주고 간/ 한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내 안에 영원히 살면서 내가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내가 빼앗긴 아이. 두터이 자란 이끼를 들어내면 거기 생흙처럼 남아 있는 본바탕으로서의 동심이 드러난다.
 
 
 
 

 

오늘의 나를 태운 자리에서 채송화가 피어난다. 어른이 되느라 하나씩 늘려온 의자를 치우고 날것으로 직면한 자기의 본바탕, 그것을 채송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만났다. 그때, 채송화 꽃잎은 찌릿찌릿, 더없이 유난하였다. 그 아이 손을 잡고 올해는 무슨 시를 길러볼까. 흰 구름 속에서 어렵사리 구해온, 두 번 꽃이 핀다는 목화 이야기를 길러볼까. 세상의 모든 그 아이들에게, 이미 오래전에 빼앗겼으나 되찾은 이야기를 찌릿찌릿, 들려주고 싶다.
 

 

이안
이안

 

*199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 <치워라, 꽃!>,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 <고양이의 탄생> <글자동물원>, 평론집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를 냈다.

 

 

 


 

시의 가장 큰 모험

 

 

“절대 이 책릉 거꾸로 꽂지 마시오/ 문이 곰릉 열고 탈출할 수도 있믕”(‘른자 동롬원’ 전곰). 어법에 맞게, 언어 규칙에 충실하게 어른의 언어로 다시 쓰면 이렇다. “절대 이 책을 거꾸로 꽂지 마시오/ 곰이 문을 열고 탈출할 수도 있음”(이안, ‘글자 동물원’ 전문). 어떤 언어로 쓴 시가 더 마음에 드는가? 언어가 제도임을, 정해진 규칙과 질서로 인간을 훈련시키고 길들이는 제도임을 성찰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언어로 말해야 하는가?

 
 

 

 
아이는 어른의 세계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고, 어른은 아이의 세계를 어느새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다운 상상과 어른의 기억만이 가능할 뿐이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인생에서 딱 한 번 안타까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생텍쥐페리가 남긴 이 말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이미 어른이다. “채송화 앞에 앉아/ 발바닥에 오르는/ 전기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없거나, 그런 시간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우리가 ‘시’라고 말할 때 그 시는 당연(?)히 어른의 시를 전제한다. ‘시’는 아이의 동시(童詩)와 아이를 기억하는 어른의 동시를 특수한 범주의 하위 갈래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동시는, 역설적이게도 ‘시’의 가장 큰 모험이겠다. 진짜 아이가 아닌 바에는, 아주 드물게 몇몇 어른만이 동시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의 시와 아이의 시를 함께 쓰는 이안은, “내 안에 영원히 살고 있는 아이”를 되찾는 모험을 통해 ‘시’의 하위 갈래가 아닌 원형(原型)으로서의 ‘동시’를 쓰고자 한다. 그는 동시가 곧 ‘시’가 되는 모어(母語)의 시간을, 세상의 두꺼운 이끼 속에 “생흙처럼 남아 있는 본바탕의 동심”이 다시금 싹트는 시간을 꿈꾼다. 이 시간은 가까운 일상 속에 있다. 문법으로 상징되는 제도의 시간을 비켜나, 잠시 채송화 앞에 쪼그리는 짬을 내기만 한다면.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 채송화가 지금 옆에 없다고. “하양 노랑 자줏빛/ 꽃전구가 켜져 있는” 채송화가 그러나 어찌 그 채송화이기만 할까. 찌릿찌릿 “생것이 사라져간 쪽”(‘유고시’)이 바로 저 앞인데.

 

김수이/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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