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천경자 화백 관련 기사 및 작품 모음
여인
미인도
△1924년 전남 고흥에서 군서기였던 아버지 천성욱씨와 어머니 박운아의 장녀로 태어남. 본명은 옥자.
△1937~41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전남여고) 재학. 미술교사를 통해 그림에 입문. 졸업 뒤 의대에 진학하라는 부모의 권고를 뿌리치고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 이때 경자란 이름을 쓰기 시작.
△1942, 43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그린 ‘조부’‘노부’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잇따라 입선.
△1944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귀국 뒤 도쿄제대 유학생과 결혼.
△1946년 전남여고에서 미술 교사로 일하며 첫 개인전을 염.
△1951년 폐결핵 투병하던 여동생 옥희가 사망. 부산 개인전에서 뱀 그림 ‘생태’로 파문을 일으킴.
△1954년 홍익대 동양화과 교수로 임명.
△1955년 작품 ‘정’을 대한미협전에 출품해 대통령상 수상. 첫 수필집 ‘여인소묘’ 출간.
△1961년 국전 추천 작가가 됨.
△1969년 8개월간 미국, 유럽, 남태평양 일대를 여행.
△1970년 남태평양 풍물 시리즈 스케치전을 열어 첫 해외여행 작업을 전시.
△1971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천경자 미술연구소’를 세움.
△1972년 베트남전 종군 화가로 파견.
△1973년 현대화랑에서 초대 개인전.
△1974년 두번째 해외 스케치 여행. 홍익대 교수직 사임.
△1975년 3.1 문화상 예술부문 수상.
△1976년 문학사상에 자서전 연재. 자서전적인 대작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완성.
△1977년 ‘계간미술’ 특집 ‘평론가들이 뽑은 동양화 10대 화가’에 선정.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이 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출간.
△197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인도,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아마존 유역과 중남미로 세번째 해외여행.
△1980년 현대화랑에서 ‘인도, 중남미 풍물전’. 1995년까지 개인전을 열지 않음.
△198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절필을 선언.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1998년 미국 뉴욕에 이주. 서울시립미술관에 채색화와 스케치 93점 기증.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상설 ‘천경자실’ 개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짐.
△2014년 대한민국예술원, 천 화백 근황 확인 못해 수당 지급 중단. 딸 이혜선씨 반발해 회원 탈퇴서 제출.
△2015년 8월 뉴욕에서 타계. 딸 이씨가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 방문.
[한겨레]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운명의 난장인가. 강렬한 원색과 도발적인 소재로 한국 미술판을 휘저었고, 숱한 스캔들로 화제를 뿌렸던 한 여성 거장의 삶은 이승을 떠나는 날까지도 평탄하지 않았다. 한국 미술계에 숱한 명작과 일화들을 남긴 여성 거장 천경자 화백이 두달 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노환으로 타계한 사실이 22일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91. 천 화백은 1998년 국내에서 딸 이씨의 뉴욕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한번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동안 미술계에서 사망설, 식물인간설 등이 제기돼왔다.
고인은 한국 문화판을 특유의 강렬한 그림과 뛰어난 필력으로 진동시킨 당대의 여걸이었다. 강렬한 원색 화면에 야성적인 느낌의 여인과 꽃들이 가득 들어찬 독특한 화풍으로 대중을 매혹시켰고, 미술에세이와 세계 기행기로 베스트셀러를 잇따라냈던 문필가이기도 했다. 1924년 전남 고흥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한 그는 의대를 가라는 부모의 요구를 뿌리치고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나면서 화단에 들어섰다. 1942년 2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 이듬해 23회 선전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그린 ‘조부(祖父)’와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일찍부터 기대를 모았다.
노부/ 1943
그를 단번에 화단의 대가로 각인시킨 것은 1952년 피란지 부산에서 연 개인전이었다. 이 전시에 그는 지금도 전설적인 명작으로 회자되는 뱀 그림 ‘생태(生態)’를 출품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30여마리의 뱀이 뒤얽혀 또아리를 튼 이 자극적인 그림은 20대 나이에 두번의 결혼실패를 맛봤고, 한국전쟁 당시 폐병으로 여동생을 잃은 아픔을 삭여내며 독기로 그린 역작이었다. 작가 천경자에게 원초적 생명력과 야성이란 특유의 정체성을 쌓는 계기가 됐다.
생태/ 1951
그는 60년대 이후 90년대까지 자화상과 여인, 꽃 등을 주된 제재로 원색조 화면에 내보이면서 욕망, 꿈, 정한 따위를 환상적으로 표출하는 그림들을 줄기차게 쏟아냈다. 70대까지 유럽, 중남미, 아시아 등을 도는 스케치 여행을 거듭하면서 타히티 연작 등으로 잘 알려진 세계풍물기행화로도 이름을 알렸다. 퀭하면서도 야성적인 눈매에 원시적인 이국의 자연 속을 배회하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과 여인상들은 70~80년대 그의 연작 곳곳에서 등장하면서 천경자 화풍의 등록상표로 자리잡았다. 꽃모자를 쓴 여인의 낭만적 자태가 선연하게 다가오는 ‘길례언니’(1973)를 비롯해 70년대 중후반의 ‘초원’ 연작과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탱고가 흐르는 황혼’, ‘80년대의 ‘막은 내리고’ 등의 수작들은 지금도 미술관 전시와 경매시장 등에서 간간이 소개된다.
길례 언니/ 1973
내 슬픈 전설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 품에서 우리 고전을 읽으며 독서에 심취했던 고인은 문장가로서의 필력도 뛰어났다. 자신의 그림 제목을 옮긴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와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아프리카, 카리브해 등의 세계풍물 기행기 등 1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으며, 상당수는 당대 베스트셀러가 됐다. 60~70년대 명동 문화거리를 바바리코트의 세련된 옷차림에 담배를 물고 남도사투리를 흥얼거리면서 누볐던 여성 예인의 총아가 바로 그였다고 문화계 원로 인사들은 기억한다. 그러나 운명의 시련은 말년기 작가를 질곡 속으로 몰아넣었다. 원숙한 노년 작업의 경지에 접어든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시에 자신의 작품 ‘미인도’를 출품하자 그는 위작이라고 단정했으나 미술관과 화랑가 쪽은 진품이라며 작가의 말을 뒤엎어버렸다. 낙심한 천 화백은 “내 자식을 내가 몰라보는 일은 절대 없다”는 고언을 남기고 절필 선언을 한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카리브해를 돌면서 정열적으로 이국 풍경을 드로잉했다.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생애 마지막 개인회고전을 열어 8만 관객을 불러모았고, 1998년 11월 애장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전격기증하면서 미술계를 놀라게 했던 게 뉴욕으로 사라지기 전 그가 이땅에 마지막으로 남긴 발자취였다.
http://m.media.daum.net/m/media/culture/newsview/20151022145104965
문체부, 천경자 화백 금관문화훈장 추서 않기로..이유 '황당'
연합뉴스TV 한국인 http://m.media.daum.net/m/media/culture/newsview/20151023202757080
한국의 대표 화가였지만 한국 미술계와 단절한 채 지난 8월, 눈을 감은 천경자 화백. 1952년 뱀 그림 '생태'를 발표해 스타작가에 올랐고, 국전 추천 작가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며 1983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습니다. 각별한 업적을 남긴 예술가에게 타계 후 훈장을 추서하는 것이 관례인 만큼, 여류화가의 첫 금관문화훈장 수상에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는 천 화백의 훈장을 추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망 사실이 확인된 만큼 행정적인 문제는 없지만, 최근작이 없었다는 게 주된 이유입니다.
1970년 이후 미술 분야 금관문화훈장 수상자는 14명. 남성 중심의 미술계, 혁명과도 같은 존재였던 천 화백이 수상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에 미술계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입니다. "천경자 작가는 많은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해 기증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한국 미술사에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여성화가, 독자적 화가로 한 획을 그은 분인데…" 일각에서는 미술계 최대 스캔들인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불화한 것이 진짜 이유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인간복제기의 고백 "천경자·이우환 위작 쉽다" http://media.daum.net/v/20151025150627355?f=m 천경자 화백의 작품 "한국 미술계의 영원한 연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천경자는 화려한 채색화를 그린 작가로 유명하다.
傳說(전설) / 1961 / 122 x 148
환(歡) / 1962 / 105 x 149
여인들 / 1964 / 118.5 x 103 靑春의 門 / 1968 / 145 x 89 自殺의 美 / 1968 / 137 x 95 蛇 / 1969 / 198 x 136
이탈리아 紀行 / 1971_1973 / 65 x 80
길례언니 / 1973 / 41 x 26
四月 / 1974 / 40 x 26
孤/ 1974
장미 / 1975 / 36 x 55
6月의 新婦 / 1977 / 47 x 34
위작 논란이 된 "미인도", 1977
멀리서 온 女人 / 1977 / 34 x 21
恨 / 1977 / 51 x 43
수녀 테레사 / 1977 / 53 x 45.5
미모사 향기 / 1977 / 33.4 x 21.2
아열대 Ⅰ / 1978 / 73 x 91
탱고가 흐르는 黃昏(황혼) / 1978 / 48 x 43
인도 올드 델리/ 1979
나비소녀
두상/ 1982
황금의 비/ 1982
비 개인뒤
황혼의 통곡
꽃다발을 안은 여인
천 화백님은 작품을 그린 후 본인의 이름을 한자로 쓰고
작품 연도를 숫자나 한자로 캔버스에 남기셨다.
미인도 위작 논란에서는 작가의 비밀한 터치가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배경음악 : Hidden In The Heart/ Michael Hoppe)
천 화백님, 고통 없는 천국에서 안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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