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유심> 신인 특별 추천작 _ 문리보, 허이영
* 시단에 활력을 불어넣을 신인 발굴에 앞장서 온 시 전문지 <유심>은
원로 문인의 천거로 출중한 기량을 갖춘 신인을 시단에 특별 추천합니다.
—《유심》
겨울새 외 4편
문리보
너를 잊는다는 것은
저 얼어붙은 강을
날마다
맨발로 걷는 일이다
칼바람에 베인 듯
쉰 목으로 울어대는 갈대밭 지나
꽁꽁 언 강물 위를
내 뜨거운 발바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쩍쩍 밟아
이 얼음이 다 녹아 흐를 때까지
서성이는 것이다
석류
아, 발딱 일어선 젖꼭지
붉어져
달뜬 젖가슴
망설이는 손톱이여
거침없이 블라우스 단추를 열어
혀끝 세워 깨물어라
여문 속살
벼락같이 시디신 꿀물
몸서리치는 전율의 등줄기
파과(破瓜)의 뼛조각
쓸쓸히 흩어질지언정
당돌한 열매,
살아 있는 그 꽃
아버지 꽃밭에 꽃이 핍니다
아버지에게는 꽃밭이 하나 있다
망초꽃이나 메밀꽃 같은 것
앞 산머리 저녁놀
붉어진 뒤꿈치를 들고 돌아설 때면
저만치 보이는
터벅터벅 아버지의 꽃밭
오늘은 어느 먼 바다를 다녀왔을까
아버지의 꽃밭에서는
언제나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난다
주름진 눈꺼풀에
얇디얇은 등에
마른풀 위를 걸어오는
저 보타진 무릎에
갯내음 폴폴 날리며 피어나는
서걱서걱 하얀 소금꽃
질 새도 없이 피고 피고 또 피다
어느새 보석처럼 짱짱해진 꽃
나는 아버지가
바다에 그만 갔으면 좋겠다
앉은뱅이 꽃
꽃 같지도 않은 것이
이름까지 서러운 것이
저도 꽃이라고 한구석에 조그맣게 피었다
누군가 그 얼굴
짯짯이 보고플 때
무릎 꿇고 바짝 엎드려야만 보여주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꽃
화석
대나무 사립문 삐이걱 열어젖히니 못 보던 마당바위 하나 떠억 가슴 턱 턱 막혀라 사정없이 들어앉는다 오메 저 넘의 바위덩이 온 동네 개 짖는 소리 휘적휘적 풀 숲 헤치고 메마른 두 다리가 너 왔냐 마냥 달같이 웃고 있다
국화차 앞에 놓고 흰 벽 가운데서 춤추는 난 그림자 이제 그만 올라가시지요 또 한 잎 더해지는 난 이파리 그만 가시지요 날도 추워지는데 화선지 뚫으리라 노려보는 붓 연세도 생각하셔야지요 아아 벙긋 벌어지는 난 봉오리 스스스 댓잎 우는 소리 목울대 넘어간다
자다 깬 누렁이 눈치 없이 컹컹 갓 태어난 어린 별 놀란다 저 서투른 별빛에 지릿지릿 해진 머리칼 소리 없이 한숨만 집채만 한 마당바위 위 한 줌 동그마니 조심해 가거라 주춤 서운한 고개 뒤로 푸르르 김 서린 눈동자 속에 그림처럼 당신 앉아 있다
| 등단 소감 |
선연한 빛깔 내보일 터
휘적휘적 걸어오는 중에 문득 겨드랑이를 찔러대고 간질어대는 언어들이
낯설고 아프고 겁도 나고 신나고, 오는 내내 참 재미났습니다.
벚꽃 망울 위로 봄비가 수줍게 톡톡 떨어지는 날,
반갑고 설레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에게 다짐해봅니다.
세상 밖으로 내보이는 시에 덤덤해져야겠습니다.
무시로 거울 들여다보듯, 무심해져야겠습니다.
내 핏방울들인 것은 분명 맞는데, 이제 세상 어느 누군가에게도
선연한 빛깔이어야 하니까요.
핏줄 따라 붉게 붉게 피돌기 하는 그런 시를 쓰겠습니다.
제 글을 추천해주신 《유심》과 추천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 올립니다.
흐려지는 눈빛 한 번 내보이지 않고
묵묵히 시의 힘을 일깨워주신 아버지,
제 소식에 모처럼 기뻐하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문우님들과 생오지 가족 여러분과 이 기쁨을 함께하겠습니다.
문리보 moonriver982@naver.com
●광주 출생.
●연세대학교 성악과 졸업.
●생오지문예창작촌 상임이사.
●문학지 《창작촌》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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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사생활 외 4편
허이영
바람이 겨울, 봄을 저울질하더니
겨울로 기울었다.
날갯짓이 바쁘던 철새떼
오늘은 나뭇가지에서
외발로 고요히 내일 길을 가늠한다.
철새 등에 업혀가던
노을 속 묽은 저녁이 차다.
바람에 시달린 젓니 닮은 새순이
먹이를 쪼는 새처럼
순간순간
고개를 깐닥거리는 저녁 한때.
제 그림자를 끌고 사라진 아이들을 쫓아
툭툭 돌부리를 차던 팽팽한 바람은
계절이 숨은 골목길을 염탐한다.
입을 꼭 다문 철대문은 수족냉증을 앓는지
여전히 싸늘하다.
사생활을 들킨 골목길이
콧바람 풀썩일 때마다
담쟁이 몸속에 푸른 피가 돈다.
바람벽을 날아오를 깃털이 돋는다.
흐린 날
하늘이 저녁 거미처럼 내려오면
수평선이 벌떡 일어나 모래톱으로 온다.
탄력 잃은 대기는,
늘어진 그물눈처럼 생기를 잃고
물컹한 갯비린내 몰아 뭍으로 오를 때
부두는 비설거지로 달그락거린다.
짙은 바다 그림자 끌고 온 배들이
부두에 닻을 내리는 시간,
펄떡이는 생명은 또 다른 생을 모른 채
싱싱하다.
생각은,
날개를 잃고 육지를 떠돌다
고래의 지느러미를 달고
수평선을 쫓아
먼 바다로 출항을 한다.
한 무리 고래떼를 만나기 위해
바닷속 그물은 이미 잊은 지 오래
그믐산
산마을에 어둠이 차면
무두불이 좌선을 한다.
불두는 달로 차서 이울고
하늘이 대신 머리로 올라앉았다.
가사를 흐르던 바람이
똑똑똑 목탁 소리로 깊으면
별이 된 사리는
그믐밤마다 엉긴 어둠 풀고 있다.
가끔,
무게를 이기지 못한 사리 하나
지상의 마른기침 소리에 놀라 하늘을 놓치면
허공에 획 하나 긋고 지상으로 진다.
산마을 아이들이
염불처럼 소원을 재잘거리면
그믐산은
어둠을 더듬어 마을을 읽어내고는
안으로
별꽃 닮은 사리 하나 낳는다.
죽은 나무
잎이 피지 않는 나무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졸졸 심장을 도는 물소리 대신
막막한 이명 같은 울림이다.
살점이 한 움큼 떨어진 자리마다
제 속을 환하게 드러낸 나무.
공들였던 것이
가장 먼저 허물어지는 것일까.
나무는 나이테 하나 낳기 위해
해마다 아파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조용히 안으로부터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 자리마다
비껴가던 햇살
한나절 들어앉았다 가기도 하고
사막을 건너온 바람이
며칠을 모래 한 알 품다 가곤 한다.
부레 없는 상어가
일생 움직이는 형벌로 살 듯
눕지 못한 채 서서
나무는 오래오래 문상을 받는다.
새벽 편지
자다 깬 새벽
정적조차 소음인 창밖을 봅니다.
따닥따닥 타전 소리 따라
흔들리는 창문에는
먼 나라서 온 모스부호가
유리창에 빼곡히 채워졌다
주르륵 지워집니다.
행간을 읽을 수 없는
낯선 나라에서 온 문자들.
어둠을 건너오느라 일그러진 채
문밖서 어룽거립니다.
읽히지 않는 긴 문장을 읽어내느라
뼈 속 깊이 문신으로 새겨진
저문 기억 하나 깨어나
새벽을 앓습니다.
| 등단 소감 |
천천히 오래오래 사막 건너기
낙타는 혹에 지방을 가두고 사막을 건넌다고 합니다.
‘시’라는 사막의 초입에 선 나는 무엇을 채워 가야 하나? 등단 소식을 접하고 내게 던진 물음입니다. 서툰 길 모자란 부분 미리 채워갈 수는 없지만 늘 스스로 질문하고 메우면서 낙타처럼 천천히 오래 가겠습니다. 사막이 주는 긴 고통, 짧은 환희 온몸으로 받으며 깨어 있겠습니다. 시만 위해 살기보다 시와 오래오래 함께하겠습니다.
산문에서 시로의 방향전환을 이끌어 주시고, 부족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주신 교수님, 채우는 것보다 덜어내는 가르침 감사합니다.
직녀성과 견우성 어디쯤에서 텃밭을 일구고 계실 아버지별에도 기쁜 소식 타전합니다. 가족처럼 다독여주신 문우님, 더 오래 시 문 밖에서 헤매지 않도록 어려운 지면 선뜻 열어 주신 《유심》에도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
허이영 youngheq@hanmail.net
●삶의 향기 동서문학상 수필 부문 금상 수상.
●《월간문학》(수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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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거센 비바람 홀로 이겨내기를
인간이 만든 것치고 완성에 이른 예술작품이 어디 있겠는가. 있다면 이미 천국이나 극락일 것이다. 예술과 자연이 일치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은 과정이자 실험이기 때문이다. 완성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탓하지 하지 마라. 과정이 주는 감동과 실험이 주는 개성이 있으면 그만이다. 이번에 두 여류의 작품들을 특별추천한 소이연이다.
문리보 씨의 시는 공원의 잘 전지된 장미꽃 같은 작품이다. 그 장미에 달린 상큼한 가시가 돋보인다. 이에 대해 허이영 씨의 시는 마을 공동 우물가에 가지를 늘어뜨린 배롱꽃 같은 작품이다. 그 나무 그늘이 신선하다. 아직 꽃들은 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 아름다운 개화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꽃봉오리들은 여리지만 그가 내린 뿌리는 수맥에 단단히 뻗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직 바람이 차다. 비바람도 몰아칠 것이다. 문 군, 허 군 그동안 많이 기다렸다. 이제는 충분히 자신을 가지고 부디 닥치는 역경을 홀로 이겨내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 시단의 아름다운 꽃밭을 일궈내기 바란다.
조오현 · 오세영
—《유심》201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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