詠忘
世人皆忘我 (세인개망아) 四海一身孤 (사해일신고) 豈唯世忘我 (기유세망아) 兄弟亦忘予 (형제역망여) 今日婦忘我 (금일부망아) 明日吾忘吾 (명일오망오) 却後天地內 (각후천지내) 了無親與疏 (요무친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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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는 것
세상사람 모두가 나를 잊어버려 천지에 이 한 몸은 고독하다. 세상만이 나를 잊었겠나? 형제마저 나를 잊었다. 오늘은 아내가 나를 잊었으니 내일이면 내가 나를 잊을 차례다. 그 뒤로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까운 이도 먼 이도 완전히 없어지리.
-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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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urige Sonntag(Gloomy Sunday) by Erika Marozsan 그림 / 김성규
고려 문호로 꼽히는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가 20대 시절에 썼다. 자유분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그의 작품은 지금 읽어도 참신하다. 그는 젊은 시절 세상 모두가 그를 망각했다고 생각했다. 잊혀진 자의 고독감에 괴로워하던 그가 도달한 것은 잊혀진다는 것의 본질이었다. 망각은 관계가 소원한 사람들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도 예외가 없었다. 망각의 극단에 이르면 가장 가깝고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형제와 아내마저 나를 잊고 있다. 어찌 해야 하나? 이제 나마저도 나를 잊어야 한다. 내가 나를 잊는 단계로 올라선다면 너와 나의 차별이 극복되고 모든 존재를 두루 사랑하는 평등의 관계로 비약이 일어날 것만 같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이 고독을 벗어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