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응
권태응 선생님은 1918년 4월 20일 충주군 충주면 칠금리 381번지에서 출생하셨습니다. 9세 때 충주 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에 입학해 1932년에 졸업했는데 학교 다니는 동안 줄곧 일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권태응 선생이 자라던 어린 시절 집에는 일어판 세계문학전집이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문학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선생은 충주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서울의 제일고등 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그 학교에서 일본인 교사의 민족차별적인 언행을 보며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최인형, 염홍섭, 고흥업 등과 <UTR구락부>를 조직하여 휴일마다 등산모임을 갖고 모둠일기를 쓰면서 일본식민지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토론하며 민족의식을 키웁니다..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보여온 동기생 민병선 등 3명이 졸업앨범 기증 문제로 회의를 하던 중 우리가 졸업하게 된 것은 천왕폐하의 홍은이라는 발언을 하자 그렇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언쟁이 있었고 졸업앨범 앞에 일본의 상징적인 꽃인 국화사진을 넣은 것을 빼도록 요구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졸업식날 그들 친일학생들을 화학실로 불러 몰매를 가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UTR구락부원 8명이 종로경찰서에 잡혀 가게 되었고 15일 동안 구금되어 조사를 받고 기소유예처분을 받습니다.
제일고보 졸업 앨범에서
1937년 4월.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을 합니다. 함께 와세다에 입학한 최인형, 일본대에 입학한 홍순환, 그리고 이강혁 김철수, 염홍섭 등과 함께 <33회>라는 독서회를 만들어 민족문제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일본 자본주의의 실태와 제국주의 전쟁의 성격, 전쟁 이후 조선이 준비해야 할 것 등에 대한 토론을 합니다. 그리고 일본 경찰에 의해 도쿄 노다경찰서에 잡혀가 독서회 친구들과 함께 3,4개월씩 구금당하게 됩니다. 1939년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하려고 짐을 꾸리다 일본 경시청에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연식 정구를 좋아하던 건강한 몸이 스가모형무소 감옥생활 일 년만에 거의 죽게 되다시피 하여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됩니다.
동경유학 시절 하숙방에서
권태응 선생이 투옥되었던 스가모 형무소
1940년 5월 14일 홍순환선생 등과 함께 보석 출소한 권태응선생은 동경시 정교구(淀橋區) 소재 제국갱신회(帝國更新會)에 거주지의 주소를 제한당하게 됩니다.(보훈처 발행 독립운동자료집 별집 3권 재일본 한국인 민족운동 자료집 626페이지) 그리고 와세다대학에서는 1940년 4월 퇴학을 당하시게 됩니다.
병이 깊어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인천에 있는 적십자 요양원에서 치료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투병 중에 선생은 영동 심천이 고향인 박희진이란 간호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 분의 간호로 선생은 건강을 조금씩 되찾게 되고 결혼까지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1944년 선생은 결혼을 하십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모님과 함께 야학을 하십니다. 추석 때는 극본을 써서 소인극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동생인 권태윤선생도 배역을 맡아 함께 참여했던 일이 생각난다고 하십니다.
선생은 고향 칠금리에서 많은 작품을 쓰십니다. 1945년 해방 전후한 시기에 단편소설 「새살림」,「별리」,「양반머슴」등을 쓰십니다. 농민들의 삶의 애환과 희망, 당시 일본 유학생들의 삶의 모습과 올바른 지식인의 자세를 그린 소설들입니다. 선생의 문학작품은 소설보다 동시가 더욱 뛰어납니다. 1947년 4월 21일 발행한 《소학생》제 45호에 「어린고기들」이 실리게 되는 것을 계기로 1950년까지 거의 매호마다 작품발표를 하시며 동요 시인으로 활동하시게 됩니다.
1948년 글벗집에서 동시집 『감자꽃』을 출간하십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조그만 애국자 여러분에게 바치는 따뜻한 선물”이 되기를 바라는 윤석중 선생의 머리말과 함께 출판된 이 동시집에서 선생은 “여러 해째 요양 중에 있지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새 나라 여러 어린 동무들이 언제나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정성껏 빌겠”다고 쓰셨습니다.
선생은 참으로 많은 작품을 쓰셨습니다. 선생이 정리한 미발표 원고를 년도별로 보면 1947년 『송아지』에 46편, 『우리시골』에 44편, 『어린 나무꾼』에 36편, 『하늘과 바다』에 45편, 1948년 『물동우』에 30편, 『우리 동무』에 37편, 1949년『작품』에 69편, 1950년 『동요와 또』에 57편,『산골마을』에 40편이 있습니다. 중복되는 작품을 빼도 333편의 동시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1949년 창작원고 6권의 지은이의 말에 쓰셨던 것처럼 “38선이 없어지고 우리의 참된 나라가 서는 날”을 고대했고 “하루 빨리 남북 통일이”‘되기를 바라셨지만 나라는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고 선생은 마차에 실려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두 번이나 피난을 가는 길에 선생은 약도 못쓰고 먹는 것도 부실하여 몸이 더 쇠약해지셨습니다. 방위군에 지원했던 동생 권태윤선생은 충주 변두리로 마이신을 구하러 갔다가 약은 못 구하고 귤 몇 개만 구해서 왔더니 그 귤을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만지다가 “일어나서 많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때가 1951년 3월 28일 오전 2시였습니다. 전쟁 중이라 관도 못쓰고 모친께서 다락에 있는 선반을 뜯어 거기에 선생을 모셨다고 합니다.
1968년 새싹회에서 전국에 여섯 분의 동시작가를 선정하여 그분들의 노래비를 세울 때 선생의 동시 감자꽃 노래비가 충주시 탄금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충북작가회의와 충주지부는 매년 권태응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백일장을 개최해 오고 있고,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교과서에(특수학교용)는 권태응선생의 동시 「아기는 무섬쟁이」가 실려 있습니다. 1995년 10월 창작과 비평사에서 미발표 작품을 포함해 『감자꽃』개정 증보판을 냈고 1997년부터 충북 민예총과 충북작가회의에서는 매년 권태응문학제를 개최해오고 있습니다. 아울러 2003년 작곡가 백창우에 의해 권태응선생 동요음반이 만들어졌고 임영택, 정태준 등 작곡가들에 의해 많은 동시가 노래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1999년 미발표 동시집 『산골마을』발표.
2005년 6월 17일 국가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8월 15일 60주년 광복절을 기해 대통령표창을 받게 되었습니다.
2006년 미발표 소설 「별리」「양반머슴」「새살림」발표.
2010년 충북민예총 음악위원회 작고 문인 동요 음반사업으로 ‘눈 온 뒤 마을’,‘해님과 달님’,‘동무 동무’,‘막대기 들고는’,‘별님동무 고기동무’ 새로이 작곡됨.
2011년 미발표 소설 「지열地熱」, 희곡 「동지同志들」, 수필 「파릿채」「山울님」등 발표.
http://ilovecontest.com/munhak/bbs/board.php?board=munhaknews&command=body&no=237 펌
권태응 선생님은 1918년 4월 20일 충주군 충주면 칠금리 381번지에서 출생하셨습니다. 9세 때 충주 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에 입학해 1932년에 졸업했는데 학교 다니는 동안 줄곧 일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권태응 선생이 자라던 어린 시절 집에는 일어판 세계문학전집이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문학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선생은 충주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서울의 제일고등 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그 학교에서 일본인 교사의 민족차별적인 언행을 보며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최인형, 염홍섭, 고흥업 등과 <UTR구락부>를 조직하여 휴일마다 등산모임을 갖고 모둠일기를 쓰면서 일본식민지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토론하며 민족의식을 키웁니다..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보여온 동기생 민병선 등 3명이 졸업앨범 기증 문제로 회의를 하던 중 우리가 졸업하게 된 것은 천왕폐하의 홍은이라는 발언을 하자 그렇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언쟁이 있었고 졸업앨범 앞에 일본의 상징적인 꽃인 국화사진을 넣은 것을 빼도록 요구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졸업식날 그들 친일학생들을 화학실로 불러 몰매를 가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UTR구락부원 8명이 종로경찰서에 잡혀 가게 되었고 15일 동안 구금되어 조사를 받고 기소유예처분을 받습니다.
제일고보 졸업 앨범에서
1937년 4월.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을 합니다. 함께 와세다에 입학한 최인형, 일본대에 입학한 홍순환, 그리고 이강혁 김철수, 염홍섭 등과 함께 <33회>라는 독서회를 만들어 민족문제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일본 자본주의의 실태와 제국주의 전쟁의 성격, 전쟁 이후 조선이 준비해야 할 것 등에 대한 토론을 합니다. 그리고 일본 경찰에 의해 도쿄 노다경찰서에 잡혀가 독서회 친구들과 함께 3,4개월씩 구금당하게 됩니다. 1939년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하려고 짐을 꾸리다 일본 경시청에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연식 정구를 좋아하던 건강한 몸이 스가모형무소 감옥생활 일 년만에 거의 죽게 되다시피 하여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됩니다.
동경유학 시절 하숙방에서
권태응 선생이 투옥되었던 스가모 형무소
1940년 5월 14일 홍순환선생 등과 함께 보석 출소한 권태응선생은 동경시 정교구(淀橋區) 소재 제국갱신회(帝國更新會)에 거주지의 주소를 제한당하게 됩니다.(보훈처 발행 독립운동자료집 별집 3권 재일본 한국인 민족운동 자료집 626페이지) 그리고 와세다대학에서는 1940년 4월 퇴학을 당하시게 됩니다.
병이 깊어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인천에 있는 적십자 요양원에서 치료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투병 중에 선생은 영동 심천이 고향인 박희진이란 간호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 분의 간호로 선생은 건강을 조금씩 되찾게 되고 결혼까지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1944년 선생은 결혼을 하십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모님과 함께 야학을 하십니다. 추석 때는 극본을 써서 소인극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동생인 권태윤선생도 배역을 맡아 함께 참여했던 일이 생각난다고 하십니다.
선생은 고향 칠금리에서 많은 작품을 쓰십니다. 1945년 해방 전후한 시기에 단편소설 「새살림」,「별리」,「양반머슴」등을 쓰십니다. 농민들의 삶의 애환과 희망, 당시 일본 유학생들의 삶의 모습과 올바른 지식인의 자세를 그린 소설들입니다. 선생의 문학작품은 소설보다 동시가 더욱 뛰어납니다. 1947년 4월 21일 발행한 《소학생》제 45호에 「어린고기들」이 실리게 되는 것을 계기로 1950년까지 거의 매호마다 작품발표를 하시며 동요 시인으로 활동하시게 됩니다.
1948년 글벗집에서 동시집 『감자꽃』을 출간하십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조그만 애국자 여러분에게 바치는 따뜻한 선물”이 되기를 바라는 윤석중 선생의 머리말과 함께 출판된 이 동시집에서 선생은 “여러 해째 요양 중에 있지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새 나라 여러 어린 동무들이 언제나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정성껏 빌겠”다고 쓰셨습니다.
선생은 참으로 많은 작품을 쓰셨습니다. 선생이 정리한 미발표 원고를 년도별로 보면 1947년 『송아지』에 46편, 『우리시골』에 44편, 『어린 나무꾼』에 36편, 『하늘과 바다』에 45편, 1948년 『물동우』에 30편, 『우리 동무』에 37편, 1949년『작품』에 69편, 1950년 『동요와 또』에 57편,『산골마을』에 40편이 있습니다. 중복되는 작품을 빼도 333편의 동시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1949년 창작원고 6권의 지은이의 말에 쓰셨던 것처럼 “38선이 없어지고 우리의 참된 나라가 서는 날”을 고대했고 “하루 빨리 남북 통일이”‘되기를 바라셨지만 나라는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고 선생은 마차에 실려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두 번이나 피난을 가는 길에 선생은 약도 못쓰고 먹는 것도 부실하여 몸이 더 쇠약해지셨습니다. 방위군에 지원했던 동생 권태윤선생은 충주 변두리로 마이신을 구하러 갔다가 약은 못 구하고 귤 몇 개만 구해서 왔더니 그 귤을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만지다가 “일어나서 많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때가 1951년 3월 28일 오전 2시였습니다. 전쟁 중이라 관도 못쓰고 모친께서 다락에 있는 선반을 뜯어 거기에 선생을 모셨다고 합니다.
1968년 새싹회에서 전국에 여섯 분의 동시작가를 선정하여 그분들의 노래비를 세울 때 선생의 동시 감자꽃 노래비가 충주시 탄금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충북작가회의와 충주지부는 매년 권태응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백일장을 개최해 오고 있고,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교과서에(특수학교용)는 권태응선생의 동시 「아기는 무섬쟁이」가 실려 있습니다. 1995년 10월 창작과 비평사에서 미발표 작품을 포함해 『감자꽃』개정 증보판을 냈고 1997년부터 충북 민예총과 충북작가회의에서는 매년 권태응문학제를 개최해오고 있습니다. 아울러 2003년 작곡가 백창우에 의해 권태응선생 동요음반이 만들어졌고 임영택, 정태준 등 작곡가들에 의해 많은 동시가 노래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1999년 미발표 동시집 『산골마을』발표.
2005년 6월 17일 국가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8월 15일 60주년 광복절을 기해 대통령표창을 받게 되었습니다.
2006년 미발표 소설 「별리」「양반머슴」「새살림」발표.
2010년 충북민예총 음악위원회 작고 문인 동요 음반사업으로 ‘눈 온 뒤 마을’,‘해님과 달님’,‘동무 동무’,‘막대기 들고는’,‘별님동무 고기동무’ 새로이 작곡됨.
2011년 미발표 소설 「지열地熱」, 희곡 「동지同志들」, 수필 「파릿채」「山울님」등 발표.
http://ilovecontest.com/munhak/bbs/board.php?board=munhaknews&command=body&no=237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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