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바닷가에서 만난 세명의 '위대한 개인들'
이정우전라도 닷컴기자
"이 기자 자네 빨리 좀 와사 쓰겄네'
사진 찍는 마동욱 형이었다.
결론을 먼저 말하고 나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 동욱형 특유의 화법이다.
안양면 수문포(전남 장흥군 안양면) ○○횟집에서
한승원 선생과 이승우 작가 동욱형 셋이서 회를 한접시 먹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전갈이었다.
횟감이 넘쳐서 젊은 사람 입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기자가 숙식을 해결하는 장흥읍에서 수문포 ○○횟집까지는 20분 거리 오후 6시쯤 횟집에 도착했다.
한승원 선생과는 취재다 행사다 해서 두세번 목례 수준으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지만
이승우 작가와의 만남은 한번의 전화인터뷰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자리는 어색하지 않았다.
여기는 장흥이고 우리들은 모두 장흥의 피붙이들이 아니던가.
이날의 횟집 횟감은 이승우 작가가 마련했다.
금년 3월부로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된 것에 대한 인사의 의미.
고향땅을 지키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한승원 선생과
마동욱 사진가(동욱형은 작가라는 직함을 한사코 거절한다.
자유롭게 사진을 찍고자 하는 입장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남발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회의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를 '모신' 자리였다.
관산읍 신동에서 태어난 이승우 작가의 처지에서
고향땅을 지키고 있는 두 '예술가'를 광주까지 와서 어찌 만나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대교체는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 거야'
한승원 선생의 뜬금없는 발언에 주변이 멀뚱멀뚱해졌다.
기자가 '불려나온' 이유는 넘치는 횟감 소비때문이 아니었다.
선생은 지난해 이맘때쯤 기자가 쓴 '문화칼럼'을 꺼내고 있는 것이다.
장흥땅에서 송기숙 이청준 한승원 이 세 이름이 과소비되고 있으니 이제 그만하고
이승우 이대흠 김영남과 같은 젊은 작가에게 주목하자는 요지의 글이었다.
멀뚱멀뚱함이 가시기도 전에 선생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더군다나 문학적 세대교체라면 인위적이어서는 안되지'
'어린 나이 담보로 눈 딱 감고 한번 써 봤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자네 의도는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이 노인네까지 끌어 들여 난도질할 이유가 무언가? 허허허'
가벼운 웃음이 좌중에 흘렀고 두어잔 쯤 술이 돌았다.
회갑을 넘긴 거장의 큰 품이 어두워가는 득량만의 바닷가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안양면 율산마을 한승원 선생의 작업실 '해산토굴'로 자리를 옮겼다.
고향에 자리를 잡고자 선생이 3년여 물색한 끝에 마련한 수문앞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산언덕이다.
초라하지도 너무 화려하지도 않은 선생의 명성보다는 조금 낮다는 느낌의 품격을 갖췄다.
고전미가 물씬 풍기는 서재 한가운데 커피가 놓였고
오디오에선 리차드막스의 색소폰이 흘러나와 방안을 떠다녔다.
소설과 인상사진에서 짐작되는 '고집불통'의 느낌과는 달리 선생은 충분히 열려있었다.
'좋은 선생이 되는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아.
이 작가가 좋은 소설을 많이 쓰면 그게 곧 좋은 선생이 되는 길이야.
생각해봐 어떤 선생님들이 기억에 남는지.
그때 그 선생님이 두음법칙이나 감정이입법 따위를 가르쳤다는 것은 생각나지 않지.
그보다는 그 선생님이 어떠한 모습을 가졌느냐가 기억에 남고 평생을 따라다니며
삶의 지침이 되는 거야.'
그러고 보니 한승원 선생이나 이승우 작가 모두 조선대에 출강하고 있다.
선배 교수가 후배 교수에게 주는 조언이었다.
순천대나 광주대와는 달리 조선대 문예창작과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데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학부제에서 한발 더 나아간 광역학부제의 시행으로 문예창작과는 이름만 있을 뿐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실체란 구체적으로 창작에 뜻을 둔 학생들을 의미할 터.
문예창작이라는 '고난의 길'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극히 적다는 우려였다.
'국문과와 문예창작과도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교수되는데
사학과와 영문과와 문창과가 앞뒤없이 섞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문예창작 전공교수라는 저의 본임이 자리잡을 곳이 없죠.'
등단 이래 소설쓰기 한길에만 매달려온 '소설가 이승우'의 처지에서
학사행정에 관여해 문예창작과의 정체성을 확립해야되는
'교수 이승우' 역할의 곤혹스러움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 스스로 생전 처음 사회화 훈련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으니
조선대에 넓게는 광주에 연착륙하고자 하는 작가의 신고가 그리 만만치 않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아∼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게.
그러면 그런갑다 생각하고 그냥 넘기게. 어느 판이던지 다 그렇게 후미진 구석이 있는 거야'
한승원 선생은 손사래까지 치며 기자의 입을 막았다.
'그래요. 그 이야긴 하지 맙시다'
이승우 작가는 소탈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듣기에 따라선 아주 근엄하게 이야기의 확산을 막았다.
'2001 이상문학상' 이야기였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번 이상문학상 심사평 행간에서 이상한 기운을 읽었습니다.
문학외적인 어떤 손이 개입하고 있다는 그런 기운말입니다.
두분을 이렇게 함께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적지 않을 것이니 외람되지만 그 속내를 듣고 싶습니다.'
꽤 어렵게 고르고 골라서 대화의 소재가 막 떨어질는 찰나에 '기습적'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이다.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략의 답은 건진 것도 같다.
'후미진 구석'이라…! 아래 인용부호에 묶어진 글이(존칭 생략) 질문의 의도를 정리한 것이다.
2001년 이상문학상 수상자는 '부석사'를 쓴 신경숙이었다.
이상문학상이 이상해졌다는 얘기가 항간에 떠돌았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2001년처럼 이상한 경우도 없었다.
이승우와 신경숙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도 심사위원의 심사평 어디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 신경숙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간 까닭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한승원 선생만이 유일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이승우 수상을 주장했고
'말발'이 안먹혔던지 공동수상까지 제의했던 터다.
지난 1988년 한승원과 임철우의 공동수상 전례도 있고 하니 가능한 제안이었는데도 결과는
'신경숙'이었다.
최근의 숱한 표절논쟁과 더 이상 받을 상이 없다는 바로 그 작가에게 은희경과 이인화 다음으로
이상문학상이 수여된 것이다.
지난해 이인화 수상('시인의 별') 당시에도
심사규정 문제로 홍역을 앓았던 이상문학상인데 은희경까지 묶으면
이들 모두는 '조선일보'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른바 안티조선의 입장에서 가지는 문제의식은 아니다.
신경숙의 남편이 남진우라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왠지 개운치 않은 인적사슬의 연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사실이 그러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
시침이 11시 문턱에 다다르고 있었다.
한승원 선생은 함께 자고 같이 조선대로 출근하자며 이승우 작가를 잡았다.
오직 장흥에서만 연출 가능한 애정어린 눈빛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 작가는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양해를 구하고 화순 광덕지구의 원룸아파트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평생 소설 그것도 주로 장흥바다에 관한 소설만 쓰는 회갑을 넘긴 한승원 선생.
역시 소설 깊은 사유와 농후한 관념성으로 독특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불혹 문턱을 막 넘은 이승우 작가.
댐과 철길 철가방(그는 분식집 사장이다)과 카메라를 들고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 같은 사람 마동욱 형.
셋은 모두 서울에서 시작해 고향 언저리로 돌아온 연어같은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위대한 개인들'이었고 메이드 인 장흥이었다.
곁에서 그이들과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깨닫게 되는 시골의 기자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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