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향한 고독과 비애의 속도
한 시인의 삶과 죽음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 6가의 대지가 100여 평이나 되는 작지 않은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지전(紙廛)을 경영하는 전형적인 중인 가문이었다. 그가 서울의 부유한 중인 계급 출신이라는 점은 식민지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넓은 의미의 비극적 세계관의 담지자로 운명 지우게 된다. 돌아갈 과거와 전통은 사라져 없거나 부정(不淨)하고, 눈앞의 현재와 나아갈 미래는 자기의 것이 아닌 비극적 상황은 그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거부하면서 수락하는 것, 혹은 수락하면서 거부하는 것 - 이것이 비극적 세계관의 핵심이라면 김수영 역시 과거에 대해서도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이런 이율배반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뿐만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시인 작가들의 운명이기도 했다.
그는 유치원과 서당을 거쳐 여덟 살이 되던 해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6학년 때 갑자기 급성 장티푸스와 뇌막염을 앓아 중학 입시에 실패하고 선린상업학교 전수과(야간)에 겨우 입학했다. 1941년 그는 몰락해 가는 집안의 기대를 등에 지고 일본 유학을 떠났지만 대학 입학 자격을 위한 예비학교에 얼마간 적을 두었을 뿐 이내 학업을 포기하고 연극에 몰두하였다. 그 시기에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였고 사회 현실이나 민족 현실에 대한 도피적 태도를 가졌다. 이 시기부터 해방을 맞기까지 그는 연극 활동에 몰입하는데 그것은 연극 자체에 대한 예술적 몰입이었다기보다는 연극적 현실로의 도피에 가까운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연극에 진절머리'를 내고 비로소 시를 쓰게 된다.
해방과 함께 그는 박인환 등 당시 비슷한 연배의 모더니스트들과 어울리면서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단체에서 한동안 일을 하기도 하였고 6·25전쟁이 일어나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도 자발적으로 의용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는 '우경 좌경'을 다 했던 그 시대가 '치욕의 시대'였다고 술회하였다. 그 치욕은 좌경 혹은 우경을 한 데서 오는 치욕이 아니라 확실한 신념 없이 그 시대를 흘려보냈다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후 그 시대에 정치적 신념을 버리지 않고 월북하거나 죽어 간 좌익측 인사들에 대한 본원적인 수치심으로 남아 그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또한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의 영향으로 '예술가의 양심과 세상의 허위'라는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고 비로소 예술을 통한 세계와의 대결의 길을 걷게 된다.
전쟁 동안 의용군에 지원했던 김수영은 사회주의 북한에 대해 점차 회의에 빠져 유엔군의 북진을 틈타 의용군을 탈출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1951년 1월경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긴 기간은 아니었으나 이 의용군 체험과 수용소 체험은 심약한 김수영의 혼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의 이 지독한 전쟁 체험은 그의 시 세계의 바탕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시는 시대와의 숨 가쁜 대결을 그 중심 과제로 삼게 되었으며 실존적 비애, 비극적 자기 고양, 현실과의 속도 경쟁, 죽음을 담보로 한 초월 의지, 생활과 일상성의 발견, 현대성의 추구 등 그의 시 세계의 핵심을 이루는 문제들에 깊이 파고들게 된다.
4·19혁명과 함께 60년대를 맞은 그는 자신의 시와 세계 인식의 근본적 변혁을 시도했다. 그는 우파 정권과 미국, 소련에 대한 공격은 물론 북한과 남한의 비교 등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은 산문적인 시들을 써 냈고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구조적인 성찰과 이해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대신 치열한 윤리적 자기 점검을 수행하는 데에 그친다. 하지만 뒤이어 일어난 쿠데타는 이마저도 좌절시킨다.
군사정권의 서슬은 심약한 그가 추구하던 '혁명'을 문학과 문화의 영역에 가두어 놓았다. 그는 현실의 혁명을 시의 혁명으로 대체하였고 시를 쓰는 자기 자신의 나태한 의식을 문제 삼았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언어와 사유에 대한 학대와 고문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다른 시인들과 작가들의 의식의 개변(改變)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특히 그의 공격적인 산문들은 사상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낙후되어 있었던 동료 문인들에게는 그 자체가 매번 학대이자 고문이었다. 물질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의식만의 '현대성'을 요구할 때 그 첨예하지만 공허한 의식의 긴장은 인간과 문학에 대한 학대가 된다. 그리고 그 학대의 긴장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현실은 그대로 있고 문학과 인간의 주관적 '해탈'만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김수영의 60년대는 이러한 본질적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로 흘러갔다.
1968년 들어 그는 그의 일생 중 가장 크리티컬한 논쟁이었던 이어령과의 '불온 논쟁'을 벌였고(4월), 그 특유의 '온몸 시학'을 역설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제하의 문학 강연을 하였으며(4월), 최후의 시 「풀」을 썼다. 그는 거의 죽음에 이르러 마치 유언을 남기듯 격렬한 논쟁과 시론, 그리고 아름다운 묵시록적 시 한 편을 남겼다. 그의 삶과 시는 수락할 수 없는 것들을 수락하고 살아야 하는 근대적 존재 조건과 그의 결벽하고 선병질적인 영혼이 일으킨 불화의 산물이었다. 그는 세계와 화해하는 대신 비타협적으로 불화 그 자체를 살아 냈다.
그리고 그해 6월 16일, 그는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질주하는 버스에 치여 치열했던 마흔여덟 해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해엔 1·21사태라고 불리던 무장간첩 침투 사건이 있었고 향토예비군법이 제정되었으며, 통일혁명당 사건이 있었다. 또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고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된 것도 그해의 일이었다. 냉전 체제와 한국형 자본주의가 바야흐로 고도화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한 시대를 혼자의 힘으로 맞서고자 했던 희귀한 인간 김수영에게 그 시대는 점점 힘겨운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죽음은 그를 그토록 지독했던 고독과 비애의 속도로부터 해방시켜 준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를 따라잡는 비극적 속도
김수영은 해방되던 해에 『예술부락』지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했고 이후 해방기에 「아메리칸 타임지」, 「공자의 생활난」 등을 발표하지만 이 시들은 그 스스로도 부정하고 싶어했던, 당시의 부박한 모더니즘적 흐름 속에서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채 생산된 어설픈 자기 표백의 흔적들에 불과하다. 그의 시인으로서의 본격적 출발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체험을 통과한 이후에나 가능했다. 전후 50년대에 쓴 그의 시들은 전쟁 이후의 단절과 상실감에서 출발하여 점차 비극적 자기 고양을 통한 시대와의 속도 경쟁을 주제로 삼아 당시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정신적 극한 지점을 꿰뚫고 나가게 된다.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일까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달나라의 장난」 중에서
이 시는 비애를 말하고 있지만 그 비애는 생활의 비애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생활의 비애를 이기는 정신의 힘을 지켜 나가야 하는 자의 운명적 비애이다. 시인은 스스로 도는 팽이를 통해 그런 운명적 비애를 느끼고 운다. 여기서의 비애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운동적인 것이다. 이 움직이는 비애의 정서를 통해 시인은 일상적 삶으로부터 자기 갱신의 삶으로 비극적인 도약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그의 '비애의 전략'이다. 이처럼 일상의 비애로부터 현실을 따라잡는 비극적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속도가 필요하다.
길이 끝나기 전에는
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와 같이
나무에서 떨어진 새와 같이
적에게나 벗에게나 땅에게나
그리고 모든 것에서부터
나를 감추리
- 「더러운 향로」 중에서
시대를 앞질러 가는 속도는 "그림자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그것은 그가 나중에 내세운 "모든 창조 생활은 유동적인 것이고 발전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가 있다. 이것이 현대의 양심이다"(「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라는 그 특유의 모더니즘적 명제의 시적 증명이 된다. 이 주제는 이후 김수영 시의 핵심 주제로 무수한 시 속에서 변주된다. 「폭포」는 그 속도의 힘과 낙차를 잘 보여 주는 시이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 나태)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폭포」 중에서
이러한 현대성을 따라잡으려는 속도 감각과 함께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 그의 시는 혼자만의 고독한 투쟁을 넘어서 일상의 생활 세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나아가 동시대인들과의 '공동의 운명'을 생각하고, 이웃 사람들, 즉 민중의 현실을 인식하며, 마침내 자유를 이행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질타하는 정치적 수준의 인식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에 4·19혁명이 선취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사령(死靈)」 중에서
혁명과 풍자와 해탈
혁명은 김수영을 또 한 번 바꾸었다. 50년대 말까지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생활과 시의 모순, 세상의 허위와 예술가의 양심 사이의 모순을 이기고 이제 막 자기가 발 딛고 선 구체적 현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그에게 4·19는 하나의 혁명적 충격이었다. 그것은 그가 추구한 '현대'가 멀리 떨어진 세계적인 것, 문명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눈앞, 이 후진국 남한 땅에서 작열하고 있음을 보여 준 극적인 사건이었다.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푸른 하늘을」 중에서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 김수영에게 있어서 혁명은 정치·경제·사회적 프로그램이나 그 실천 주체의 문제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것, 즉 어떤 정신적 치열성의 역사적 총화인 것이다. '피의 냄새가 섞인 자유' 역시 그만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물리적 의미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치열함을 통과한 자유'라는 뜻으로 읽혀져야 한다. 이러한 근원적이고 순수한 치열함으로서의 자유와 고독은 김수영이 이미 50년대 내내 추구해 온 현실 초극의 논리와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50년대에는 개별자의 윤리였던 것이 이제 만인의 윤리로, 즉 혁명의 윤리로 새 이름을 얻었다는 점이며 이 점이 바로 50년대와 60년대의 김수영 사이를 흐르는 루비콘 강이다.
그러나 1961년의 군사 쿠데타는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1961년 5월부터 1968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엄숙하고 진지한 정언(定言)으로 가지 못하고 '풍자와 해탈'이라는 뒤틀린 우회의 길을 가야 했다. 이 풍자와 해탈의 선택은 1960년대 내내 그를 지배했던 절망과 자기소외, 자폐적 도피, 죽음에의 예속 등 고통스런 상태를 견디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풍자는 이같이 억압적인 세계에서 최소한의 자기 근거를 마련하려는 고육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계에 대해 우위를 갖지 못한 시정신은 그 풍자의 방향을 외부로 돌리지 못하고 공격적 자기 풍자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노력과는 무관한 소모적이고 소외된 방법이었다. 이 공격적 자기 풍자는 '적'에 관한 일련의 시에서 보듯 사회적 적대성이 소멸하고 그 자리에 대신 주관적 윤리의 강제가 들어서면서 시작되는데 일상성의 과장으로 위축된 소시민적 삶을 풍자하고, 위악적 정직성의 강조와 자기모멸과 자기 학대를 낳게 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중략)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이러한 풍자의 소모성에 대한 반성은 해탈의 방법을 선택하게 했다. 해탈은 두 방향으로 시도된다. 하나는 '역사 내적 해탈'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민족적 전통의 발견(「거대한 뿌리」), 역사의 계승성에 대한 인식(「현대식 교량」), '사랑'에 대한 메시아적 의미 부여(「사랑의 변주곡」) 등으로 나타나고, 또 하나는 초역사적인 '시적 해탈'인데 여기엔 현실의 훼손된 삶과 의식을 건강하고 화해로운 미적 구조물로서의 시의 창조를 통해 구원하고자 하는 그의 마지막 시적 노력이 담겨 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겪는 부대낌도, 시대와의 속도 경쟁도, 억압적 상황에 의한 고통도, 좌절과 소외와 그로 인한 공격적 자기 풍자도, 역사도 사랑도 없는, 한마디로 김수영을 김수영답게 만들어 온 삶과 세계에 대한 온갖 집착이 말끔히 사라진 순수한 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하고도 그것을 다 넘어서는 시의 세계를 이루려는 야심적인 노력이다. 그 결정물이 바로 그의 유작시 「풀」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풀」
이처럼 김수영이 1960년대 초반의 희망과 좌절을 거쳐 선택한 전략의 하나인 시적 해탈의 전략은 대상에 대한 원숙한 통찰에 의해 생애를 마감하기 직전에 이르러 상당한 수준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진정한 해탈에 도달했는가를 묻는 것은 이러한 일정한 시적 성취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그가 이 시적 해탈의 시도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적어도 자신이 오래도록 맞붙어 싸운 그의 시대, 즉 1950∼1960년대의 한반도 남쪽의 현실과 역사의 성격과 방향, 그리고 그 전망에 관한 깨달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싸움의 소모성과 허망함, 그러한 싸움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존재론적 숙명에 관한 깨달음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그 존재론적 숙명은 비관도 낙관도 아니고 민중의 운명으로 환원되는 한, 차라리 낙관 쪽에 가까운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시를 통해서만 확인 받을 수 있는 깨달음이다. 현실 속의 인간, 그 속에서는 피할 수 없이 산문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 속에서 이러한 깨달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문제는 이러한 시적 깨달음과 그에 근거한 해탈로는 전혀 해답을 얻을 수 없다. 그가 공격적 자기 풍자의 세계로 들어서고, 역사와 사랑을 발견하고,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에 도달하기에 이르는 이 1960년대의 시적 모색과 성취의 전 과정에는 그 초반의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 과정 속에서 얻은 심각한 충격과 좌절, 그리고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풀」이 보여 주는 휘황한 존재의 역동은 모두 이러한 현실적 절망과 자학과 도피에 빚지고 있는, 근원적으로 불안한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온몸으로 시를 쓴 모더니스트
김수영이 그리고 간 시와 정신의 자취는 1950∼60년대의 낙후된 삶과 시대를 극복하여 이를 '현대'라고 하는 그의 숨겨진 유토피아로 전면적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의 흔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기에 단지 한 사람의 어설픈 모더니스트에 불과했던 그는 전쟁의 참상을 밑바닥에서 겪으면서 낙후된 세계와의 필생의 투쟁에 나서게 되는데 1950년대는 그가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수준에서나마 시와 생활과 동시대인들을 함께 아울러서 '현대'를 추구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의 혁명과 반동과의 직접적 대면은 그에게 '현대'를 향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행의 가능성을 보여 주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도 명백하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한갓 시나 의식의 이행이 아닌 생활과 정치와 역사를 모두 포괄하는 전면적인 이행인데, 불행히도 김수영은 그러한 전면성을 감당할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전망을 가지지는 못했다. 이러한 주관적 열망과 객관적 한계의 압력 사이에서 그의 정신은 마멸되었고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풍자와 해탈이라는 그의 1960년대 시적 성취를 낳은 것이다.
근대가 낳은 식민지적 후진성과 근대가 낳은 끝없는 변화와 혁명에의 열망은 그러한 양면성을 낳은 근대 자체에 대한 냉정한 객관적 인식이 없이는 도저히 연관될 수가 없다. 그 매개로서의 근대에 대한 인식이 바로 역사의식이고 과학적 세계 인식일 터인데 김수영은 불행히도 그 인식을 얻을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한계야말로 그에게 늘 온몸에 의한 동시적 이행 혹은 초월이라는 극단의 시적 방법을 선택하게 하였고 그의 시대 극복을 위한 엄청난 주관적 가속도와 파란의 시적 모험을 낳은 숨은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아마도 김수영 시의 비밀일 것이다.
김수영은 모더니스트였다. 그러나 김수영의 모더니즘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온몸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의 모더니즘은 지적 관조의 산물이 아니라 시적 대상에 대한 투신의 산물이다. 그로부터 윤리적 급진성이 나오고 시의 즉물성과 속도가 나오고 시를 통한 '풍자와 해탈'이 나오는 것이다. 그에게 와서 비로소 모더니즘의 실험 정신이나 미학이 내용과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고 단순한 포즈(태도, attitude)에서 벗어나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견고한 시론은 나름대로 이러한 성취의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이 점만으로도 한국 모더니즘의 '한국적' 기초를 분해하고 그 경계를 허물어 모더니즘 시가 아닌 '시적인 것' 일반의 경지로 올라설 수 있었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한국 현대 시를 순수와 참여로 나누는 것이 바람직한가?
김수영 자신이 1960년대 말 이어령 등과 더불어 '순수-참여 논쟁'의 당사자였지만, 시에는 진짜-가짜가 있을 뿐 '순수-참여'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김수영의 입장이었다. 즉 제대로 된 시는 목소리 높여서 현실을 담아내지 않더라도 본질적으로 기성의 질서를 위협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시적일수록 참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김수영 시론의 핵심이자 현대 시론의 기초인데, 50~60년대에는 냉전적 사회 현실 때문에 현실 비판적 시를 쓰는 것이 곤란했고 70~80년대에는 반대로 현실 비판이 과도해졌던 한국 사회의 현실적 조건 속에서 이러한 상식이 왜곡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김수영의 시 세계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현대 시에서 순수-참여를 따로 논하는 것이 얼마나 시의 본원적인 순수-참여성을 몰각한 무지한 논리인가를 깨닫게 된다.
2. 김수영은 모더니스트인가, 민중 시인인가?
이는 김수영이 죽은 이후에 김수영의 영향을 받은 후배 문인들 중에서 모더니즘에 가까운 사람들이 김수영의 모더니스트적 성격을 부각시켰고, 반면 리얼리즘이나 민족·민중문학론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김수영의 반체제적 민중적 성격을 부각시킴으로써 김수영 사후 4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김수영은 4·19혁명에 열광하고 그 이후 민중의 존재나 민족적 전통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영미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급진적 자유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일부를 받아들인 모더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단지 언어 의식에 집착하는 좁은 의미의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예리한 정치·사회 의식과 언어 의식을 고루 갖춘 보다 넓은 의미의 급진적 모더니스트라고 보는 것이 옳다.
3. 김수영은 '신화화'되었는가?
김수영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논의가 있다. 시인으로서 김수영의 작품들이 한국어의 세련화에 기여했다거나 탁월한 조탁과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며, 그런 점에서 서정주나 박목월 등에 못 미치는 점이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김수영의 시 세계가 후대의 문인이나 지식인들에게 여전히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형식적인 완성도나 언어의 세련성의 문제를 훨씬 넘어선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의 시는 여전히 주어진 세계에 만족하지 않는 모든 혁명적인 정신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치열한 내면의 투쟁과 혁명을 먼저 요구하는가를 깨우쳐 주는 살아 있는 표본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신화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신화는 이제는 극복되어야 할 신화가 아니라, 아직도 제대로 극복되지 못한 신화이다. 그의 신화가 끝나는 지점은 한국 사회가 제대로 된 근대성을 성취하는 그 순간일 것이다.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2235&cid=263&categoryId=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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