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선서/ 김종해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시詩이며, 거짓말 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 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 시집『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문학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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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11월 1일이 제27회 ‘시의 날’이었다. 서울에서는 1일부터 7일까지 시민과 함께 다채로운 시 축제행사가 열렸고, ‘시의 도시 서울’ 선포식에는 박원순 서울시장도 참여했다. 지난 2일과 3일 양일간 대구에서도 김범일 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의 시인들이 모여 매년 한 차례 지방도시를 순회하며 갖는 시인협회 정기 세미나를 가졌다. 이 시는 김종해 시인이 200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있을 당시 시의 날에 다시 발표한 ‘시인선서’의 내용이다. 치열한 시인정신과 장인의식 없이 겉멋만으로 시를 쓰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라며 시인이 지녀야 할 역사인식과 고결한 시대적 사명감을 주문하고 있다. 지난날 시인은 한 시대와 사회의 지식인이며 선각자였으며 진실을 증언하는 대변자였다. 그러자면 현실을 보는 정확하고 균형 잡힌 시각과 뚜렷한 신념, 가치관과 세계관이 구비되어야함은 지당한 노릇이다. 그런 다음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에 눌려 핍박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아야’ 할 용기를 지닌 자가 시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모름지기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국이나 현상에 대해 꼭 말이 필요할 때는 용기 있는 발언을 주저치 말아야 할 것이다. 애석해하거나 어이없어 하면서 그냥 그러려니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할 직분이 시인에겐 주어졌기 때문이다. 최근 우려할만한 일련의 정치적 징후들을 보면서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진 않지만, 당신의 입에 재갈물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함께 싸우겠다”고 한 볼테르의 명언을 환기한다.
또한 안도현 시인 일부 유죄판결, 오늘 오전 이것에 반대하는 원로문인들의 기자회견도 있었지만 ‘문학나눔사업 폐지’ 등 문학인으로서도 입을 닫아걸고 있을 수만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말과 글과 생각이 처벌되고 핍박받을 수 있다면 그 사회의 수준은 18세기 볼테르가 저항하고 비판했던 그 시대적 가치도 못 쫓아가는 사회가 아닌가. 드골정권으로서는 눈엣가시였던 사르트르를 지지자들의 처형요구에도 불구하고 결국 드골은 사르트르를 지켰고, 프랑스는 둘 모두를 역사 속의 승자로 기억할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구의 맹우여야 하는가.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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