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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편지지 하얀 연필 - 김중일

moon향 2016. 8. 19. 20:45

 

까만 편지지 하얀 연필  -  김중일

 

 

 

달의 뒤편으로는 한 자루 푸른 칼날의 우주가 버티고 있는 건 아시겠죠. 먼 달 속에 부러진 연필을 넣고 뾰족하게 돌려 깎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씁니다.

어젯밤에 우리 만나기로 했잖아요 그곳 하늘은 여전히 새파랗지요 혀끝에서 녹아 사라지고 있는 캔디 같은 낮달도 하루를 먼저 사는데 죄송합니다 또 이상한 소리를 저도 잘 알고 있지만, 제가 알고 있는 걸까요 오늘 밤에도 한쪽 가슴을 열고 젖을 빨고 있는 작은 박쥐 한 마리를 꺼냈어요 제 품을 떠난 박쥐들은 검은 사이프러스 숲을 건너며 찢긴 검은 벨벳 스커트처럼 당신의 허리에 걸려 있어요 달리던 차의 창이 열리더니 팔 하나가 쑥 빠져나와 무언가를 버렸어요 아기의 신발 같았어요 작고 까만 생쥐 같은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인파 속으로 숨었답니다 그리고 지하도를 건너면서 보았어요 부랑자들이 저녁으로, 자신의 손 그림자를 스테이크 썰 듯 우아하게 음미하며 잘라먹고 있는 것을요 그리고 보았어요 두 손을 다 비우고, 두 손을 다 잃고 그들이 꽁초를 피오며 톺아 뱉은 가래침이 비좁은 지하도의 한 모퉁이에서 한 모퉁이로 아름답고도 경쾌한 포물선을 그리다가 돌연 작고 하얀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요 불면증 환자의 낡은 옷장, 몽유병 환자의 커다란 신발장이 저희 집 앞에는 버려져 있어요 오늘도 불면증과 몽유병은 집안에서 따뜻하게 잠들어 있답니다 마당의 수양버들은 침수한 수급 같은 우리집을 한 손에 거머쥐고 어기적거리며 천천히 마을을 버립니다 버리고 버리려고 다짐하다가 이 편지는 무정한 수양버들 그 무수한 가지 중 한 가지에 빨간 머리핀처럼 매달아놓았으니 꼭 받으세요 그나저나 어젯밤에 만나기로 한 우리의 약속은 언제쯤 지켜질 수 있을까요 엄청나게 시퍼런 해가 아직도 지지 않고 떠 있는데, 라고 씁니다. 그리고 구겨버립니다.

 



아무튼 씨 미안해요, 김중일, 창비, 2012,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