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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을 먹었다 - 유형진

moon향 2014. 12. 11. 14:45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 유형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겨울이면 나타나는 별자리 이름의 제과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질 나쁜 노란색의 누가코팅 속에는 비누 거품같이 하얀 마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달콤하고 옅은 바나나 향이 혀에 자꾸 들러붙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짝짝이 단화를 신고 다녔다
연탄불에 말려 신던 단화는 미세한 차이로 색이 달랐다
아이보리와 흰색의, 저만치 앞에서 보면 짝짝이라고 할수도 없는 그런 단화
아이보리색의 오른쪽 신발은 유한락스에 며칠이고 담가놓아도 여전히 그런 색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우물이 제일 무서웠다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꿈을 날마다 꾸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고 아이를 낳은 엄마는 절에 들어가 공양보살이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우물엔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가득 찼고
눈동자가 망가진 인형의 손이 우물에서 비어져 나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길가의 망초꽃은 늘 모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나는 하얀 버짐 핀 얼굴을 하고서 계란 프라이 같은 꽃봉오리를 따다가 토끼에게 간식으로 주었따
토끼의 집 위로는 먼 산이 흐릿했고 토끼 눈 같은 해가 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봄은 할아버지 같았다
해소천식을 몇 십 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방에 창호지는 봄만 되면 노랗게 노랗게---
개나리나 산수유꽃도 그렇게만 보였다
할아버지는 봄만 되면 더욱 노란 가래를 뱉어내었고 할아버지의 타구를 비울 때는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월 하늘의 뿌연 바람은 아라비아의 왕이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모든 사막은 아라비아에서 시작해 내가 사는 마을로 왔다
언젠간 나도 모래구덩이의 낙타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도록 리코더를 불고 싶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어두운 방의 하얀 테두리를 좋아하였다
문을 닫으면 깜깜한 방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테두리,
창이 없는 그 방은 구판장집을 지나 아즘재 너머 큰집의 건넌방이었는데 늘 비어 있었다
할머니의 오래된 옷장과 검은 바탕에 야자수가 수놓아진 액자와 인켈 오디어가 있는 방이었다
그 방에서 나는 라일락이 피던 중간고사 때 양희은의 <작은 연못>과 들국화의 <행진>을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안개꽃은 너무나 슬퍼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늘한 피부의 여인이 그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가의 이슬 같고 청상과부의 한숨 같아서
보기만 해도 가슴에 안개가 피어났다
그즈음 주말의 명화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황야의 무법자>를 했고
늦게 일어난 일요일 아침, 하얀 요에 묻은 초경의 피를 보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별자리 이름의 바나나파이를 먹었는데
이제 바나나파이 같은 건 어디서도 팔지 않고 검게 변한 바나나는 할인매장에 쌓여만 간다
나는 이제 노을색 눈을 가진 토끼는 키우지도 않고 혼자 오는 저녁 길은 아직도 쓸쓸하다
여전히 사월엔 노란 바람이 불어오지만 아라비아 왕 같은 건 시뮬레이션 게임에나 나오는 캐릭터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죽음 같은 건 리코더 연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의 詩, 신이현의 소설 제목

 

 

시집 <피터래빗 저격사건> 중에서

 

 

초코파이라고 하면 광고라고 할까 봐

바나나파이로 바꿨나? 엄청 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뭘 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