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 詩.....♡/ 백 석 & 형 도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김경주

moon향 2015. 8. 19. 18:10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잠풍 : 잔잔한 바람

달재 : '달강어'의 방언'

진장 : 진간장의 준말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길을 걷는 것은

 

                            - 김경주 (백석의 시 제목에서 변용.)

 

지붕 위에 던져놓은 눈부신 어금니들이 아직

그곳에 있기 때문이고 봄이면 어김없이 돌아와

내 이마 위 아지랑이를 핥는 철새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길을 걷는 것은

 

당신에겐 사소해 보이는 중얼거림이 밤마다

청둥오리처럼 내 몸 밖으로 날아오르기 때문이다

저녁 새 떼의 배 아래를 흐르는 바람을 보면

내 눈동자에도 한없이 다정하게 살이 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길을 걷는 것은

 

당신의 숨 속으로 들어가야만 보이는 밤하늘을

내가 아직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사사로움으로

눈이 내리고 한없이 절벽이 파래지고 풀들이 쓸쓸히

옆구리를 흔들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길을 걷는 것은

 

한쪽 젖이 잘린 채 당신이 빈 수저를 물고 종일

마루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발이 삔 채 숲에 주저앉아 있는 사슴의

차가운 숨소리를 어느 문장에서 떠올리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길을 멈추는 것은

 

슬픔은 언제나 가지런한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외로워지기에는 너무도 붐비기 좋은

세계다 독한 놈들은 맨 아래층에 산다

 

우리에게 안식이 있다면 그런 의지일 것이다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