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에 불타다
“내 말이 신선하려면 고독과 침묵이 필요”
작은 것들에 황홀한 눈길을 보내는 시인은 큰 것들 앞에선 마냥 조심스럽다.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고희를 넘어서도 망설이고 주저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은 시인 정현종씨(77)가 7년 만에 신작 시집 <그림자에 불타다>(문학과지성사)를 내놨다. 칠순이 지나 쓴 시들로만 열번째 시집을 엮어낸 것이다.
더불어 1987년부터 30여년간 쓴 에세이, 강연록, 편지 등 글 39편을 묶은 산문집 <두터운 삶을 향하여>(문학과지성사)도 함께 펴냈다. 절반 이상이 10년 이상 묵은 글들이지만 그 향기는 변질되지 않고 신선하다.
사진 김영민 기자
느림, 수줍음, 침묵, 고요함. 시인이 지키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이 느림은,/ ‘진짜’에 이르기 어려워/ 그건 정말 어려워/ 미루고 망설이는 모습인데/ 앎과 느낌과 표정이/ 얼마나 진짜인지에 민감할수록/ 더더욱 느려지는 이 느림은……”(‘이 느림은’ 전문). “순간에서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협곡이 있고/ 산맥이 있다.”(‘그 사이에’ 중). 산문집에 실린 글 ‘마음의 자연: 자연, 시, 앎’에도 수줍음에 대한 예찬이 나온다. “(…)말의 힘과 침묵의 힘 사이에서 수줍음은 떠오르며 행동의 힘과 무위(無爲)의 힘 사이에서 또한 수줍음은 떠오른다―마치 그것들이 갖고 있는 결핍을 채우듯이…….”
시인은 “왜 늘 조심스럽냐, 그런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사람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인간이 비이성적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떤 생각이나 말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예로 진실, 정의 같은 게 어떤 것인지 따져보려면 일생을 따져도 알기 힘들어요. 자기 이름에 대해서도 부끄럽고 수줍고, 그래서 나서기가 어렵고 그런 거지. 자기 직함과 명예에 값하며 사는 이가 얼마나 되겠어요, 모두가 자기 자리를 부끄러워해야 해요.”
시인은 언젠가 ‘다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기리는 노래’를 하나 쓰고 싶다고 했다. “자기의 최상의 말 앞에서는 스스로를 걸어 잠그고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말은 신선해져야 하니까요. 그게 세계의 비밀입니다.” 최근 그가 즐겁게 읽어 시집 끝에 덧붙인 산문에도 인용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 편지의 한 대목이다. 그는 “새로 태어난 말보다 더 신선한 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말, 미래의 말. 그러니까 내 말이 신선하려면 고독이라는 오크통과 침묵이라는 효모가 필요합니다”라며 “서둘러 하는 말과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하는 말, 정신없는 다변은 흔히 오류와 어리석은 제한을 확산시키게 되겠지요”라고 적었다.
침묵하고 저어하는 대신 시인은 세상의 작은 것들에서 생동하는 신비를 본다. “나이가 든다고 감동과 감수성은 무뎌지지 않아요. 사람이 갖고 태어난 것, 그게 자연이지요. 저절로 그렇게 (시인이) 된 것이죠.” 어린 시절 뒷산에 솟아나던 샘물은 여전히 그의 동공 속에서, 마음에서 샘솟고(‘샘을 기리는 노래’), 바흐·베토벤·모차르트를 사랑하는 시인은 ‘음악’ 그 두 자만 발음해도 몸이 붕 떠오르며(‘음악에게’), 머리 위에 산새가 앉아 쪼아대는 건 은총이다(‘새의 은총’).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마악 피어나려고 하는/ 꽃송이,/ 그 위에 앉아 있는 지금,/ 공기 중에 열이 가득합니다,/ 마악 피어나려는 시간의/ 열,/ 꽃송이 한가운데,/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전문)
이런 것들에 감탄할 수 있는 여리고 애틋하고 선량한 마음을 세상에서 자주 만나기를 시인은 희구한다.
“어떻든 애틋함이라는 감정에는 그것이 그리움이든 추억이든 슬픔이든 또는 정다움이든 대상을 향해서 움직이는 간곡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애틋함이야말로 무상(無償)의 감정이라 할 때, 그것은 시의 이상과 일치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산문 ‘애틋한 마음’ 중)
오전 6시에 일어나 아침을 차려 먹고 책을 읽다가 매일 집 앞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으로 산책 나가는 게 시인의 일상이다. 글은 쓰고 싶을 때만 쓴다. 친구들, 제자와 밥 먹고 술 마시는 재미도 여전하다. “누군가 경복궁에서 잠옷 입고 칫솔 들고 사진을 찍고서 외국인들에게 여기가 내 집이라고 했다더군요. 나도 박물관 정원에서 잠옷 입고 칫솔질 하는 사진 찍어서 이게 내 정원이라고 해볼까 싶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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