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수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황홀한 잠이여!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비에 적힌 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학교 시절 철없이 이 시인에게 빠졌던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장미 가시에 손가락이 찔려 패혈병으로 죽었다는 그 죽음도, 어찌나 낭만적이고 시인답게 느껴지던지. 나중에야 직접적인 사인은 그것이 아니라 백혈병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라는 건 정말일 것 같다. 어느 날 우연히 내게 와서 나로 하여금 쓰게 하는 그런 영감. 시인의 그런 천부적인 감수성과 영감은 정말 타고나는 것일까? 다른 글과 달리 유독 시에서는 그런 것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시가 내게 다가오는 것도 때가 있는 것 같다. 어쩔 땐 유독 마음 아프게 공감이 되는데, 어떨 땐 또 아무리 정독을 해도 가슴에 와박히지가 않는다. 그래서 시가 참 어려운 거 같다.
굉장히 여성적이고 섬세한 느낌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린 시절 엄마가 딸처럼 키웠다던데. 그래서일까, 문체에서도 소녀적인 감성이 물씬 느껴진다. 자주 등장하는 시어 중 하나가 '소녀, 장미' 등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 그렇게 좋아하던 장미 가시에 찔리게 되다니. 묘비에도 릴케는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라는 시구를 새겼다고 한다. 정말 장미의 시인이라 불릴만한.
초기 그의 시를 읽으면 참 따뜻한 시선의 삶에 대한 직관이 느껴진다. 소녀같이 맑고, 순수하면서도 섬세한 동경. 그러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고독과 종교적인 신심이 더욱 절절히 느껴지는 듯 하다. 무언가 더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느낌이랄까. 외면에서 더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듯한.
내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는 첫 시집에 수록된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의 1연이다. 굉장히 감성적인 설레임과 통찰력이 엿보인다.
햇살처럼 꽃보라처럼
기도처럼 왔는가.
그리고 감탄해 마지 않는 시는 형상시집에 실린, 너무도 유명한 '고독'과 '가을'이 되겠다.
고독은 비와 같다.
저녁을 향해 바다에서 올라와
멀리 떨어진 평야에서
언제나 적적한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비로소 도시 위에 떨어진다.
밤도 낮도 아닌 시간에 비는 내린다.
모든 골목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체와 육체가
실망하고 슬프게 헤어져 갈 때,
그리고 시새우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침대에서 잠자야 할 때,
그때 고독은 강물 되어 흐른다......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선 듯 잎이 진다.
하늘의 먼 정원들이 시들어 버린 듯.
부정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깊은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다른 별들에서 떨어져 고독에 잠긴다.
우리들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이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
(* 책에는 '덜어진다'라고 오타가... ㅠㅠ 무한 아쉬움 ㅜㅜ)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 낙하를
한없이 너그러이 두 손에 받아들인다.
고독에서는 정말 적막한 도시의 풍경과 어쩔 수 없는 심오한 근원의 삶을 담담히 형상화 하고 있다면, 가을에서는 보다 따뜻하고 포용적인 시각, 희망을 엿볼 수 있달까. '고독'의 경우 예전에 봤던 시와 번역이 조금 달랐다. 예전에는 아마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의 침대에서 잠자야 할때 뭐 그랬던 것 같다. 시어의 번역 작업은 참 어렵지 않을까 새삼 또 혼자 속으로 쫑알쫑알. ㅎㅎ
'가을날'도 유명한 시 중 하나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가을'이 더 좋다. 가을은 정말 마지막 연을 읽으며 혼자 완전 탄복했었던. 그 한사람은 누구일까, 신일까, 아니면 삶 자체일까. 결국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 한 사람의 존재. 그래서 삶은 살아지는, 살만한 것일까.
릴케의 시대별 시집 네 권을 하나로 묶어 출간된 <릴케 시집>, 오랫만에 읽으니 더욱 반갑기 그지 없다. 마치 그 중학교 시절, 시집 한 권을 손에 들고 문학소녀라도 된 듯 교정을 오가던 그 때의 나도 함께 만난 기분. ^^
"당신의 일상이 비록 빈약하게 보일지라도 그걸 탓하지 말고 당신 자신을 탓하십시오. 즉 훌륭한 시인이 못되어 그 일상의 풍요로움을 불러낼수 없음을 자책하십시오. 창조하는 자에게는 가난이 없으며, 그냥 지나쳐 버려도 좋을 빈약한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항상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이유가 많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재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못하는 이유를 찾으려면 한도 끝도 없겠지요. 하지만, 그런 이유들을 찾은이 또한 자신임을 깨달아야 할것입니다. 다른이가 알려주는 것이 아닌..
왜냐면, 자신이 그것을 할수 있는 이유 또한 그많큼 많으니까요... "그냥 지나쳐 버려도 좋을 빈약한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내주변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준 소중한구절이었구요.
무엇보다 여자친구를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죽은 릴케의 마지막 모습이 저에게는 제가 맞이하고 싶은 로맨틱한 마지막 모습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책은 릴케가 자신이 사랑한 여인, 주위의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가끔은 따분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구절구절에 숨어있는 매혹적인 문장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책입니다. 서로 다른 출판사들이 여러 번역가들을 통해 번역을 하여서 조금은 다른 해석의 차이에 의한 묘한 차이를 느껴보는것도 재미가 있구요. 특히, 자신이 시나 글을 쓰시려는 분들에게는 필독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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