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하루
사라 키르쉬
- 심보선
열두 시 정각에 푸슈킨의 등에서 분수가 켜졌다
나는 햇볕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참새와 비둘기들
그리고 마침 목욕을 끝낸 그 밖의 노래새들이
나무 속으로 내던져졌다 내 곁에서 검은 외투를 입은 한 농부가
아주 진지하게 긴 시구를 읽었다 한 할머니가
광장을 넘어 젖먹이를 업고 왔다 키가 좀 큰 사람들이
와서 얘기를 하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집에서 하듯
그렇게 스스럼없기에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내가
아는 자는 나뿐 그것으론 너무 수가 적었다 거기 나는
나와 함께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중간에 나, 내 오른 쪽에 나
그리고 왼쪽에도, 모두가 비었고 점해 있었다 그때 결심했다
나는 나와 얘기하지 않기로, 전혀
슬프지 않았고 너를
원하지도 않았다 나는
오로지 앉아 있었고 태양은
임의의 도시 풀밭 플라타너스를 비추듯 나를 비췄다 분수들은
모두 분명 취해 있었다 바람 속에
흔들렸다 분수처럼
심보선 시인의 시집을 읽다 보니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꼭 울게 된다”는 문장이 나오는군요. 여행을 가게 되면 왜 울게 될까요? 떠나기만 하면 꼭 슬픈 사건이 벌어지거나 슬픈 감정이 몰려들어서는 아닐 겁니다. 일상의 공간인 이곳에서 우리는 잘 울지 않습니다. 슬픈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보는 눈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상심할 까봐, 아이들이 놀랄 까봐, 혹은 친구들이 염려할 까봐 울지 않아요.
시인은 모스크바에 잠시 와 있습니다. 공원의 햇빛도 좋고 새들은 목욕 후에 나무 속에 던져진 듯 청량하게 노래를 부릅니다. 풍경은 평온하지만 들리는 말들은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고 아는 사람이라곤 나 자신뿐이라 적막합니다. 태양조차 무신경하게 빛나고 있군요. 아, 정말 혼자입니다. 슬프지 않았다고 자꾸 우기는데 시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 하루가 부러운 건 왜죠? 모든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멋대로 울거나 쓸쓸해하거나 취할 순간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하루는.
- 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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