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파’들의 ‘다른 서정’
- 권혁웅, 이장욱의 시론에 대한 비판
하상일(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 시의 미래와 소통부재의 현실
시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갈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선언과 함께 일군의 시인들이 떼를 지어 등장했다. 그들은 이전 세대의 낡은 관습과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고, 언어와 사물의 경계를 허물고, 환상과 현실 사이로 난 미궁 속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그들이 들고 나온 캐치프레이즈는 ‘다른 서정’이고, 그들을 일컬어 ‘미래파’라고 부른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으로 획일화된 서정의 본질과 상투화된 기억과 자연에 갇힌 전통 서정의 관습은, 그들에게는 모두 시대착오적인 시적 발상과 태도로 인식될 뿐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그들은 지금 기존 시학의 전통과는 ‘다름’을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차이’의 정치학을 통해 또 다른 시적 권위를 형성하고 있다. 언어가 다르고 기법이 다르고 대상이 다르고 서술이 다른, 그래서 어떠한 시적 관습과 전통적 권위로도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시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시적 지향은 ‘유사(resemblance)’가 아닌 ‘상사(similitude)’의 놀이들이므로 사물들 사이에 선후나 우열의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권혁웅, 「상사(相似)의 놀이들」, ?�미래파?�, 문학과지성사, 2005, p.127.(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제목과 페이지만 밝힐 것임)
따라서 전대의 어떠한 미학적 압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그들만의 주체를 형성함으로써, 그들만의 어법으로 그들만의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를 해독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들의 세계로 편입될 수 없다. 그들이 새롭게 구축한 시의 미래는 너무도 개인적인 주관성의 세계이므로 공동체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애늙은이나 왕따로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그들의 언어는 이제 막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규범으로 작용함으로써, 지금 우리 시단은 낡은 관습과 어법을 지닌 시인들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너무도 폐쇄적이고 편향된 시의 왕국이 건설되고 있는 형국이다.
어디까지나 미래는 열려 있을 때 그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틀을 선험적으로 강요하거나 결정한 상태에서 이를 맹목적으로 따라야 한다거나, 기존의 가치가 낡았으므로 무조건 이를 갱신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논리는 오히려 더욱 많은 균열과 파벌을 조장할 뿐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앞을 향해 무한히 열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지혜도 갖추어야 한다. 앞과 뒤가 진정으로 소통하는 최소한의 과정마저 가로막아 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미래를 열어 가는 생산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없다. ‘다름’ 혹은 ‘새로움’은 항상 전통을 수용하면서 배반하는 이중의 전략을 구사하는 갱신의 징후가 되어야 한다. 또 다른 ‘다름’과 ‘새로움’이 나타나면 어쩔 수 없이 소멸하게 되는 일회적인 유행이나 포즈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름’과 ‘새로움’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같음’과 ‘낡음’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 역설적 태도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러한 역설의 정신이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한 가운데에서 세대적 갈등과 문화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우리 시의 공감대를 넓히고 진정으로 소통의 장을 여는 가장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적 지향은 전통으로의 회귀나 복고적 양식으로 귀결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감각과 정서로 우리들의 삶의 중심을 관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부재의 현실을 가로지르는 진정한 ‘시의 미래’이다. 지금 우리 시단은 소통불능의 언어를 무차별적으로 나열하는 괴물들의 외계어가 점점 더 주관적인 개인성의 함정을 깊숙이 파고들어 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언어를 해독하는 과정은 무수히 많은 함정들에서 허우적대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이토록 ‘어렵고 힘든’ 해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더 이상 시와의 소통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시인들조차 어떠한 독자도 상정하지 않는 자족적인 세계에 안주함으로써 시인과 독자의 관계는 단절적 관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시의 미래는 도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언어놀이에 너무나 즐겁게 참여하고 정교하고 논리적인 해석까지 늘어놓는 비평가들이 있어 정말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다. 기본적인 해독조차 불가능한 시들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필자와는 다르게, 몇몇 비평가들은 그들의 시가 너무나 “재미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들은 시와 비평을 겸하는 양수겸장의 능력을 갖고 있어서, 비평가로만 살아가는 필자와 같은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시안(詩眼)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이 보기에 이 글은 그들의 비평적 해석과정을 그저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시대착오적 비평가의 ‘또 다른 비평’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2. ‘미래파’들의 유희성과 자폐성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오래된 서정의 관습을 송두리째 허무는 새로운 시와 시인들이 무수히 많이 등장했다. 이들의 시를 일컬어 ‘환상성’, ‘시적인 것’, ‘외계어’, ‘다른 서정’ 등의 시적 개념이 새롭게 명명되면서 지금 우리 시단은 서정의 권위을 넘어서는 또 다른 권위를 수용해야 하는 난관에 부닥치고 말았다. ‘서정’의 개념을 둘러싼 오랜 논란 끝에 “시의 정의는 오류의 역사다”라는 말까지 있는 마당에 또 다시 서정의 본질과 개념에 대한 혼란스러운 주장을 늘어놓는, 그것도 굳이 ‘다른 서정’이라는 식의 어정쩡한 개념으로 강변하는 젊은 비평가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게다가 이들의 새로운 시적 세계관을 암묵적으로 추종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우리 시단에 주목받는 신인으로 등장하기 어려울 거라는 인식이 새로운 시인을 꿈꾸는 예비 시인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가고 있는 듯하다. 즉 시의 미래 혹은 시인으로서의 미래를 꿈꾸는 자들은 지금 소위 ‘미래파’들의 발상과 어법, 그리고 감각과 놀이에 즐겁게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미래파’, 이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가? 한 동안 우리 시단은 이러한 매력 앞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될 것 같다. 낡고 오래된 관습에 식상한 젊은 세대들에게 그들의 새로운 시는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는 ‘유희’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또한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지는 자세를 ‘도덕’적으로 강요해온 무거운 제도의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가벼운 개인의 ‘윤리’를 창출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자기만의 견고한 성에서 한껏 자유를 누리는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의 시적 현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체와 타자의 소통을 외면한 채 새로운 주체의 형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진정 낡고 고루한 주체를 넘어서는 위반의 전략이 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미래파’들의 ‘미래’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들의 시는 대체로 일회적인(요즘 학생들에게 그들의 시는 상당히 재미있는 독서경험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덧붙여 말하는 공통적인 말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그들의 시가 재미있긴 하지만 다시 읽고 싶은 시는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유희성’과 타자와의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는(최근 많은 평론가들과 요즘 우리 시의 경향에 대해 이런저런 진지한 논의들을 했었는데, 상당수의 평론가들이 시를 읽는 전문독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에 대해 도대체 기본적인 해독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고 솔직한 심정을 틀어놓았다) ‘자폐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권혁웅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는 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를 읽어내지 못한 비평” 권혁웅, 「미래파」, p.148.
의 문제라고 한다. 정말 비평가의 무지와 무능이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일까? 우선, 비평가인 필자 개인의 무능만큼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근 우리 시의 모습이 일반 독자들에게 마치 ‘암호’나 ‘부호’와 같은 ‘외계어’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닌가? 결국 그들의 시는 ‘그들만의 미래’를 사유하고 꿈꾸고 있을 따름이다. 다가올 미래는 그런 모습일거라고 되풀이해서 말한다면 더 이상 논평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필자는 미래를 준비하는 지금이야말로 주체와 타자의 진정한 소통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감각이 더욱 절실하다는 오래된 미래의 가치를 오히려 존중하고 싶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내면의 감각과 시대의 유행을 초월하는 진정으로 새로운 주체의 자리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을 향해 쏟아지는 비판의 요지는 “요령부득의 장광설”과 “경박한 유희의 산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권혁웅은, “달리는 말의 다리는 네 개가 아니라 스무 개”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 눈에 보이는 잔상(殘像)이 사실은, 중첩된 면(面)들이 내보이는 실상(實像)”이라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다. 이는 “최근 시의 ‘특별한’ 형상들을 형상의 왜곡”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최근 시들은 진리로 간주되어온 항구적인 시의 전통을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래파’들의 시적 경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미래파」, pp.148~149.
모든 것이 그러하듯 시 역시 고정적 진리에 함몰되거나 갇혀서는 안 되고, 현실의 리얼리티를 맹목적 평가기준으로 삼는 것 자체도 지나치게 폭력적인 시적 평가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비판과 실험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김수이의 말대로 지금 “서정시는 다른/다양한/새로운 서정을 향해 진화(進化)하는 중” 김수이, 「시, 서정이 진화(進化/鎭火)하는 현장」, ?�문예중앙?� 2006년 여름호, p.14.
에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진화의 과정이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모든 제도와 문법이 그러하듯, 반드시 지켜야만 하고 따라야만 하는 기계적 방식의 답습을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젊은 세대들의 의식은, 이성적 논리를 지나치게 거부한 나머지 과잉된 감정을 감각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건 아닌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것 같다. 또한 이러한 감각이 지나치게 주관화되어 최소한의 기호적 합의마저 무너뜨리는 소통불능의 외계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경직된 시적 질서의 재편과 새로운 상징체계의 구축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시적 담론이란 말인가? 이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평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것이 감각의 논리를 재구하는 길”이므로 “새로운 감각의 출현”을 보이는 “미래파”에 자신의 “비평의 미래를 투자하고 싶다” 「책머리에」, pp.8~9.
라고 선언한 권혁웅의 야심찬 생각을 좀 더 따라가 보아야 할 것 같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은 중언부언을 중요한 발화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단형의 틀에 우겨넣기에는 시의 전언이 너무 풍부하다. 그들은 음악을 위해서 전언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풍요롭다. 그들은 여러 화자를 무대에 올린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은 존재론적인 통찰에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되었다. 추(醜)와 불협화음은 처음부터 미(美)의 범주였다 …… 미적 형질의 변화를 그들은 비평이 정식화하기에 앞서 실현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중략)
이들에게는 1980년대 시인들이 걸머져야 했던 역사와 시대에 대한 채무의식이 없고, 1990년대 시인들이 내세운 그럴듯한 서정, 고만고만한 서정이 없다. 그 대신에 다른 게 있다. 그리고 이들의 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재미있다. 「미래파」, pp.149~150.
권혁웅은 “주류 시학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그래서 기존 시의 독법으로는 잘 파악되지 않는 시적 기술론”은 ‘감각’을 재발견하는 데서 성취될 수 있다고 보았다. '미래파‘들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시학이 온전히 포괄하기 어려운 새로운 발성법”에 맞추어 “새로운 시학 이론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시는 무엇보다도 감각의 소산”이므로 ’미래파‘의 시는 “감각의 운용 방식에 따라 독해되어야 한다” 권혁웅, 「미래형 시로의 여행을 위한 히치하이킹 안내서」, ?�문학들?� 2006년 봄호, pp.28~29.
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필자는 상당 부분 동의하고 있음을 먼저 밝혀 둔다. 다만 그의 논법이 기존의 시관에 맞서는 새로운 시관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경직되어 독단의 방식으로 읽혀지기도 한다는 점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주장이 이분법적 독단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인용문을 뒤집어 읽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즉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존 시가 단형이 많은 것은 전언이 풍부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시의 음악성에 치중한 나머지 전언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미지가 풍요롭지 못하며, 단수화자에 의존하고 있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에 집착하여 존재론적인 통찰을 하지 못했다고 정리된다. 물론 기존의 시관습에 이러한 측면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도양단의 어법으로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주체를 세우려는 방식은 온당하지 못하다. 지금 우리 시는 분명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변화된 사회를 새롭게 담아내는 갱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감각‘에만 의존하고 ’내면‘의 경로만을 중요시하는 ’언어‘적 수사학으로 장식되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역사와 시대에 대한 채무의식”도 있어야 하고, “그럴듯한 서정, 고만고만한 서정”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논법은 ’미래파‘의 새로움을 과장하려는 과잉된 수사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소통불가능의 시어와 구조에 전전긍긍하는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유희성과 자폐성이야말로 가장 주체적인 발화의 방식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독자들 역시 그들의 “재미”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권혁웅은 이러한 ‘미래파’의 발화 방식에 “불행한 서정시” 권혁웅, 「행복한 서정시, 불행한 서정시」, ?�문예중앙?� 2006년 여름호, p.45.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의 명명 행위 역시, 스스로 비판하기도 했던, ‘분석’과 ‘해석’ 대신에 ‘분류’와 ‘정의’를 앞세우는 우리 시단의 문제점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그가 ‘미래파’들의 시적 경향을 굳이 ‘서정시’의 범주로 귀속시키려 하는 것은 ‘구별짓기’를 통해 획득되는 새로운 권위의 창출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모든 문학사의 흐름은 ‘정전’에 대한 ‘변종’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페쇠의 담론분석에 따르면, 거기에는 ‘동일화’, ‘반(反)동일화’, ‘비(非)동일화’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이를 ‘서정시’에 적용한다면, ‘미래파’들의 시적 경향은 ‘반서정’ 혹은 ‘비서정’의 범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다 권혁웅의 논리를 연결지으면, ‘반서정’은 “주체와 대상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비정합적인 언어”로 이루어지므로 ‘불행한 서정시’에 해당된다. 그리고 ‘비서정’의 경우는 주체와 대상의 일치와 불일치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행복한 서정시’일 수도 있고 ‘불행한 서정시’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불행’의 추상적 가치평가가 서정을 수식하는 가치의 전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서정’이라는 형식이 무엇 때문에 ‘반서정’과 ‘비서정’으로 형상화되느냐 하는 담론적 차원에 있는 것이지, 어떤 시의 모습이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는 식의 추상적 판별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행복과 불행이 담론적 구별의 잣대일 수 있다고 보더라도, 가장 엄밀하게 적용해야 할 개념 정립에 이렇게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전혀 온당한 방식이라고 볼 수 없다.
불행한 서정시의 경우, 주체는 비정합적인 언어를 통해 세계 편력의 경험을 대상화하고, 거기서 비롯된 불일치의 경험을 정조로 삼는다.
비정합적인 언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시어, 시행, 시련과의 연관을 의도하지 않는, 모든 차원의 배제. 비정합적인 언어는 단일한 주체와 대상으로 수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둘째, 언어의 질감이 아닌, 통사적인 구문에 대한 배려 : 언어는 음운 차원에서도 율격 차원에서도 통일되지 않는데, 다만 비슷한 구문을 배치하여 전언을 통일한다. 구문의 통일은 주체가 세계와 자신을 매개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셋째, 주체와 분리된 채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이행하는 진술. 이러한 진술은 주체와 세계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데 유력하다. 넷째, 개방된 시공간의 창출. 주체로 수렴되지 않는 세계는 그 자체로 곤혹스럽다. 권혁웅, 「행복한 서정시, 불행한 서정시」, 앞의 책, pp.48~49.
최근 우리 시비평에 대한 비판 가운데 가장 많이 논의되는 문제 중의 한 가지가 ‘해석’ 혹은 ‘해설’의 과잉과 ‘판단’ 혹은 ‘평가’의 부재에 있다. 상당수의 비평들이 분류와 정의에 매몰되어 그것들이 지닌 내재적 특징에만 주목할 뿐, 그러한 현상을 초래하는 외적 담론의 분석에는 둔감한 편이다. 그러다보니 인용문처럼 특징의 나열이나 변화의 당위성만을 그럴 듯하게 늘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 특징은 ‘미래파’의 시가 보여주는 언어의 특징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문제인 이와 같은 언어의 특징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 결국 그 이유는 새로운 시론에 대한 충분한 논리적 학습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서부터 시 혹은 시인과 독자의 간극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거리에 나가면 상점의 간판 글씨가 뒤집어져 있거나 통사적 문법에 어긋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언어 사용은 최소한의 언어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의도된 위반이므로 언어의 사회성을 깨뜨릴 만큼 소통에 장애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러한 뒤집기와 비문법적 언술의 이유와 의도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므로 더욱 새로운 의미효과를 창출하게 된다. 하지만 ‘미래파’들의 시는 이와 같은 의미화 전략을 아예 감추는 자기폐쇄적 유희를 즐김으로써 최소한의 언어적 소통 과정마저 봉쇄하거나, 어려운 암호를 사용하는 비논리적 조직화를 시도해 버린다. 따라서 시를 매개로 한 언어의 사회적 소통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혁웅은 최근 시의 변화에 대한 특징과 의의를 설명하는 데만 치중하는 비평을 위한 비평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결국 지금 우리 시단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괜한 젊은 시인들이 한 비평가의 비평적 전략에 동원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앙상한 ‘미래파’의 수사를 반복하기보다는 그들의 시가 내포하고 있는 진심으로 뚜렷한 ‘감각의 차별성’과 ‘시학의 독창성’을 해명하는 것” 이명원, 「내력, 來歷, 耐力」, ?�시작?� 2006년 여름호, p.108.
이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권혁웅에게 정말 필요한 과제라는 충고를 그가 진심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3. ‘다른 서정’이라는 시적 권위
권혁웅과 더불어 지금 우리 젊은 시단을 전방위적으로 쥐락펴락하고 있는 비평가 가운데 또 한사람이 바로 이장욱이다. 그는 시인이면서 비평가인데다 최근에는 소설가로까지 활동하고 있고, ?�창작과비평?�의 편집위원으로 한국의 대표적 진보 잡지의 변화(?)를 이끌고 있어 당연히 문단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미래파’들로 불려지는 젊은 시인들에게 그의 위치는 자신들의 시세계를 이론적으로 정교하게 뒷받침해주고 새로운 시사적 의미를 부여해주는 명명자로서의 역할까지 하고 있어서, 그들과 이장욱은 끈끈한 동지적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펼쳐보면, 황병승, 김민정 등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시인들이 그의 해설에 의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김현과 정과리가 그러했듯이, 그 역시 시집 해설의 권위를 통해 새로운 시의 변화와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장욱의 시론은 기존 시단이 오래도록 유지해온 ‘서정의 권위’에 대한 거부를 표방하고 있어서, 새로운 권위를 창출하려는 그의 비평적 욕망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아이러니하게 받아들여진다. 대부분의 비평적 오류가 그러하듯, 타자의 아킬레스건을 문제삼으면서도 정작 자신 역시 그러한 아킬레스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시의 미래가 ‘서정의 권위’로 인해 여러 가지 폐단과 모순을 초래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시학적 전통은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시학으로의 갱신을 모색하여야 한다. 특히 ‘자아중심주의’, ‘동일성’, 은유‘ 등의 낡고 오래된 서정의 개념적 본질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있는 비판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구모룡, 「새로운 시학을 찾아서」, ?�시의 옹호?�, 천년의시작, 2006, pp.13~29 참조.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 성찰이 또 다른 서정의 권위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결국 옥상옥(屋上屋)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장욱은 “지금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감각(들)이 서정성의 ’부정‘이나 ’해체‘가 아니라 일종의 ’내파‘ 방식일 수 있다”고 하면서 “서정시는 사라지지 않고, 다만 갱신된다” 이장욱,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창작과비평사, 2005, pp.16~17.(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제목과 페이지만 밝힐 것임)
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그의 주장은 ’서정‘에 대한 보다 정교하고 심층적인 해석적 차이를 지향하고 있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말한 ’갱신‘은 서정 안의 ’내파‘ 방식이 아니라 ’다른‘ 서정이고 ’서정 바깥의 서정‘이다. 즉 그의 주장은 최근 우리 시의 경향이 서정적 동일성의 파산을 이루고 있다는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통해, 우리 시의 해체와 균열이 언어의 존재방식과 세계가 맺는 관계에 있으므로 서정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의 정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 대해서도 기존의 개념과 같이 ‘서정’이라고 명명하기엔 여러 가지 석연찮은 구석이 많으므로, 그는 ‘행복한 서정/불행한 서정’을 구분한 권혁웅의 방식처럼, “서정은 서정이되 ‘다른 서정’” 혹은 “서정 바깥의 서정”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우리 시의 새로운 지형을 명명의 방식을 통해 선점하려는 욕망과 이를 토대로 시인들의 위계를 세우려는 비평전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오늘날의 삶과 세계는 ‘전래의’ 서정적 어법으로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정시가 할 수 있는 것은 현대적 삶의 대립항으로서 마음의 도원(桃源)을 이루는 것 정도”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p.17.
라고 폄하하는 것은 너무나 편향된 관점이다. 여기에서 “도원”은 단순히 문명과 대립되는 장소로서의 소재주의적 측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인 것에 포섭된 시적인 것을 되돌려 근대 극복의 매개로 활용하는 일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원”은 근대 시학이 결여한 “본질주의적 환원”의 세계를 표상하는 것으로, “생명시학적인 인식의 전환으로 시적 근대성을 극복하는” 구모룡, 「생명시학의 지평」, 앞의 책, pp.46~47.
적극적인 의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장욱이 함성호의 시에 대한 해석에서 밝힌 “서정이 자신의 ‘도원’을 이루자, ‘그 ’도원‘을 무너뜨리기 위한 세계의 습격이 지각되는 풍경”이야말로 “서정의 균열”을 통해 생명시학의 사회시학적 확장을 모색하는 것이지 ’서정‘에 대한 냉소적 자세를 드러낸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결국 이장욱의 “도원”에 대한 거부는 서정을 ’인공정원‘의 세계로 폄하하려는 선험적 의도에서 비롯된 이분법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전래의 서정이라고는 했지만, 서정시에 ‘기원’ 같은 것은 없다. (중략)
이 말은 ‘전통’ 서정시들을 우리 현대시의 ‘기원’으로 설정하는 무심결을 부정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기원’을 설정하고 ‘일탈’의 각도를 측정하는 순간, 우리는 현대적 서정의 많은 부면(部面)들을 잃게 된다. ‘전통’은 다양한 문학적 역학에 참조항을 이루는 문학적 기억의 일부이지만, 복원하거나 귀환해야 할 ‘원형’이나 예외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의 ‘해체’는 지금 출현하고 있는 새로운 시들의 핵심적인 과제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개별자적 감각 안에서 이미 일정한 ‘보편적’ 감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당대적 감성의 지평 위에서 이합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원’이나 ‘계보’를 의식하거나 꿈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정적 자기동일성의 해체를 통한 근대의 극복’이라는 우리 시대의 낡은 명제를 반복하는 것은 이제 지루한 일이다. 지금 많은 시인들에게 ‘해체’와 ‘균열’은 이상적 상태를 전제로 한 결여의 상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해체를 해체로 의식하지 않으며 균열을 균열로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해체’도 ‘균열’도 없다.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p.30.
그가 말하는 “서정 바깥의 서정”은 “서정의 내부로 내려가 서정 자체를 넘어서”는 것, “서정의 끝까지 가서 서정의 ‘관례’를 극복해버리는 풍경”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p.35.
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기원‘도 ’전통‘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미패파‘들의 시가 보이는 ’해체‘와 ’균열‘의 지점은 ’무엇‘에 대한 해체와 균열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사실상 해체와 균열이라는 어법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가장 극단적인 부정의 논법으로, 부정할 대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래서 “’기원‘을 설정하고 ’일탈‘의 각도를 측정하는 순간, 우리는 현대적 서정의 많은 부면들을 잃게 된다”는 논점이야말로 너무도 완고한 시적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태도는 “진정한 새로움은 전통의 부정에 있기보다 전통의 쇄신에서 발생한다”는 평범한 시적 진리조차 외면하려 한다. 이 때문에 지금 우리 시단은 “새로움의 강박에 중독되어” “고립을 자처하면서 언어와 기법의 차원에서 미지를 추구하는 시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소통을 거부하고 오로지 시적으로만 존재하는 인위적 공간”의 끝에는 “새로움의 고갈로 인한 자해의 미학이 나타날 수 있다” 구모룡, 「현대시의 진정한 새로움」, 앞의 책, pp.66~68.
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공서정‘에 대한 거부가 만들어낸 ’인공미학‘의 세계로 인해 시는 죽음의 상태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전통에 대한 부정과 기원에 대한 거부는 또 다른 부정과 거부에 부딪힘으로써 더 이상 새로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새로움의 고갈 내지는 폐허‘ 상태에 이르고 말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 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명계 바깥에 구축 가능한 또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들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에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오감도들」, p.46.
인용문에는 이장욱이 서정의 권위를 거부하는 시론을 전개하게 된 명백한 이유가 담겨 있다. ‘오래된 미래’가 상징하듯이, 과거와 미래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세계는 미래의 “대안적 사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여지없이 “시적 관례에 투항하는” “안전한 시적 퇴행”을 거듭하면서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서정’은 “비만한 근대”로 표상된 문명적 가치에 대립되는 반문명적 표상으로서의 “휴양지”의 역할을 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생산적인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반문명적 표상 역시 진정성을 잃어버린 기계적 표상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내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미래로서의 서정은 너무도 견고한 “시적 정당성”을 얻고 있어서 지금 우리 시는 전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현대시가 구태를 벗고 새롭게 갱신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문제제기한 것이라면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서정 비판의 궁극적 의도가 근대 시학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서정 혹은 탈서정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사유가 되거나, 전통서정의 용도폐기를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로 귀결되는 것 같아 미덥지 못하다. 이장욱의 주장대로 지금 우리 ‘서정’의 가장 큰 모순과 병폐가 전통을 가장한 복고적 세계에 너무도 깊이 침잠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에 대한 비판의 초점 역시 전통 자체의 폐기나 시적 관례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그리고 근대를 뛰어넘는 정신적인 휴양지로서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궁극적인 목표지점을 찾아 나아가는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한다면, 원지점으로 돌아와 어떤 길이 올바른 길이었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다시 그 길을 찾아 가는 것이 바람직한 선택이지,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길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회의와 일탈을 감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미래와 이를 견인하는 우리 시의 길이 어디로 향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뚜렷한 전략을 세우고, 그 다음에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다양한 소통의 전술을 수립하는 데 있다.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전략과 전술을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단을 가장 퇴행시키는 근시안적 행태임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이장욱의 시론은 우리 시의 현재적 문제점에 대해서만큼은 정확한 진단을 하고 있어서 권혁웅의 시론에 비해서는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는 “체험해야 할 한계 자체가, 이미 상투적인 것. 위반과 일탈 자체가, 이미 하나의 관례인 것. 이 아이러니는 확실히 21세기 미학의 딜레마” 「오감도들」, p.44.
라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시론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와 같은 딜레마를 벗어나는 방향이 되어야 하는데, 위반과 일탈 자체가 이미 상투적인 관례가 되어 버렸다고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른 서정’이라는 대안적 미래로 제시하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그의 시론은 지나치게 당위적인 관점을 앞세우는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해석적 근거는 다소 궁색하고 마치 합리화의 수순을 밟는 논리처럼 비쳐진다. 이는 그의 비평적 시선이 최근의 시적 현상에 대한 정교한 ‘해설’에 유독 집중되어 우리 시의 궁극적 미래와 참된 가치를 염두에 둔 ‘평가’와 ‘판단’을 강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해설은 지나치게 ‘현재’를 절대화함으로써 언제나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그는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습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19세기적 고정관념”이라고 단언해 버린다. 그 이유가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 「오감도들」, p.62.
이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그는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축적해가는 삶의 감각들 자체에서 발원”하고, “외부에서 부여된 언어 바깥에 존재”하므로, “모든 초월적․도덕적․관례적․이데올로기적 강제를 낱낱이 벗겨낸 이후에야 시는 가능해진다” 「외계인 인터뷰」, p.74.
고 주장한다. 진정한 시의 미래는 ‘외계어’나 ‘감각’이 만들어내는 ‘다른 서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파’들 역시 시 혹은 시인들과 독자들 사이의 소통 자체를 완전히 저버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독자들은 ‘미래파’들의 시에 대해 계속해서 어렵고 어렵고 어렵다고 말못할 고통을 호소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설령 독자들 상당수가 시를 읽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미래파’들도 독자들이 겪고 있는 시읽기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경청해야만 한다. 시는 시일뿐이지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고, 자신들의 시에는 어떠한 논리적 분석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지적 오만함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시는 그 어떤 방식일지라도 가장 현실 가까이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를 선도해야 할 시 비평의 역할 역시 유희적이고 자폐적인, 그래서 또 다른 서정의 권위를 조장하는 우리 시의 암호화 경향과 지나친 주관성에 대해 무조건 옹호의 논리를 유포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언어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결코 ‘언어’일 수 없듯이, 시의 언어 역시, 그것이 암호이든 부호이든 소통조차 불가능하다면 시어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일상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의 사용은 결국 독자들 위에 군림하려는 권위적인 언술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시단에 정말 필요한 것은 ‘미래파’도 아니고 ‘다른 서정’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서정’이다. 서정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시대에 다시 ‘서정의 옹호’를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희망적인 시의 미래를 여는 청사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시의 소통, 서정의 옹호
새로운 천년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교차했던 2000년대의 시작은 어쩌면 상징적 퍼포먼스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사실상 숫자놀음에 불과했던 경계의 순간에 대해 모두들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20세기와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지독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낡고 진부한 모든 것을 버리고 첨단문명의 선두로 질주하는 과도한 제스처에 얼마만큼의 진정성이 있었는지 이제는 진지하게 성찰할 때이다. 이러한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은 우리 문학에도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다. 변화의 모습은 언제나 새로움의 가치로 포장되었고, 전통은 정체된 운명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렇다면 그 새로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는 지금 우리 문학이 당면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문학의 새로운 윤리를 해명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우선, 지금 우리 시단에 가장 필요한 과제는 난해성의 장막을 걷어내는 일이다. 전통서정의 갱신을 통한 미적 새로움의 추구는 전통의 쇄신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전통과의 단절에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기법의 혁신과 구조의 변화가 현대시의 진정한 새로움을 가져오는 유기적 장치로 작용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지만, 통사구조의 단절과 낯설게하기와 같은 기법이 소통불가능의 언어로 작용한다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시라도 전혀 쓸모없는 시로 전락하고 만다. 독자와 만나는 해석적 공간을 염두에 두지 않는 시는 있을 수 없다. 물론 독자에게 시의 전부를 송두리째 보여줌으로써 해석의 필요성조차 갖지 않는 것은 더더욱 문제이다. 결국 가장 바람직한 시의 모습은 시 혹은 시인과 독자의 진정한 소통에 따른 긴장이 형성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의 언어와 구조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전통과의 의식적인 단절을 주장한 나머지 오히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폐쇄적 언어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인들 사이에서만 고독하게 교신되는 비밀의 상형문자 상태"를 극단화하면 독자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다음으로, ‘서정’ 혹은 ‘시적인 것’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더욱 진지한 성찰과 논의를 쟁점화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지금 우리 시단의 현실은 더 이상 ‘시 혹은 시적인 것’의 관습을 수용하지 않는 ‘탈(脫)-시 혹은 탈(脫)-시적인 것’이 오히려 가장 ‘시적인 것’으로 부각됨으로써 독자들과의 소통의 영역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단에는 여전히 “시인은 쏟아지고 시집은 범람하고 산문시가 유행하는” 아이러니가 만연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최원식은, “한국시는 최근 전반적 이완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현재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아닌, 현재에 압도되는 것도 아닌, ‘현재의 시’는 어디에 있을까” 최원식, 「자력갱생의 시학」,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pp.17~19.
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탈이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의 현재적 의미는 어디에 있으며, 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이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새로운 시의 미래를 진지하게 성찰할 때가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시의 미래는 우리 사회가 함께 공존해가는 조화로운 운명의 형식을 찾아야 한다. 서정시, 생태시, 자연시, 미래파, 다른 서정, 행복한 서정, 불행한 서정 등 우리 시의 미래를 지칭하는 개념과 용어부터 서둘러 명명하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용어와 개념의 정립은 시적 이념의 기준과 방법을 결정하는 중심적인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전혀 비합리적인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명명되든 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서정’의 가치가 우리 사회의 궁극적인 미래를 향한 근원적 본질을 회피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서정’의 운명은 다가올 우리 미래 사회를 공동체의 감각으로 내면화하는 진정한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 시단에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시의 소통’이고, 이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시 ‘서정의 옹호’를 외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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