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城外」
白石(1912∼1963?)은 1930년대 한국시사에 개성적인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거치면서 선배인 소월을 흠모하는 가운데 문학에 뜻을 두게 된 것 같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로 문단에 등단한다. 그는 도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1934년 조선일보 교정부 기자로 일하게 된다. 그의 문학적 역량은 1935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定州城」을 필두로 시에서 나타난다. 그는 이어서 『朝光』지를 통해 시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1936년 초에 35편이 수록된 처녀시집 『사슴』을 상재하기에 이른다. 『백석시전집』(창작사,1987)에 수록된 전 작품이 총 94편에 불과하니, 24세 된 1935년이 그의 시창작의 전성기인 셈이다.
『사슴』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백석이 유년에 겪었던 토속적인 소재들로 이루어진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산골의 정경과 풍속 그리고 방언들이 정겹게 담겨 있다. 당시는 서구 모더니즘이 들어와 도시 문명과 이국적인 정조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였으니 어쩌면 이러한 신풍조에 민감했을 법도 한데 그가 선택한 시의 길을 독특했다. 유년과 고향으로의 퇴영처럼 보였다. 그러나 고유의 것들이 점점 소멸되어 가는 조국 상실의 시대에 그는 자기가 할 몫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언어와 문화 그리고 평화에 대한 사랑이 고향으로의 회귀를 선택했으리라. 말하자면 그의 고향회귀는 민족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사슴』을 비중 있게 평가한 것은 작품의 문학성도 문제가 되지만 시인의 매서운 시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城外」는 『사슴』에 수록된 작품이다.
어두워오는 城門 밖의 거리/ 도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
엿방 앞에 엿궤가 없다//
양철통을 쩔렁거리며 달구지는 거리끝에서 江原道로 간다는 길로 든다//
술집 문창에 그느슥한 그림자는 머리를 얹는다
전 4연으로 되어 있는 소품이다. 성문 밖 저녁 무렵에 펼쳐지고 있는 네 개의 정황을 병치해 놓은 단순한 구조다.
성내와는 달리 성외는 하층민들이 살고 있는 소외지대다. 거기다가 어둠이 밀려들고 있는 저녁 무렵이니 얼마나 쓸쓸한가. 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 팔러 나왔다 종일 기다려도 팔리지 않으니 다시 몰고 가는 농부일까. 아니면 도살하기 위해서 끌고 가는 백정일까. 엿방 앞에 엿을 진열해 놓은 엿궤도 보이지 않는다. 날이 저물어 집안으로 옮긴 것인가. 아니면 흉년이 들어 엿 만들 곡식이 없어서 엿을 못 만들고 있는 것인가. 빈 양철통을 실은 달구지는 날이 어두워 오는데 먼 길을 떠나고 있다. 어느 먼 지방에서 무엇을 싣고 왔다 떠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을 실어 오려 고 떠나고 있는가. 술집 창문엔 아직 이른 저녁인데 기생의 머리를 얹는 실루엣이 어른거리며 비치고 있다. 어느 부잣집 한량이 새로 온 어린 기생의 머리를 얹어 주는 것인가. 아니면 어느 노총각이 몇 푼 모은 돈으로 퇴기와 모처럼 하룻밤을 지내려는 수작인가. 모든 정황들은 판단중지의 상태로 제시되어 독자들의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쓸쓸하고 허전한 정경이다. 가난과 소멸의 비극을 담고 있은 어두운 풍경화다.
이 작품은 그의 처녀작인 「定州城」의 연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소재와 분위기가 아주 흡사하다. 시간적인 배경도 비슷한 밤이고 정황을 병치하는 구조도 다르지 않다.
山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城터/ 반디불이 난다 파란 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定州城」전문
빈 원두막에 불빛만 외롭다. 아주까리 기름 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고요한 밤이다. 폐허의 성터엔 반딧불이 푸른 혼불처럼 어지럽게 날고 있다. 어디서 불현듯 큰 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날아간다. 뚫린 성문에 휑하니 허공이 드러나 보인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어쩌면 아직 채 익지도 않은 청배[靑梨, 과피가 녹황색을 띤 배의 한 종류]를 팔러 일찍 나올 것이다.
발표는 「정주성」이 앞서지만 작품 속의 시간적 배경으로 따진다면 「성외」의 속편으로 「정주성」을 놓아도 무방할 것 같다. 당시 몰락해 가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정황을 상징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은 정착에 익숙하지 못했다. 현실에 적응할 수 없어서 그랬을까. 그의 생애는 유랑의 연속이었다. 1936년 그는 조선일보를 떠나 함흥 영생여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2년도 채 못되어 기생 자야(子夜)를 좇아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1939년에는 만주의 장춘(長春)으로 홀로 떠난다. 측량보조원, 소작인 혹은 세관원 등의 다양한 일을 하면서 만주에서의 그의 유랑은 광복이 되어 고향 정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된다. 북한에서의 그의 문학적 활동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시를 쓰기보다는 번역과 동화 창작에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사회적 체제가 시 쓰기에는 적절치 못했던 모양이다. 60년대에 이르러 결국 숙청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울 성북동 골짜기에 <吉祥寺>라는 절이 있다. <大元閣>이라는 큰 요정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절이다. 그 요정의 주인이 김영한(金英韓, 법명 吉祥華, 1999년 타계)이란 분인데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 집을 어느 스님께 시주하여 절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여인이 백석의 애인이었던 자야다. 그는 백석을 회고하는 책을 두 권이나 쓴 바도 있고 적잖은 기금으로 백석문학상을 만들어 매년 백석을 추모토록 했다. 이 사실을 이 글의 말미에 밝힌 것은 조국의 분단으로 말미암아 평생 이들의 해후가 다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들의 영혼이나마 위로하려함이다. 시인 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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