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리 고....♡/문 화 계 소 식

[스크랩] 봄은 망사다! [김정운의 남자에게]

moon향 2012. 4. 12.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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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남자에게]

봄은 망사다! 

 

 

 

 

 

봄은 식물의 발정기다. 꽃가루는 식물의 정자고, 꽃잎은 식물의 난자다. 나처럼 야한 생각을 비슷하게 많이 하는 가까운 후배 정주는 나무에 파릇한 물만 올라도 환장해 어쩔 줄 몰라 한다.

사방이 포르노인데 흥분이 안 되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찬란한 봄조차 엄숙주의에 젖어 근엄한 표정 지으며 산다면 도대체 인생이 뭐냐는 거다. 이 아름다운 봄에도 그 어떠한 에로틱한 상상이 가능하지 않다면 도대체 뭐가 살아있냐는 거다. 옳다.

 

언제부터 이런 몹쓸(?) 생각으로 인해 봄이 이토록 괴로워진 것일까? 원시시대, 사냥꾼들은 잡은 사슴의 숫자를 화살 끝에 새겨 넣었다. 기억하기 위해서다. 어느 순간부터 사냥꾼들은 이 숫자 표시를 머릿속에 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호학적 매개’(semiotic mediation)다.

상징에 의해 매개되는 기억·추론과 같은 인지능력이 내면화되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지능력은 저절로 작동하지 않는다. 기름이 있어야 움직이는 자동차처럼 사유의 동기가 있어야 한다. 발정기다!

 

동물의 존재 이유는 종족 번식이다. 발정기를 위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인간도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이 여타 동물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차이는 ‘매일 발정기’라는 사실이다. 발정기의 무한리필이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애나 어른이나 평생토록 오직 그 생각(!)뿐’이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이다.

 

직접적 접촉 없이도 성행위의 짜릿함을 상상할 수 있게 되자, 인간의 발정기는 다양한 문화적 외피를 입게 된다. 상징적 매개물이 갈수록 다양해진다는 이야기다. 하늘거리는 주름치마로부터 가죽장화와 채찍, 혹은 촛농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의 양상은 매우 즐겁다. 인간의 문화예술행위의 대부분은 ‘발정기의 기호학적 매개’의 산물이다. 인간 에로티시즘의 기호학은 여인의 다리에서 완성된다. 망사스타킹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자들은 왜 망사스타킹을 신는가? 왜 가슴골이 깊게 파인 옷을 입는가? 왜 그토록 짧은 치마를 입는가?

‘남자들 보라고…’라며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주위의 여인들로부터 집단적인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여인들의 비난이 옳다. 절대 남자들 보라고 망사스타킹을 신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여인들의 주장처럼 ‘자기만족’을 위해 입는 것도 절대 아니다. ‘자기만족’론은 ‘남자들 보라고’론보다 더 어설프다. 설득력도 전혀 없다.

 

‘보이지만 안 보이는 걸로 하기’다. 빤히 보이지만 절대 내놓고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발정기의 기호학적 매개’의 미학적 완성은 바로 망사스타킹과 같은 ‘훔쳐보기’와 ‘드러내기’의 변증법적 긴장에 있는 것이다.

그 유명한 샤론 스톤의 ‘다리 바꿔 꼬기’야말로 이러한 미학의 20세기적 결정판이다. 눈앞에 빤히 드러내지만 안 보이는 걸로 하자는 것이다.

 

트위터와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관음증과 노출증의 21세기적 양상이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를 통해 자신만의 은밀한 느낌과 생각, 행위를 적나라하게 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서로 훔쳐본다. 서로의 내밀한 세계를 디지털 기기의 액정화면을 통해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디지털적 애무가 대낮에 사방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봄에는 좀 야한 생각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다.

매일같이 컴퓨터 화면을 통해 ‘훔쳐보기’와 ‘드러내기’에 몰두하면서, 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봄날의 에로티시즘에 입술꽁지 내리며 엄숙하고 근엄한 척하지 말자는 거다.

 

이 찬란한 봄날, 신정아의 책이나 훔쳐보고 흥분하는 천박한 변태짓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개나리가 노랗게 올라오고 목련이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데 가슴 설레지 않는다면 도대체 언제 살아있음을 느낄 것인가? 그래서 난 요즘 망사만 보면 흥분한다.

이젠 증상이 많이 심각해져 낚시 가게 그물만 봐도 흥분한다.

봄엔 그래도 된다.

 

2011.04.06

 

 

 

[김정운의 남자에게]

 

“도대체 뭘 하면 재미있어요?”

 

“젠장, 자기가 뭘 재미있어하는지 내가 어떻게 아나?”

나는 돌아서며 혼자 꿍얼거린다. 재미와 행복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사방에 하고 다니다 보니, 사람들은 매번 내게 묻는다. 도대체 뭘 하면 재미있느냐고. 사는 게 도무지 재미없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고통은 이해하지만, 자신이 재미있어하는 것은 오직 자신만이 알 뿐이다.

 

재미는 ‘존재의 근거’다. 우리는 재미있으려고 산다. 아닌가?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면 모양이 좀 빠져 보인다. 나름 폼 잡는 학자들은 온갖 까다롭고 복잡한 언어로 인간 존재의 근거를 설명한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잘 모르겠다. 철든 이후 오십이 되는 지금까지 하루도 책을 손에서 놓은 날이 없는 내가 이해가 안 되면, 그런 내용을 이해할 사람은 이 세상에 별로 없다.

 

학자들은 스스로 잘 이해하지 못하면 더 어렵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교수들끼리만 아는 영업비밀이다. 그래서 교수에는 세 종류가 있다.

우선,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교수. 대부분 그렇다.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설명하려니 그렇다.

둘째는 어려운 이야기를 무척 쉽게 하는 교수. 진짜 무림의 고수들이다. 아주 가끔 있다.

그러나 진짜 황당한 이들이 있다. 쉬운 이야기를 열라(!) 어렵게 하는 교수다. 셋째 부류다. 가끔 있다.

 

존재의 근거에 관한 내 문화심리학적 설명은 아주 단순명료하다. 재미없는 삶은 내 삶이 아니다. 당위와 의무로는 내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은 아이들을 보면 안다.

아이들은 오직 한가지 생각뿐이다. 오직 재미있을 생각. 그래서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나도 돌아서면 바로 키득거린다. 젊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도 놀고 있는 어린 자식들을 가끔 볼 때가 있다. 우리 눈에는 서글프기 한이 없지만, 아이들은 그런 거 모른다. 슬픔은 아이들의 언어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삶이란 곧 재미다. 그래서 네덜란드 문화사학자 하위징아는 인간 삶과 문명의 본질을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정의한다.

 

‘뭘 하면 재미있는가?’의 문제는 각 개인이 해결해야 하지만,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가?’에 관해서는 심리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공부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공부하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할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에 관한 경험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남의 돈 따먹으려고(!)’ 공부해왔다. 그래서 공부가 재미없었던 것이다.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을 공부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사진 찍는 일을 좋아한다고 하자. 셔터 속도, 조리개를 조절해가는 방법을 배워가며 새로운 순간을 포착해낼 때마다 느끼는 희열은 폭탄주나 노래방의 그 어설픈 즐거움과 비할 바가 아니다. 자신의 성장이 확인될 때 빠져드는 그 삶의 충만함을 심리학에서는 ‘플로’(flow)라고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신의 존재조차 망각하는 몰입의 즐거움은 공부에서만 느낄 수 있다.

 

공부하는 ‘학교’(school)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스콜레’(schole)다. 삶을 즐긴다는 뜻이다. 삶을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 학교였던 것이다. 자신이 평생 즐겨야 할 삶의 주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평생 추구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곳이 학교의 본질이다. 재미는 주체적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늦지 않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아 새롭게 학습을 시작하자는 이야기다.

다행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평균수명이 무지하게 늘어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에 몰입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그 엄청난 재미를 발견하기에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 지구와 우주의 평화가 내일 당장 이뤄져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모른다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아닌가?

 

2011.05.16

 

 

 

 

 

 

[김정운의 남자에게]

 

 ‘정’은 가고 ‘아저씨’만 남는다!

 

각 문화마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독특한 개념이 존재한다.

독일어의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가 그렇다. 상처나 손해를 뜻하는 ‘샤덴’(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프로이데’(Freude)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남의 슬픔·고통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와 같은 경우다. 그러나 이 경우는 문장이다. 개념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혼돈스러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개념을 만들어낸다. 일단 개념이 한번 성립하면, 이 개념은 역으로 또다른 실재를 만들어낸다.

개념과 실재 사이에 성립하는 상호규정의 관계를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scher Zirkel)이라고 한다. 이야기 혹은 개념이 어떻게 현실을 규정하는가를 푸코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근대 담론의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다른 문화에서 발견되지 않는 ‘샤덴프로이데’라는 독특한 독일적 개념은 타인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가학적 실재가 된다는 이야기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샤덴프로이데’라는 개념이 가능하냐며 독일 문화를 비난하지만, 슬그머니 자신들의 언어로 토착화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다른 문화에서 발견되지 않는 개념이 우리에게도 있다. ‘정’(情)이다. 서구의 ‘사랑’과는 구별되는 아주 독특한 개념이다. 서양인들은 사랑하지 않으면 이혼한다. 그래서 아침마다 남편들은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아이 러브 유’를 외친다. 전화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한다. 거의 강박적이다. 사랑이 끝나면 관계도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적어도 중년 이상의 부부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아도 함께 살았다. ‘그놈의 정’ 때문이다. 요즘 이혼율이 늘어나는 이유는 ‘그놈의 정’이 개념적으로 더는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과 한국적 현실의 해석학적 순환이 이제 막을 내렸다는 뜻이다. 푸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정’이라는 권력담론이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변화의 결과는 고스란히 중년남자들의 몫이 된다.

 

더이상 ‘정’이란 개념의 ‘권력 프리미엄’을 누릴 수 없는 불안한 한국 중년남자들을 설명하는 새로운 개념이 구성된다. ‘아저씨’다. 물론 이전에도 ‘아저씨’라는 호칭은 존재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개념은 아니었다. 반면 ‘아줌마’는 호칭인 동시에 개념이었다.

품위 없고 황당한 행동을 마다않는 중년여성들을 이해하기 위해 ‘아줌마’라는 호칭이 문화적 개념으로 전환되어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중년의 여인을 ‘아줌마’라 부르면 은근 기분 나빠 했다. 반면 ‘아저씨’는 가치중립적 호칭이었다. ‘아저씨’라 불러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사뭇 달라졌다.

 

‘아저씨’는 이제 무례하고, 거칠고, 짜증나는 개념이다. ‘아줌마’와 ‘아저씨’의 문화적 의미는 일부 겹친다. 그러나 ‘아줌마’는 어느 정도 연민이 가능한 애교스러운 개념인 반면, ‘아저씨’는 ‘어디 건들기만 해봐라’ 하는 공격적인 개념이다.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검색해보라.

지하철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 쩍벌남, 침 함부로 뱉는 사람, 욕이 빠지면 말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 등등.

온갖 불쾌한 중년남성들의 이름이 ‘아저씨’인 것이다. ‘아저씨’는 권력상실의 불안에서 시작하는 무례, 분노, 적개심, 공격성의 총화다.

 

물론 착한 아저씨들도 있다. 자식들에게 느닷없이 ‘사랑한다’며 황당한 문자를 보내는 이들이다.

아이들이 문자 ‘씹으면’ 너무 쓸쓸하다.

아내는 날이 갈수록 공사가 다망하다. 남편이 집에 있으면 어떻게든 일을 만들어 밖에 나간다.

안방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텔레비전 채널만 돌린다. 이미 여러 번 본 연속극을 다시 본다. 연속극은 죄다 슬프다. 혼자 훌쩍거리다 슬그머니 침대에 올라 잠을 청한다.

아이들과 아내는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2011.03.16

 

 

 

[김정운의 남자에게]

 

폭탄주의 문화심리학

 

폭탄주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자랑하는 음주문화다. 세상에 그렇게 자랑할 게 없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폭탄주 제조법의 다양함과 화려함은 서구의 칵테일문화를 뛰어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상상력이다.

섞어 마시기에 한번 맛을 들인 사내들은 이제 어떤 종류의 음료수든 죄다 섞어 버린다. 그런데 참 궁금하다. 도대체 왜 한국 남자들은 이토록 폭탄주에 열광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빨리 취하고 싶어서다. 그럼 왜 빨리 취하려고 하는 걸까? 서로 할 이야기가 없어서다. 술은 서로 이야기하려고 마시는 것이다.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알코올의 힘을 빌려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한국 남자들의 탁자 위에는 술만 있지, 서로 나눌 이야기가 없다.

 

폭탄주가 한두 바퀴 돌아가다 보면 꼭 오버하는 인간이 나타난다.

‘사랑해!’ ‘우리가 남이가!’ ‘마셔마셔’ 어쩌구 하며, 껴안거나 러브샷과 같은 과도한 스킨십을 일삼는다. 이 인간은 동석한 모든 이가 빠짐없이 폭탄주를 마시도록 강요한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취해 아까 한 이야기, 하고 또 한다. 맨정신으로 듣고 있자면 정말 환장한다.

폭탄주의 끝은 참 스산하다.

온갖 종류의 ‘위하여!’를 남발하고, 넥타이 머리에 묶고 탁자 위에서 춤추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모두 사라진다.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술자리의 모든 뒤끝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술값을 책임져야 하거나, 망가진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

 

도대체 왜들 그럴까? 두렵기 때문이다. 서로 나눌 이야기가 전혀 없는데, 멀뚱멀뚱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 그 황당한 상황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폭탄주를 마시는 것이다. 모두 눈동자가 흐릿해지고,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마구 헷갈리는 상황을 만들어야만 마음이 편해진다. 왜 이렇게 술을 마셔야 하는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부터 이런 식은 아니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 우린 서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소주 한 병에 파전 한 접시를 앞에 놓고 밤새 이야기했던 날들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은 이야기하려고 산다.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고츠키 같은 러시아의 심리학자는 생각을 ‘내적 언어’(inner speech)라고 정의한다.

‘내가 나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생각이라는 것이다. 혼자 중얼거리는 현상은 이 내적 언어가 은연중에 튀어나오는 것이다. 힘들면, 생각이 복잡하면, 외로우면 사람들은 중얼거린다. 이야기가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러기 아빠들은 죄다 혼자 중얼거린다. 내 친구 재림이도 매번 혼자 중얼거린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소연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심리상담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삶의 의미를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은 유능한 상담자의 필수 덕목이다.

 

한국 남자들이 술만 먹으면 군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청춘의 그 아름다운 날들을 철조망 앞에서 총을 들고 보내야 했던 그 이유가 도무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여자들은 심리상담자의 자세로 남자의 군대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특히 군대에서 ‘보름달 빵’과 ‘베지밀’ 내기 축구시합 한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줘야 한다. 이 땅의 진정한 사랑은 군대 이야기를 참고 들어주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내 삶에 의미부여가 안 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내 이야기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술 한 잔 놓고도, 아니 맨정신으로도 가슴 설레는 내 삶의 이야기를 밤새 나눌 수 있어야 진짜 내 삶이다. 그래서 폭탄주를 습관적으로 마시는 사람이 행복해지기란 참 어려운 거다.

 

2010.10.13

 

 

 

 

[김정운의 남자에게]

 

늙어 보이면 지는 거다!

 

식당에서건 카페에서건 내 친구 강영식은 여자만 보면 꼭 그런다.

“아가씨, 얼굴에 뭐 묻었어요!” 당황한 여자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묻는다.

“뭐가요?” 영식이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한다.

“아름다움이…”

 

아, 정말 환장한다. 손발이 다 오그라든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런 종류의 농담이라도 던져야 여인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나이가 된 것이다. 문제는 다른 친구도 이런 종류의 ‘아저씨 유머’가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평양에서도 이 유머가 통했다는 영식이의 무용담에 감동한 화식이, 응원이는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잔잔한 유머’가 필요하다며 수첩에 받아 적기까지 한다. 옛날 시골다방에서 쌍화차 한잔 시켜 놓고 어떻게든 ‘레지 아가씨’의 손 한번 만져보려던 할아버지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내 친구들은 이렇게 급속히 늙어간다. 이제 아무도 늙어가는 것에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심리적으로 포기하고 나니, 몸은 더 빨리 망가진다. 모두들 허리띠가 배꼽 위로 올라오는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뒤로 거의 자빠지듯 의자에 앉아 있다. 하는 이야기라고는 죄다 세상 못마땅한 이야기뿐이다. 가끔 천장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많이 서글프다.

 

몸과 마음이 무너지면 인상조차 훨씬 나이 들어 보이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나이 들어 보이는 만큼 일찍 죽는다는 사실이다. 실제 연구해 봤더니 그렇다는 거다.

최근 덴마크의 심리학자 크리스텐센(K. Christensen)은 1995년부터 2008년까지의 종단연구를 통해 같은 나이일지라도 늙어 보이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 내용은 간단했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쌍둥이의 사진을 보고 나이를 평가하게 하고, 그 평가된 나이와 이 쌍둥이가 실제 사망한 나이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2008년까지 약 225쌍의 쌍둥이가 사망했다. 숨질 당시의 나이를 비교해보니 쌍둥이 중 늙어 보이는 사람이 일찍 죽을 뿐만 아니라, 늙어 보이는 만큼 더 빨리 죽었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몸과 마음의 상태가 안 좋으면 늙어 보이고, 그만큼 일찍 죽는다. 병에 걸려 몸이 아파 늙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왜 마음마저 일찍 포기하고, 손발 저리는 그 형편없는 ‘아저씨 유머’나 낄낄대야 하는가?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이유는 삶이 재미없는 까닭이다. 정력적으로 살던 이들이 은퇴한 뒤 갑자기 늙어버리는 모습을 자주 본다.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사람일수록 은퇴한 뒤 더 빨리 늙는다. 존재불안의 우울함 때문이다. 우울한 사람이 심장병에 걸릴 확률은 보통사람에 비해 2~4배나 된다고 한다. 특히 건강한 사람이 우울해질 경우 심장병에 걸릴 확률은 훨씬 더 높아진다.

 

최근 나는 배꼽 위로 올라오는 ‘아저씨 바지’는 다 버렸다. 허리 아래쪽에 걸리는 청바지만 입는다. 불편해도 참는다. 머리에 파마도 했다. 사실 처음에는 탈모로 엉성해진 머리 안쪽을 가리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파마한 뒤 내 행동은 사뭇 과감해졌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옷도 사 입는다.

불과 몇 주 동안 역기와 아령을 들고는, 가슴 큰 남자들만 사 입는 쫄티도 사 입는다. 거울만 보이면 팔뚝에 힘을 잔뜩 준다.

 

이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산만한 잡지나 책도 사 본다. 악기나 그림을 배울 생각도 자주 한다. 어떻게든 재미있고 즐거운 생각만 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우울하고 허전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한순간이다. 방심하면 한방에 ‘훅’ 간다. 우리 나이에는 특히 더 그렇다.

그래서 내 인생은 크게 둘로 나뉜다. 파마하기 전과 파마한 후.

 

아무튼 난 영식이가 하는 ‘아저씨 유머’ 따위는 죽을 때까지 절대 안 할 거다.

악착같이 젊고 건강하게, 아주 오래 살 거다.

 

2010.09.15

 

 

 

[김정운의 남자에게]

 

새벽에 자꾸 깬다!

 

언젠가부터 새벽에 자꾸 깬다. 특별히 걱정되는 일도 없는데, 한번 깬 잠을 다시 이룰 수가 없다. 예전에 이런 일은 없었다. 다시 잠을 이루려고 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 온다. 이럴 때는 새벽잠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 일어나 불을 켜니 아내가 투덜대며 돌아눕는다. 사람 참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느냐며 함께 걱정해주는 시늉이라도 했다. 요즘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귀찮아한다. 이러다가 혹시 몸이라도 아프면 아예 무시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갑자기 서글퍼진다.

 

아이들 방을 들여다본다. 고3인 큰놈은 수능이 몇 달 안 남았는데, 공부는 쥐꼬리만큼 하고, 잠은 꼭 8시간씩 잔다. 아주 푹 잔다. 팬티 바람으로 퍼져 자고 있는 녀석의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내 마음만 더 심란해진다. 초등학생인 막내 녀석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요즘 이 녀석만이 내게 위로가 된다. 자고 있는 막내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아이들 방에서 나온다. 부엌과 거실을 오가고, 소파에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동트기를 기다린다. 신문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안팎의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해지고 초조해하며, 수면장애, 불안, 두통, 피로 등이 동반되는 이런 종류의 증상을 흔히 ‘신경쇠약’이라고 한다. ‘신경쇠약’(neurasthenia)이란 표현을 최초로 정신의학의 전문용어로 사용한 미국의 내과의사 조지 M. 비어드는 이 증상의 원인을 문화변동으로 설명한다.

 

비어드가 지적하는 가장 결정적인 문화변동의 내용은 삶의 속도다. 19세기 전신, 철도, 증기기관 등으로 인한 삶의 속도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고, 그 결과 사람들이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18세기에 비해 100배나 많아졌다. 빨라진 삶의 속도와 격렬해진 경쟁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부적응 현상이 바로 신경쇠약이다.

 

비어드가 경고한 19세기의 속도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속도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경험한다. 내 삶의 속도를 따라가기도 바쁜데, 남의 삶에도 쉴 새 없이 개입해야 한다. 스마트폰으로 문자, 이메일이 계속 날아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트위터로 전해오는 수십, 수백명의 남의 이야기를 매번 확인해야 한다. 이 첨단기기의 진화를 단 몇 달이라도 모른체하면 바보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몸은 갈수록 느려진다. 노안으로 인해 신문 한 장을 보려 해도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아주 공사가 다망하다. 가까운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해 끙끙대는 일도 잦아진다. 휴대폰을 사용한 이후로는 제대로 외우는 전화번호도 없다. 이런 낡은 아날로그적 신체로 급변하는 21세기적 삶의 속도를 쫓아가려니 그토록 힘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정신없이 빨리 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삶과 마음의 속도의 불일치로 생기는 문화병의 치료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걷기’다. 수백만년에 이르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걷는 속도’에 적응해 발달해왔다.

감당하기 어렵게 빠른 삶의 속도는 불과 지난 몇백년 동안의 일일 뿐이다. 인류 역사를 하루로 보면 겨우 몇초 전에 시작된 변화라는 이야기다.

 

요즘 그래서 다들 ‘올레길’ 등을 찾아다니며 걷느라 난리다.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삶의 속도를 회복하고 싶은 까닭이다. 내가 최근에 찾아낸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맨발로 걷는 거다.

얼마 전, 가까운 산을 찾았다가 맨발로 걸어봤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흙의 느낌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그저 한 시간 남짓 걸었을 뿐인데, 그날 밤 더없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이 들 때, 잠의 나락에 한없이 떨어지는, 아주 기분 좋은 느낌도 되살아났다.

 

아침신문보다 일찍 깨는 새벽이 자꾸 늘어나 괴로운 이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꼭 권하고 싶다.

맨발로 걷기. 온천보다 더 좋다. 새벽에 자꾸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세상에 없다.

 

2010.08.25

 

 

 

[김정운의 남자에게]

 

아이폰과 룸살롱

 

모든 동물의 수컷들은 불안하다. 암컷의 경우, 자신이 낳은 새끼는 반드시 자기 피가 섞여 있다. 그러나 수컷은 다르다. 자신과의 교미로 낳은 새끼가 제 새끼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동물의 수컷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어떻게든 ‘씨’를 뿌려놓으려 한다. 인간의 경우, 이 불안의 양상은 좀더 복잡해진다.

생물학적 종족번식과 관련된 불안은 물론, 존재론적 불안으로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어쩌지 못하는 불안은 공격성의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증오와 분노다.

 

종족번식과 관련된 수컷의 불안은 아주 쉽게 해결된다. 암컷들은 불안해하는 수컷들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대며 위로한다. 원숭이의 경우, 이러한 접촉을 ‘그루밍’(grooming)이라 한다. 서로의 털을 다듬는 이 행동은 권력관계를 확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서로의 불안을 해소하는 고도의 심리적 전략이기도 하다. 동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서로 끊임없이 만지고 만져져야 불안해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하면 우리는 끌어안거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한다. 왜 그럴까? 만져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슬픈 일을 당했는데,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는 팔짱을 끼거나 이마를 주무른다. 이렇게 스스로라도 만져져야 위로가 되는 까닭이다. 악수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낯선 상대에게 서로 공격할 의사가 없으니 안심하라는 의미의 접촉이다.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에게 터치는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정서적 경험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남자들에게 만지고 만져지는 것은 거의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금지된다.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학교의 남자선생님이 여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까지 금지된다.

 

한국의 철없는 사내들은 이 박탈된 터치의 경험을 룸살롱에서 위로받는다. 한국의 남자들은 룸살롱에 술 마시러 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술 마시려면 포장마차나 음식점에서 마실 일이지, 왜 꼭 룸살롱에서 여자를 옆에 앉혀놓고 마시려 하는가? 만지고 만져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룻밤에 적게는 수십만원, 많게는 수백만원을 내고 룸살롱에 가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만져주기 않기 때문이다. 아닌가?

남자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를 나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으면 나와 보라!

 

서로 만지고 만져지는 ‘터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사소통 행위다. 사람들이 아이폰, 아이패드에 열광하는 ‘심리학적 이유’는 바로 이 터치 때문이다. 신체적 접촉이 사라진 디지털 세상에서 내 손끝의 세밀한 움직임에 반응하는 기계가 생겨났다. 손가락을 벌리고 좁힐 때마다 화면의 변화가 일어나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새로운 창이 열린다. 반드시 맨손으로 만져야 반응한다. 정말 눈물나도록 감격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40대 중년남자들이 아이폰에 더욱 열광하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요즘 아저씨들이 모이면 전부 아이폰 이야기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룸살롱과 아이폰의 공통점은 바로 ‘터치’를 통한 위로다. 나는 이를 ‘배려경제’(care economy)라고 정의한다. 오늘날 이 배려경제의 범위는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고 있다.

곳곳에 널려 있는 발마사지, 스포츠마사지, 타이마사지, 안마시술소가 바로 그것이다. 좀더 넓은 의미에서 ‘코칭’, ‘상담’, ‘심리치료’와 같은 ‘마음의 터치’와 관련된 각종 산업도 이 배려경제에 해당된다.

 

어떤 이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존재론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관심과 배려를 돈 주고 산다. 흥미로운 사실은 남자들은 1차 배려경제, 즉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배려경제에 많은 지출을 하는 반면, 여자들은 2차 배려경제, 즉 마음의 위로와 배려에 더 많이 지출한다는 것이다.

배려경제가 대세라는 이야기다. 아무튼 만질수록 커진다. 무엇이든….

 

2010.06.02

 

 

 

[독자칼럼] 아무나 만지지 마라 / 차혜령

 

‘아이폰과 룸살롱’을 읽고

 

새로 연재되는 2010년 6월3일치 ‘김정운의 남자에게-아이폰과 룸살롱’을 읽고 실 소를 금치 못했다. 김씨는 이 칼럼에서 아이폰과 룸살롱의 공통점을 ‘터치를 통한 위로’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번뜩이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나아가 ‘배려경제’를 정의하고 싶었을지 모르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먼저 김씨가 말한 룸살롱의 ‘터치’는 불안을 해소하거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상호작용이 아니다.

 

룸살롱에서 ‘남성 손님의 요구에 의해 손님을 만져야 하는 사람’ 또는 ‘만져지는 사람’은 흔히 ‘접대부’라고 부르는 유흥접객원이다. 식품위생법령상 유흥접객원은 유흥주점에서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손님의 유흥을 돋우는 여성’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유흥을 돋우는 일’에 ‘만지고 만져지는 일’이 포함되는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김씨나 룸살롱 고객인 일부 남성들의 착각일 뿐, 유흥접객원의 입장에서 ‘손님 요구대로 손님을 만지는 것’ 또는 ‘손님에 의해 만져지는 것’은 법령이 정한 업무 범위를 넘은 것이다.

그것은 유흥접객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추행이나 일방적인 폭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업소에서 계속 일하기 위해 손님의 요구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김씨가 말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사소통 행위’인가?

 

김씨는 남자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를 자신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보라고 호언한다. 그러나 현대 한국 남성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는 김씨의 주장대로 ‘만지고 만져지면서’ 박탈된 터치의 경험을 위로받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일정 액수의 돈을 지급하면 음주와 더불어 (김씨의 방식대로 룸살롱을 이용할 경우) 자신의 요구대로 ‘만지고 만져지면서’ 성적 쾌락이나 지배욕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룸살롱에서 쓰는 ‘하룻밤 수십만원, 수백만원’은 단순히 ‘만지고 만져지는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돈을 주고 사는 성적 서비스와 ‘2차(성매매)’를 ‘관심’과 ‘배려’라는 말로 포장하지 말라. 그런 포장술은 얄팍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왜곡한다.

 

다음으로 김씨가 말하는 ‘배려경제’는 가정 안팎의 돌봄노동이 다른 노동과 같이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는 ‘돌봄경제학’을 근거 없이 끌어 쓴 말이다. 김씨가 ‘배려경제’의 예로 든 각종 마사지 업소는 대개 성교 행위나 유사 성교 행위가 구매되는 성매매 업소이다. 김씨가 남성들이 여성보다 많은 지출을 한다고 말한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1차 배려경제’라는 것은 결국, 여성의 몸을 이용한 성적 서비스를 통해서 그 여성이 아닌 제3자가 거대한 이윤을 획득하는 성산업이다. 김씨는 성산업이야말로 존재론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산업이며, 성산업이 현대의 대세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런데 ‘남성 고객이 룸살롱에 가는 것은 여성 유흥접객원을 만지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1차 배려경제’라는 문화심리학자에서부터 ‘유흥주점 손님이 여성 접객원의 상의를 벗긴 후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넣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던 대법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시각들이 바로 한국의 룸살롱과 성산업에 대한 문제 제기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차혜령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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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싸롱에서 여성인권 존중해서 조용히 술마시고 나오면 좋아할까?

폭탄주 들이 붓고 꽥꽥 소리지르다가 빨리빨리 일 끝내고 토끼같은 새끼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빨리빨리 가는 손님이 짱이다^^

 

얌전히 담소하시며 조용히 술먹고 나가면 재수없는거고.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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