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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수(詩瘦)와 시마(詩魔)

moon향 2014. 7. 27. 16:51

시수(詩瘦)와 시마(詩魔)



시수(詩瘦)라는 말이 있다. '瘦'는 '마르다' '수척하다'는 뜻을 지닌 글자니 그대로 읽는다면 '시가 수척하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말은 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시인을 설명하는 말이다. 즉 시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몸이 수척해진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말하자면 몸이 파리해질 정도로 '시 앓이'를 하는 정황을 말한다. 세상에 몸을 망칠 정도로 시에 빠져 있다니 보통사람들에겐 쉽게 납득이 안 가는 일일 지 모른다. 그러나 시에 흠뻑 빠져 있는 시인들에게선 드물지 않게 보는 일이다.

병을 얻어 앓는 것처럼 세상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빠져 몸을 망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사람은 사랑에 빠져 상사병을 앓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도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혹은 바둑이나 낚시 같은 취미생활에 미쳐 가족의 지탄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이 건전한 것이라면 그것에 혼신을 기울여 미친다는 것이 과히 나쁠 것도 없다. 연구에 미친 학자, 일에 미친 사업가, 노래에 미친 음악가들을 상상해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인가.

미치는 것 가운데서도 詩에 미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질 높은 병이 아닐 수 없다. 시를 쓰는 것이 어떤 경제성을 지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단한 명예가 따른 것도 아니다. 실리에 밝은 세상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시다. 그런 시라는 것에 매달려 살아가는 시인들을 생각해 보라. 심미적인 기쁨 이외의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그들의 작업이야말로 얼마나 순수한가. 그 무구함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멍청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시인들이 다 시수(詩瘦)를 앓는 것은 아니다. 어떤 천재적인 시인은 들판을 산책하면서 중얼거리는 말들이 다 시가 되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시인은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시를 빚어냈다고도 하니 그런 시인들에겐 시의 산고(産苦)가 따르지 않았으리라. 보통의 시인들에게 있어서도 때에 따라서는 즉흥적으로 시가 생산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한 편의 시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 시인들은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며칠 혹은 몇 달씩 퇴고를 하면서 괴로워하기도 한다. 趙芝薰은 그의 데뷔작인 <승무(僧舞)>를 2년여 동안에 걸쳐 만들어 냈다고 하지 않던가. 한 편의 시에 쏟았던 정성이 어떠했을 것인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시수(詩瘦)를 떠올리게 한 고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賈島의 '퇴고(推敲)'에 얽힌 얘기리라.

唐나라 때의 일이다. 수도의 장관에 해당되는 京兆尹의 행차가 있었다. 그런데 한 중 녀석이 길을 비키지도 않고 어정거리며 가고 있다. 괘씸하게 생각한 하인들이 그 중놈을 잡아 족치려고 하자 가마 속에 앉아 있던 尹[장관]이 그 놈을 가까이 오라고 해서 그 까닭을 물었다. 했더니 그 중의 대답이 시의 한 글자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감의 행차도 미처 몰랐다고 용서를 빌었다. 尹이 그 시의 내용을 물으니
鳥宿池邊樹(새들은 연못가의 숲에 들어 잠이 들고)
僧推月下門(중은 달 아래 절문을 밀고 들어간다)
의 시구에서 '밀고 들어간다'는 '推'를 쓸 것인가, '두드린다'는 '鼓'를 쓸 것인가를 두고 망설이는 중이라고 말한다. 이에 尹이 '推'보다는 '鼓'가 좋겠다고 조언을 한다. 그래서 글을 쓰고 나서 고치는 일을 두고 推敲라는 말이 생겨났다.

尹은 당대 명문장가였던 韓退之요, 중 역시 후에 시의 명성을 얻게 된 賈島 사이에 벌어진 고사다. 시에 골똘하다 보면 침식도 잊고 꿈속에서도 시를 쓰는 수가 있다. 꿈에서 얻은 시구를 깨고 나서 그만 깜박 잊어버려 그 몽중시(夢中詩)를 되살리려고 전전반측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으리라.

시마(詩魔)라는 말도 있다. 말하자면 서양의 뮤즈에 해당한 시신(詩神)이라고 할 수 있다. 뮤즈는 여성적인 부드러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데 시마(詩魔)는 그렇지가 않다. 귀찮고 괴롭게 하는 마귀(魔鬼)로 표현되고 있다. 시에 시달리는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시신이라는 말 대신에 시마를 썼겠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상(詩想)을 아무리 지워버리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에 사로잡혀 헤어나질 못하는 그런 정황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중국 후량(後梁)의 주흥사(周興嗣)가 『천자문(千字文)』을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는 고사가 있다. 일천 개의 글자를 한번도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고 사언시(四言詩) 250구로 엮은 명작이다. 다 짓고 나서 아침에 거울을 보았더니 검은머리가 다 하얗게 세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백수문(白首文)'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는데, 신화적인 이 얘기야말로 주(周)의 시재(詩才)도 시재지만 시마(詩魔)의 조화가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작고한 朴正萬 시인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수 개월 동안 수 백 편의 작품을 쏟아냈다고 그의 측근들은 전한다.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그는 하루에 수십 편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그의 지우(知友)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쓴 작품들을 밤늦게까지 읽어 주곤 했다는 것이다. 아마 시마에 대단히 시달림을 받았던 모양이다. 시마는 아깝게 일찍 떠나려는 그를 붙들고 평생 쓸 작품들을 그렇게 다 쏟아놓고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시를 쓰는 일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다. 시수(詩瘦)는 시마(詩魔)에 걸린 사람들이 앓는 병이라고 해야 하리라.

출처 : 누런학 장미의 유혹
글쓴이 : 황학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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