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혹평하는가. 예전에는 쿨한 사람들이 읽었고, 지금은
쿨한 사람들이 외면하는 분위기다. 한국과 일본의 출판시장을 흔들고 있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출간을 계기로 하루키에 관한 수수께끼들을 풀어보았다. 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과 출판계 종사자, 글쟁이들, 젊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글 이다혜 <씨네21> 기자, 사진 민음사 제공 |
[토요판] 커버스토리 ‘하루키’라는 수수께끼
▶ ‘닥치고 하루키’와 ‘하루키 까’는 있지만 정작 하루키는 없다. 문학적인 평가보다 현상의 분석이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담론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신작이 초판 20만부 판매라는 신드롬에 가까운 초반 반응을 얻으며 화제가 되고 있다. 신작에 대한 이야기에 더해, 한국에서 하루키가 어떤 맥락으로 수입되고 소비되었는지를 돌아보았다. 그 시간을 돌아보는 일은 새로운 하루키 읽기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이런 질문이 가능한 작가는 많지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단순히 대표작 한 권, 혹은 소설만으로 이야기되지 않아서다. 누군가에게 이 질문은 대학 때 입고 다니던 동아리 티셔츠를 아직도 입고 다니느냐는 정도로 인식되고, 누군가에게 이 질문은 소위 말하는 ‘하루키 월드’ 추종자의 대열에 속해 있느냐는 것으로, 누군가에게는 그의 신작을 읽었느냐는 것으로 수렴된다. 그를 좋아하는가, 혹은 읽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책깨나 읽는다는 사람들은 하루키를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그의 책 서너권쯤은 읽었다는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 혹은 당혹스럽다는 듯 기억해낸다. 그러고는 다소 긴 이야기가 이어진다.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과 출판계 종사자, 그리고 하루키를 읽는 젊은 독자들에게 그 사연을 물어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해’가 판매된
1일 낮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독자들이 책을 구입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
<색채…>와 <노르웨이의 숲> 사이의 뼈아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하 <색채…>)는 민음사 쪽의 발표에 따르면 7월1일 발간 당일 교보문고에서만 5700권이 현장에서 판매되었다. 이벤트를 위해 쌓은 하루키 탑 옆으로 길게 늘어선 줄이 잇달아 보도되었다. 초판이 20만부였는데 열흘이 채 되지 않아 30만부 정도가 나간 것으로 추산된다. 전작인 <1Q84>(일큐팔사)는 1, 2, 3권 합쳐 200만부 정도(1권만 80만부) 팔려나갔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의 구입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산업적인 면에서의 변화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1Q84>는 문학동네가, <색채…>는 민음사가 출간했는데, 그에 따른 홍보와 마케팅 전략이 불을 뿜은 기점이기도 했다. 세련된 책 장정과 노벨문학상을 곧 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깊이’에 대한 이미지 전략이 주효한 셈이었다. 하루키라는 산업이 생긴 셈이다. 경이적인 초판 부수(민음사 쪽의 말로는 “초판 발행 부수로는 이번 책이 한국에서 가장 많은 게 아닐까 한다”)와 꾸준한 이슈몰이가 그 이후의 독자들을 담보한다.
<색채…>는 일본에서 출간 일주일 만에 100만부가 팔려 화제가 되었다. 책이 발간된 4월12일 도쿄 시부야구에 있는 서점 다이칸야마 쓰타야에서는 그날 자정에 카운트다운 행사를 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으로 사람 키만한 거대한 탑을 쌓은 광경, 혹은 매대 하나가 하루키의 신간으로 이루어진 광경은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었다. <아사히신문> 편집위원은 그날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아침에 서평을 썼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새 책’이라기보다 ‘신상’이 대대적인 홍보를 등에 업고 선을 보이는 방식과 유사하고, 팬의 열광이 보도되고 확대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라는 인상이다. 내용조차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예약판매 50만부. 이쯤 되면 베스트셀러는 ‘되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긴 제목 속의 다자키 쓰쿠루는 주인공 이름이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지금의 그는 철도회사에서 일하며 역을 만들고 고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새로 만나기 시작한 여자친구 사라와 대화를 하다가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스무살 즈음의 시간을 떠올린다. 그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네 명의 친구들에게서 ‘우리는 앞으로 널 만나고 싶지 않아, 말도 하기 싫어’라는 절교 선언을 받았다. 단호하게, 타협의 여지도 없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그렇게 가차 없는 통고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그 또한 묻지 않았다. 다섯 명은 나고야 시 교외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다. 남자가 셋, 여자가 둘. 다자키 쓰쿠루는 대학 진학을 하며 도쿄로 떠났지만 넷은 그곳에 남았다. 그러고도 아무 문제가 없던, 성공적인 공동체의 견실함을 유지한 다섯이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절교 선언이 떨어진 것이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고, 36살의 다자키 쓰쿠루는 생각하지만, 사라는 그에게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라고 권한다.
90년대에 하루키만 있었나
무라카미 류와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도 인기를 얻었다
한데 왜 그만 끝까지 남아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사회운동의 시대가 저문
199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일찌감치 하루키 붐이 불었다
시대·사회 말하는 한국 소설보다
말보로와 싱글몰트 위스키의
하루키가 매혹적이었다
<순례의 해>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리스트의 피아노 솔로 작품의 제목이지만 그와 동시에 다자키 쓰쿠루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망가진 과거를 탐색하기 위해 떠난 여정을 뜻한다. 그는 나고야로 가 두 친구를 만나고, 한 친구의 부음을 접하며, 마지막 한 명을 만나기 위해 핀란드로 향한다. 그러면서 성적인 것을 배제했다고 생각했던 두 여자친구에 대해, 특히 그중 한 명에 대해 갖고 있던 강한 성적 동경이 드러나고, 친구들의 결별 선언으로 인한 죽음과도 같던 삶을 부활하게 해준 대학 때의 후배 이야기도 잠시 등장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은 연애소설로 힘을 발휘한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하루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노르웨이의 숲>(한국에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을 떠올리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두 책 사이에는 흐른 시간만큼(<노르웨이의 숲>은 1987년 작)의 뼈아픔이 있다. 이제 30대 중반이 된 주인공은 고치거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어떤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서야 새롭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포장을 뜯어 버린 상품은 교환할 수 없거든.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그리고 얻은 답은, 사랑.
밀란 쿤데라가 지나간 자리에 그가 도착했다
출판산업에서의 하루키가 한국에서 이제야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했다지만 그 힘을 9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에 일었던 하루키 붐과 떼어놓고 말할 수는 없다. 90년대에 많이 읽혔던 일본 작가가 하루키만은 아니었다. 무라카미 류와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도 같은 시기에 인기를 얻었다. 무라카미 류는 갓 태어난 아기를 코인로커에 유기한 사건을 소재로 한 <코인로커 베이비스>, 골프가 소재인 <368야드 파4 제2타>,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한 세상의 변화와 인간 단절의 문제를 다룬 <공생충>, 축구에 대한 <악마의 패스> 등 다양한 관심사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했지만 점점 인기를 잃어갔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90년대의 독자층을 넓히지 못했다. 에쿠니 가오리는 여전히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독자층이 2030 여성들에 한정되어 있다. 자신의 세계를 계속 깊게 파고들어간(누군가는 동어반복이라고 느끼기도 하지만), 쉬지 않고 에세이든 단편이든 장편이든 꾸준하게 발표해온, 남녀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독자를 보유한 하루키가 갖는 힘은 그의 책의 종수만큼 넓고 깊고, 다소 복잡하게 작용한다.
한국에서는 밀란 쿤데라가 지나간 자리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착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렇다. 사회운동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87년 이후로, 9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세대는 대학에서 잉여 취급을 받곤 했다. 앞세대의 자신감(우리가 했다, 우리가 다 이루었다)이 성취감과 허무라는 양면을 지닌 동전 같은 꼬리표를 달고 대학을 떠나고 있었다면, 이제 남은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낀세대’로서의 자괴감 정도였다. 그게 대단히 애석한 일이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대학에서 연애라니! 사회를 고민해라!’라는 당위의 공간이었지만, 태반에게는 누가 이루었건 이제 자유로워진 곳에서 그에 걸맞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시기였다. 소설가 김이설씨는 1994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내가 수능을 본 첫 세대인데, 또한 신은경·이병헌이 엑스(X)세대로 나온 시기였다. 94학번인데 선배들이 무시했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위는 한 덩어리 같은데 나 이후는 개인이고 각개전투 같은 느낌이 강했다. 유대에 대한 필요성이 없었고, 느끼지도 않았지만 외로움은 짙었다. 데모와 거리가 멀어지는 세대였다. 우리 세대가 하루키를 좋아했던 이유라면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 허용되고, 그래도 상관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에반게리온>과 <러브레터>를 비롯한 일본의 영화는 당시 불법이었음에도 학내에서 심심찮게 상영이 됐고,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는 일은 인맥의 증명이었다. 90년대 중반을 20대로 살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지 않기란 물 위를 걷기와 같았다. 아무리 조심하면서 걸어도 결국은 그 안에 한번은 빠져 벗어날 수 없는.
말보로·달리기 등 라이프스타일의 매혹
왜 한국 작가가 아니라 일본 작가여야 했을까. 왜 그중에서도 하루키여야 했을까. 90년대 중반이 되었을 때, 사회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하는 게 더는 유효하지 않았다. 혹은 고민을 한다고 해서 인정받을 수는 없었다. 한국 소설에는 여전히 시대, 사회, 민족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던 만화가 김태권씨는 하루키가 파고든 틈새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 또래만 해도 양담배라고 해서 말보로를 피우는 것도 꺼림칙한 일이었는데, 하루키를 보면 말보로를 맛있게 피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말보로를 맛있게 피울 수 있었다는 식이다.” 대의명분에 눌려 있던 소비에 대한 욕망과 취향을 갖고 싶다는 열망의 통로로, 하루키는 누구보다 매혹적이었다. “당시 하루키 하면 말보로와 싱글몰트 위스키 아니었을까. 거기에 더해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소설가도 더해지고.” 미국 문화에 대한 하루키의 감식안은 일종의 취향의 교과서 구실을 했다. 재즈 역시 그 일부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기 위해서는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사유와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알아야 했는데, 하루키를 읽는 데는 20세기의 미국이면 충분했다. 세대를 이어 축적되어온 무엇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고상한 어떤 것을 하루키가 주고 있었다. 하루키 역시 야나체크와 리스트를 비롯한 클래식 음악을 책 속에 등장시키지만, 음악의 구조 자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며 이야기와 연결짓지는 않는다. 그의 독자는 하나의 아름다운 배경음악을 큰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하루키는 그 자신이 좋아하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트루먼 커포티, 레이먼드 카버,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번역해왔고, 에세이나 소설 속에서도 좋아하는 작품들을 언급했는데, 문학자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일일지 모르지만 하루키 덕분에 그 작가들을 알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알았다는 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90년대 말,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한 지인은 새벽에 일어나고,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하루키의 무언가에 다가가고자 했다. 그녀는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집을 영문으로 몇 권 샀는데, 결국 책을 갖는 것과 읽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과 달리기 능력과 글쓰기 능력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깨닫는 것으로 소설가의 꿈에 작별을 고했다.
그러니 라이프스타일로 하루키가 ‘소비’되었다는 것은 누명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는 현실직시에 가깝다. 하루키 책에는 ‘먹고사니즘’이 없다. 삼십대의 주인공은 스스로 평범하다고 생각하지만 여자에게서 잘생겼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운동을 꾸준히 하며 몸을 단련했고, 클래식이나 재즈를 들으며 파스타 면을 삶는다. 섹스는 어렵게 구슬려야 가능한 미션이 아니고 데이트 서너번이면 당연하게 이어지는 일과다. 사회의 압박이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을 이유로 매일의 노동에 종사하며 그 굴레에 치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먼 북소리’를 듣고 불현듯 여행을 떠나는 삶. 그 모든 게 그냥 일상의 한 부분으로, 하루키 책을 통해 다가왔다.
누구나 한 권쯤 가슴에 품은 하루키 소설
소설가 김미월씨는 소설을 쓰다가 막힐 때 90년대에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하루키 단편집을 꺼내 아무거나 읽는다. “하루키의 단편을 읽어보면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멋진 이야기를 뽑아낸다. 큰 욕심 안 내고 일상의 한 조각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데서 용기를 얻는다고 해야 하나. 중요한 건 이거다. 그런 사소한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을 때까지 이게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 이야기라는 걸 독자가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매일 오르내리는 아파트 계단에서 휘청할 때, 순간 일상의 기묘한 틈을 발견하는 것 같은 아찔한 순간에 대해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하루키 아닐까. 막상 써보면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라는 ‘현상’을 빼고 작가 하루키를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하루키가 특정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예전에는 쿨한 사람들이 읽었고, 지금은 쿨한 사람들이 외면하는 분위기. 유행의 첨단에 있는 작가는 아니라는 식인데, 새 책이 나왔다고 서점에 줄을 세울 수 있는 작가가 하루키밖에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음악 칼럼니스트 김윤하씨는 일본에서 살 때 본 풍경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일본에 있을 때 하루키 생일을 기념하는 이벤트로, 서점에 특별 코너를 만들어 행사를 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고 그냥 잘나가는 대중 작가니까. 고등학교 때 처음 하루키를 읽었고, 대학 때 문예창작과에 가서야 하루키를 읽는다는 게 특정한 이미지를 상징한다는 걸 알았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달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루키도 나도 나이들면서 더 좋아진다는 느낌이다. 하루키 사춘기를 지난 것 같은. 그래서 이제 얘기할 수 있다.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담론이 쏙 빠진 채 이야기되는 하루키 ‘현상’을 김윤하씨는 서태지에 비유했다. “실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겉에 드러난 다른 요소들과의 화학작용이나 제3의 이야기에 더 열광하고 집중한다. 소설 자체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화려한 것들에 가려졌다. 하루키가 새롭지 않다고 하는데, 40여년간 글을 써온 꾸준함과 거기서 기인하는 대중의 애정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다. 누구나 가슴에 하루키 책 한 권쯤 품고 있는 것 아닌가.” 오랫동안 끓인 찌개의 따뜻하고 친근한 맛. 방송인 윤서희씨는 책을 예약주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십대 초반에 <노르웨이의 숲>에서 느꼈던 그 스무살의 느낌을 하루키의 소설마다 시리즈로 느끼면서 열광하게 된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쿨한 사람들이 읽었고
지금은 쿨한 사람들이 외면한다
유행 첨단 작가가 아니라는 건데
서점에 줄 세울 수 있는 작가가
그밖에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루키는 한국서 불행한 작가다
진지하게 논의될 기회가 없었다”
작가 하루키는 설 자리 잃었다
그를 읽는 이유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씨는 문화적 현상에 한정해 하루키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효가 다 되었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 사회의 2030 문화는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서 그런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루키에 대한 호오를 드러내는 것이 자기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게 안타깝다. 하루키에 대한 말은 많지만 그게 보여주는 것은 하루키가 아니라 그에 대해 말하는 우리 자신일 뿐이다. 하루키는 한국에서 불행한 작가다. 진지하게 이야기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옴진리교 사건과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기점으로 <해변의 카프카>부터의 하루키의 변화와 소설가로서의 기술적 완성도다. “하루키는 동시대 스토리텔러 중에서 베스트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 이야기를 쓰고 문장을 구성하고 끝까지 끌고 가는 기술적 측면, 서사를 건축하는 장인으로서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경지에 도달했다. 이야기의 깊이, 문학적 사상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단편에서는 체호프와 헤밍웨이를 잇는 작가들 중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담백하게 일상을 이야기하는데 서늘한 느낌이야말로 하루키의 작품이 단순히 일본과 한국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나라들에서도 널리 읽히는 이유일 것이라고 전했다.
열광과 유행, 마케팅을 넘어 소설과 대면하자
그러니 세련되어진 마케팅과 홍보의 기술만으로 현재 하루키가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경향을 말할 수 없다. <에스비에스>(SBS) 라디오 피디인 이승훈씨는 <태엽 감는 새> 이후 오랫동안 하루키를 읽지 않다가 <1Q84>를 읽으면서 그가 달라졌다고 느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전에는 하루키 소설을 읽으며 그가 타인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 자기 외에는 다 오브제같이 그린다는 것 아닐까 했을 정도로. 이야기의 힘은 자기 내면도 있지만 관계라는 것에서 오는 건데, 인간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1Q84>에 이르면 이것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이 나온다. 어렸을 때 연애를 하면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지 않나. 성숙하면서는 상대를 바라볼 줄 알고. 그런 변화가 있다고 생각했다.” <1Q84>를 펴낸 문학동네 염현숙 국장은 하루키 붐이 마니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닌 대중성을 얻게 된 데 마케팅의 힘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에세이보다 압도적으로 장편소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를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언론과 문단에서 ‘사건’으로 보고 주목하는 판매 부수나 늘어선 줄의 풍경 뒤에서 실제로 책을 사고 읽는 사람들과 그들이 읽는 이유에 대한 이유는 이제부터 풀어가야 할 수수께끼다. 소설가 김미월씨는 “상관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이라고 운을 떼고는 치료를 위해 방문했던 한의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다니는데, 치료를 받는 동안 한의사와 할 수 있는 얘기가 없었다. 그러다 그녀가 작가인 걸 한의사가 알게 되어 어느 작가를 좋아하는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알 만한 작가가 누가 있을까 생각하는데, 그 사람이 하루키를 알더란다. 아니, 아는 정도가 아니라 하루키를 다 읽었다고 한다. 장편소설을 특히 좋아하고, 책을 안 읽는 동료 의사들도 하루키는 다 읽는다고 들려주었다. “내 세대도 아니고 80년대생이었는데, 그게 참 신기했다. 군대에 간 후배는 <1Q84> 다음 권을 읽고 싶어서 휴가를 기다렸다고도 하더라.” 비슷한 이야기는 소설가 김이설씨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친구 남편이 육아일기를 쓰는데, 거기에 하루키에 대해 썼단다. “얘야,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야.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단다. 너도 언젠가 이 글을 읽고 하루키를 읽길 바래.”
타자를 이해하고 있고 그로부터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은 소설 속 삶의 방식을 소유하고 누리는 데서 오는 쾌감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지복이다. <색채…>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나한테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개성도 없고 선명한 색채도 없어. 내가 내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게 오래전부터 품어온 문제였어”라고 마침내 찾아낸 과거의 친구에게 고백하고, 결국 그가 사랑하는 이에게서는 “자기는 단순한 인간이 아냐.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책을 읽는 독자가 망가져버린 과거를 향해 떠나는 그 자신의 순례를 상상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꿈이건 사건이건 비일상을 통해 일상을 통렬하게 깨닫고 다시 손에 꼭 쥐게 만드는 힘은,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만이 갖는 특권이 아니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90년대의 열광과 라이프스타일의 유행, 21세기의 마케팅을 넘어서, 하루키가 아닌 하루키의 소설을 대면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