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다. 일 년 열두 달 늘 바쁘게 살더라도 나와 내 가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절이다. 한데 다른 해의 오월 같지가 않다. 국민신드롬이나 국민우울증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온 세상의 기운이 착 가라앉아 있다.
청주교도소 한 죄수의 눈물
국내 최대 규모의 여객선이 왜 침몰했는지 원인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사고가 난 후에도 제대로만 대처했다면 모두 살릴 수 있었던 300여 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잃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사망자와 실종자의 대다수가 이 오월에 막 피어나는 신록과도 같은 열여섯 살, 열일곱 살 아이들이란 점이다.
이런 신록의 계절에 모처럼 작은 감동을 느껴본다. 청주시내에 위치한 상당공원 '속죄의 나무' 사연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 1982년, 겨울이 막 시작되려는 늦은 가을이었다. 당시 충북대학교 임학과에 재직 중이던 김홍은 교수에게 청주교도소로부터 강의를 부탁한다는 연락이 왔다. 이른바 죄수들의 교화교육이었다.
교도소 강당에 모인 150여명의 죄수들 앞에서 김 교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화전민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강의를 마치고 난 후, 맨 앞줄에 있던 죄수 한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교수를 향해 외쳤다.
"지금 제가 갖고 있는 전 재산입니다. 교수님 강의 덕분에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통장의 만원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 교수는 거듭 사양했지만, 죄수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고 간절해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그에게 받은 만원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뭔가 의미 있는 일에 쓰고 싶었던 것이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나무를 사서 심기로 했다.
마침내 봄이 오자, 김 교수는 묘목장에서 6년생 느티나무 두 그루를 구입해 청주시청 산림녹지과 후배와 상의해서 볕이 잘 드는 상당공원 한쪽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나무를 심은 지 몇 달이 지나자, 만원을 주었던 그 죄수가 퇴소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해 5월 초 새벽, 출소하는 그를 찾아가 반갑게 해후한 김 교수는 말했다.
"자네에게 보여줄 것이 있네." 김 교수는 그 길로 상당공원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보여주었다.
"자네가 준 만원으로 올 봄에 심은 두 그루의 나무일세. 앞으로 살아가면서 삶이 힘겨워 화가 날 때면 이 나무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게. 자네의 속죄의 마음이 담긴 이 나무가 그때마다 견디어 낼 용기를 줄 걸세."
그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 앞에서 한참을 울다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사연이다. 올해로 벌써 수령 38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그 나무의 이름은 '속죄의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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