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령......
왜 하필 광주였나요?
2만 명이 넘는 군인들이 인구 73만 명의 도시에 집중된 이유는?
구타와 폭행을 넘어선 학살은 무엇으로 설명될 것인가?
5월 21일(석가탄신일) 전남 도청 앞, 계엄군의 집단 발포는 누구의 명령인가?
교통과 통신을 두절시키고 광주를 고립무언의 지역을 만들어
시민군을 폭도로 오도하면서
4곳 이상에서 무차별 사격으로민간인을 학살한 비극을
사실을 사실로 알리지 못한 신문과 방송국은......
언론이 사라진 세상에서 보호받지 못한 무고한 시민들이여!ㅠㅠ
5월 26일 시내로 재진입한 계엄군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감행한 항쟁지도부
외신기자회견을 가질 때 통역 기자 '인요한(당시21세)'은 윤상원 대변인의 말을 전한다.
북을 향한 총이 왜 남을 향하는지 모르겠다며,
윤 대변인은 글라이스틴 주한대사에게 전화를 요청했으나 중재요청을 거절당했다.
계엄군은 시내 전화선을 모두 끊었고 200명의 시민군이 남은 도청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5. 27진압작전(이른바 '폭도소탕작전") 때문에 그들은 30분 만에 새벽이슬로 쓰러져갔다.
미 항공모함 두 대가 부산에 왔다는 사실에 시민들과 기자들은 기대했으나,
미국은 정반대로 움직이면서 학살을 방조했다.
당시 주한대사와 미국무부차관이 주고받은 1980년 5월 9일 비밀전문에는
'한국정부의 비상계획을 반대해서는 안된다는데에 동의한다'는 구절이 보인다.
5.18을 계기로,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여긴 미국에 대한 믿음은 불신으로.
광주를 진압한 전두환은 그해 9월 대통령에 취임한다.
광주(1980.12)와 부산(1982.3.), 그리고 서울(1985.5.)에 소재한 미문화원의 점거농성과
이재호, 김세진 서울대학교 학생의 분신(1986.4.)이 있었던 이유는?
당시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은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88년 국회 청문회 증인 참석을 거부했다.
이제 다 밝혀졌다고 생각한 5.18의 정작 중요한 것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광주MBC자료> 동영상을 요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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