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리 고....♡/언 어 와 문 장

호외 - 청개구리

moon향 2015. 10. 12. 10:38

1.

  전쟁 같은 삶, 현생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은 정말 전쟁 같을까요? 전쟁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아마 그리 말하는 거겠지요. 비유라는 게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가장 유사한 상황, 혹은 이미지와 눈 앞의 일을 빗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전쟁 같은' 벅찬 삶을 빗댄 말이지 그와 동일한 것임을 말하는 것은 아닌 셈이 됩니다.

  오늘 저에게도 전쟁과 흡사한 8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제 전장은 늘 공사 현장입니다. 숙소에 엎드려 글을 쓰는 등 뒤 창밖으로는 거푸집이라 불리는 가설재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막 몸을 뽑아올리기 시작한 두 동의 건물이 낮동안 볕에 달구어진 몸을 식히고 있습니다. 이곳은 양평에 속한 용문이라는 곳입니다. 현장이 산 속이라서 마땅한 식당이 없으므로 면내에 나가 해장국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막 돌아옵니다. 몸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으므로 웃통을 벗고 드문 인적을 핑계삼아 자유롭게 퍼질러 앉아있기도 누워있기도 합니다.

 여긴 뭔짓을 한다해도 좀처럼 들키지 않을 만큼 외진 곳이라서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따위는 없습니다. 그런 감정들은 사람 사이에서나 느끼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두서도 없이 두런두런 주변을 펼쳐놓게 되는 것은 저 역시도 달리기 위해선 일종의 도움닫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준비가 되고도 곧잘 뜸을 들이는 인간은 그쯤의 두려움과 소심함으로 점철된 종족이기 때문이겠지요.

 

2.

  습작기란 어떤 동안을 말할까요. 가끔 어느날 느닷없이 별다른 노력도 없이 작가가 되어버렸다는 사람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만, 전 그들의 '느닷없이'란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글이 좋아서 쓰고 즐기는 동안 본인도 인식하지 못하는 훈련의 시간을 경험했으려니, 그 시간이 즐겁고 유쾌해서 딱히 동안이라는 한정을 두지않아도 될 만큼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걸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될 터이므로 이치에 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비유들이 대체로 이런 식이라는 것 이해하셔야겠죠.

  제게 습작기란 글감, 혹은 싯감을 두리번 거리면서 찾아다니는 시간입니다. 소재를 찾았다고해서 시가 완성되지는 않으니까 두드리고 구부리고 내게 최적화 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번에 되지 않으니 동일한 텍스트를 오래, 몇 년에 걸쳐 다시 쓰고 또 쓰기도 하죠. 이것을 우린 과정이라 부르고 이것들이 쌓이면 습작기라 부를 수 있겠죠. 뼈를 깎는 시간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는 것을 보면 그 시간이 그리 녹록치는 않은 모양입니다. 최근의 저는 시적 소재나 글감들을 찾아다니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찾아듭니다. 오래 무엇에 매달리다보면 그것에 최적화된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달리 말하면 그때까지 가야 합니다. 즉 글을 쓰는 사람은 사는 동안은 늘 어느 한 구석에서 글을 향해 곤두선 집게 따위가 그것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죠.   

  근사한 표현 하나가 떠오른대도 그것을 담을 그릇(시적 인식이라 할까요) 이 채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곳만 반찍이게 됩니다. 전체의 조화가 한 줄의 빛나는 표현보다 힘이 셉니다. 그것을 유기성이라고 다르게 말할 수도 있고요. 전체의 조화만 있다고 해서 글이 환해지는 것 만도 아닙니다. 몇 개의 발견으로 치부될 표현들, 성찰적 시선, 내면을 휘돌아나오는 문장들, 세상을 어루만지는 손길들, 갈등하는 주체, 이들 중 절반쯤은 한 작품 안에서 공존해야겠죠.

  마침내 그런 결과를 얻어냈다고 치기로 합니다. 축하 받기 마땅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성과를 본인이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요? 그렇다면 어느 지경이 잘 된, 빛나는 지점인지를 알아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남의 작품에서 빛나는 부분을 잘 보이는데 본인 것은 잘 안보이기 마련입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나를 비평할 수 있는 시선은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가지의 타자화, 객관화래도 좋을 관찰자적 시선이 필요합니다. 오래 타자의 글과 자기 자신을 읽으세요. 한 발을 들고 오래 서 있을 수 있는 경지는 자신의 몸을 이해할 때 가능해지죠. 내 글의 자세나 버릇, 문장의 습성, 구조 등을 본인이 깨달을 수 있다면, 그래서 좋고 나쁨이 끄덕여지는 순간이 오면 시는 훅, 한 순간에 자기를 내어줍니다. 단 한번에 훅이 아니라 여러 번, 순차적으로 말이죠. 더러 그 과정을 지나는 동안 말을 잃기도 하고, 넌더리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밀어가는 것, 그게 글의 처음이자 중간이자 마지막입니다. 글에서 끝이란 없어요. 과정 자체가 작품의 전체가 되는 거지요.

  오랜 과정은 마침내 자신에게 자동적 조절체계라는 묘한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좋은 글이 되는 a,b,c,d의 요소들이 균형을 잡는 몸처럼 반응하며 구체화 됩니다. 순간의 느낌일 뿐인데, 눈으로 날아드는 벌레를 피하는 눈꺼풀의 반응처럼, 그것은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고 또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이 빨리 오기를 기대하려면 그런 준비된 자세(습작)를 오래 유지하는 한편 문장으로부터, 세계로부터 예민해야 합니다.  오랜 습작기는 그런 자동화 기능을 생래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몸은 일을 하고 생각은 생각대로 몸을 관장하다가 무언가를 나꿔 채는 것, 그 나꿔챈 것을 주물러 한 덩이의 생물로 생명을 불어넣는 것, 이 과정이 습작기라 부르는 동안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제게도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컴의 한글을 열고 무슨 말이든 꺼내놓고 첫 문장을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땐 지금보다 갑절은 두서없이 바빴고 비몽사몽이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을 줄이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사느냐는 주위의 핀잔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혼의 대부분이 그쪽으로 매달린 상태니 그렇게 보이는 거죠. 연습이란 그런 무식한 방법들을 통으로 말하는 걸 겁니다. 딱히 쓸 게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이든 써보려는 몸짓, 아우성, 악다구니.... 이런 날들이 쌓이고 쌓아면 tv프로 생활의 달인 쯤에서나 보는 어떤 경지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게 펼쳐지는 것이죠.

  반복할까요? 그게 무엇이든 동일한 성질의 것을 수년 간 다루다보면 우린 그것의 형질이나 성격, 그것이 내 손에 반응하는 정도, 내가 그것과 만드는 일종의 간섭과 버릇 따위가 생겨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겁니다. 거기까지 가야 하고, 간절하다면 노력여하에 따가 갈 수 있습니다. 여러 여성들이 별 고민도 생각도 없이(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하지만) 파를 썰고 고기를 다지고 순서를 딱히 고민하지도 않고 불의 크기도 대충 넘겨짚으며 하다보면 요리랄 것이 끼니마다 생겨나잖아요. 남의 집에서 빌어온 남편이야 음식타박을 하며 투덜 대지만, 내가 낳아서 오로지 내 음식만 먹은 자식들은 그게 그중 맛난 음식으로 알기도 할만큼으로 말이죠. 이런 자동조절되는 요리의 경지는 여러분이 아시는 시, 혹은 글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루에 세 번 씩 컴 앞에 앉으시면 됩니다. 그럼 자기만의 시를 요리하실 수 있게 됩니다. 냉장고 구석에 남아있는 것들을 쓸어넣고 찌개를 끓이듯 마음 어느 한켠에 맴돌던 단어 하나를 도마에 올려 놓으시면 됩니다. 칼질도 그렇습니다. 재료에 따라 우린 써야 할 칼의 종류와 썰기 법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겨우리만큼 오래 요리와 함께 했으니까요. 그러니 늘 같은 방법이 아니에요. 주 재료에 따라 요리법이 달라지듯 구현의 방식(쓰기) 또한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식입니다. 당신이 아끼는 숨겨놓은 말은 오래 당신의 내면에서 구르고 치이던 말이니까 당신은 어떻게 썰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모르시겠다면 처음 양파를 다듬던 시절을 떠올리세요. 도대체 어디까지가 양파의 껍질인지 알 수 없었던 시절, 혹 기억하시나요? 누군가 양파의 껍질은 어디까지라고 가르쳐 주던 적이 있었나요? 아니라면 양파를 까다가 스스로 체득했듯이 막 꺼내 놓으신 말의 어디를 어떻게 다루어야 그중 말의 본바탕이 드러나는지 더듬어 보세요. 몇 개의 양파를 소비했듯이 당신은 몇 번 말을 잘 못 다루다가 버릴 수 있음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당연하죠. 어찌 안 그럴 수 있겠어요. 실패를 끄덕이셔야 다음의 실패를 미연에 줄일 수 있어요. 매일 하루에 세 번 씩 조금은 다른 요리를 장만하려 애쓰던 속성처럼, 새로운 말들을 섞어 미지의 영역에 자신만의 요리법을 펼쳐내시면 됩니다.

 

3.

  전 여러분께 요리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을 해도 또 더 할 요리가 생기듯, 숱한 이들이 쓸고간 시세계에도 글감은 결코 줄어드는 법이 없습니다. 매운탕을 위해서 미리 재료를 준비하듯이 또 그에 마땅한 글엔 나름의 준비물들이 필요합니다. 말은 책상서랍이나 야채가게나 어물전에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여러분의 혀 밑에 가슴 근처에 뇌피의 어느 주름 속에 끼어있지만, 여러분이 간절히 필요로 할 때, 마치 초장이 없어서 식초와 설탕과 고추장을 섞어 초장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또는 사이다와 물엿과 고추장을 얼러 초장 비슷한 것을 버무려내듯이 진정 궁한 이에게 말은 휘어지고 복무할 겁니다. 여러분이 끼니마다 굶지 않으려는 자세를 견지 하듯이 시에게도 그러하신다면 말입니다.

 

4.

  좋은 시란 자기의 식으로 자기의 시선을 지극히 자기스럽게, 다만 시라는 그릇이 가진 양식과 소양으로 구체화시켜서 내어놓는 겁니다. 요리사가 자기의 음식을 설명하지 않듯이 시인도 자기의 시를 독자에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음미는 차후의 일이죠. 당기는가, 감각을 자극하는가, 자기만의 것인가, 눈 앞에 펼쳐지는가 등등이 다 지난 뒤에 어떤 말을 하고 싶었군....등등의 이해하는 과정이 따라붙듯이, 그러니까  첫느낌으로 치부될 선자들이 없다면 의미하기인 후자 또한 없게 됩니다. 그 이전에 내가 즐겁고 만족하지 않는다면 밖으로 나가 펼쳐지지도 않는 세계가 될 겁니다.  

  누가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해서 그의 유산을 받을까요. 결국 대상과 가까이 하는 자가 그의 상속자로 남게 되는 거죠. 이 진리는 그러므로 진리입니다. 더러 천부적으로 요리적 인간이랄 부류도 있겠으나, 그의 혼자 남은 밤의 몹시 뒤늦은 잠자리를 당신은 간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