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 詩.....♡/떠 오 르 는 詩

[2015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임지은

moon향 2015. 6. 18. 14:37

[2015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개와 오후 - 임지은

 

 

둘둘 말아놓은 오후는 옷장 밑으로 굴러 들어간다

꺼내려 할수록 깊숙이 처박힌다

개가 인형을 물고 뜯는다는 것은

산책이 필요하다는 신호

나는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시계에서 꺼낸 숫자를 개에게 던져준다

그러자 한 시이면서 세 시인

게으르면서 일곱 시인 개가 다가와 얼굴을 핥는다

개의 혀는 무섭도록 따뜻하고 돌기가 있다

차가운 음료에 맺힌 오후가

개의 콧잔등을 적신다

 

먼지를 뒤집어쓴 개는

손바닥만 한 햇빛을 베고 잠이 든다

나는 숫자가 다 떨어진 시계를 쳐다본다

언제 발끝에 오후가 물들었는지 지워지지 않는다

비누처럼 미끄러운 것이 필요하다

 

한 시야, 세 시야, 얼어붙은 일곱 시야

아무리 불러도 시계는 움직이지 않고

검은 개만이 일어나 눈앞에 놓인 오후를 삼켜버린다

오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이 나 있다

으르렁 소리를 낸다

순식간에 문밖으로 달아난다

 

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후를 보낸다

일 년이 넘도록 개는 돌아오지 않고

낮은 문턱이 있는 방바닥을 쓸어본다

읽을 수 없는 숫자처럼 생긴 털들이 잔뜩 묻어난다

 

나는 털을 뭉쳐 조금 늦은 한 시를 만든다

신발이 벗겨진 세 시를 만든다

처음 보는 시간들로 시계를 가득 채운다

오후가 조금 다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늘을 머리끝까지 덮고 잠이 든다

꿈속으로 검은 개가 찾아온다

개는 꼬리를 흔든다

뜨거운 오줌을 싼다

발끝이 하얗게 물들어서 지워지지 않는다

죽음처럼 축축한 것을 입에 물고 있다

 

 

 

모르는 것

 

 

이 작고 주름진 것을 뭐라 부를까?

가스 불에 올려놓은 국이 흘러넘쳐 엄마를 만들었다

 

나는 점점 희미해지는 것들의

목소리를 만져보려고 손끝이 예민해진다

잠든 밤의 얼굴을 눌러본다

 

볼은 상처 밑에 부드럽게 존재하고

문은 바깥으로 향해 길어진다

엄마가 흐릿해지고 있다

자꾸만 사라지는 것들에게 이름표를 붙인다

 

미움은 살살 문지르는 것

칫솔은 관계가 다 벌어지는 것

일요일은 가능한 헐렁해지는 것

 

비에 적은 현관을 닦는 수건은 나와 가깝고

불 꺼진 방의 전등은 엄마와 가깝다

방바닥에 오래된 얼룩을 닦는다

엄마 비슷한 것이 지워진다

 

나는 리모컨을 시금치 옆에서 발견한다

쓰다 만 로션들이 서랍 속에 가득하다

며칠째 같은 옷을 입고 텔레비전을 켠다

 

채널을 바꾸려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를 방 안에 넣고 다음날까지 잊어버린다

 

 

 

생선이라는 증거

 

 

욕조에 잠긴 나는 팔과 다리를 잃었습니다

멸치들의 대화가 들려왔습니다

수족관에 갈치와 고등어는 모두 죽었답니다

울음에서 어떻게 걸어 나가죠?

 

나는 늘 진심이 모자랐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입을 가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내게서 비린내가 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계단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앉아 있던 의자가 축축하게 젖어 있을 때마다

나는 나를 의심했습니다

 

입안에서 돋아나고 있는 짧은 가시와

아침이면 배갯잇에 수북이 쌓인 비늘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바짝 마르고 싶은 심정으로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한 번만이라도 불러주었더라면

생선이 되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요

 

기분은 왜 물 위에 뜨지 않고

멸치들은 모두 배수구로 빠져나가고

창밖으로 밤이 흘러넘쳤습니다

물에 녹은 손금이 모르는 방향으로 뻗어나갔습니다

 

누군가 나를 발견한다면 그는 희귀한 낚시꾼으로 불리게 될 테죠

 

몽은 하얗게 썩고 있지만

이제 막 생겨난 지느러미만은 빛나는

온몸을 진심으로 뒤덮은

목상 냄새가 나는

날씨는 잊은

 

나는 다가오는 금요일 욕실에서 발견될 것이지만

생선에게 미래 따위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피망

 

 

괜찮아? 너는 비스듬히 물어봤다

나는 피망, 이라고 했다

, 그러니까 나는 피망은 피망이라고 했다

너는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피망이 먹고 싶을 뿐이었다

우리는 함께 피망을 사러 갈 수도 있었다

한밤중에 야채 가게는 문을 닫았고

우리는 야한 짓을 하러 갈 수고 있었다

 

피망은 왜 아직 무뚝뚝할까

내가 여자고 네가 처음인 것처럼

너는 겨울이고 나는 서툰 것처럼

우리는 이제 그만 다른 것이 되고 싶었다

내가 피, 하고 발음하면 너는 망,

, 이라고 발음하면 썹, 이라고 대답했다

눈물이 되진 않았다

누리는 흘러내리지 않으려고 서로의 얼굴을 부둥켜안았다

 

아무도 피망을 먹지 않는다면

냉장고 속에 피망은 새까맣게 썩을 거야

우리는 피망의 입장에서 피망의 미래를 걱정했지만

설령 지금 우리 앞에 검은 피망이 있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까?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게 우리를 더 아프게 할 테니

우리는 달라지지 않기로 했다

내일이 오면 피망 같은 건 주머니 속에 넣고

각자의 길로 미끄러질 테니

후회를 문질러 씩씩해지는 방식으로 우리는 길어졌다

짧아졌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피망

헤어지자는 말 대신 피망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들어오면 너는 건너갔다

나는 힝힝 말이 우는 소리를 흉내 내며

신호등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봤다

신호등의 심장이 사라지고 있었다

피망이 피망인 채로 서 있는 동안

냉장고 안의 차가움이 우리 사이를 가로질러갔다

 

 

 

 

검정비닐

 

 

   오른손과 왼손 사이에 수많은 햇빛이 끼어든다 달아나는 그림자의 손을 잡으려면 햇빛보다 빠르게 걸어야 한다

 

   사과는 사과 그림자와 함께 맛있어진다 비둘기는 눈앞에 그림자를 꼭꼭 찌른다 아이는 축구공처럼 그림자를 걷어차 버릴 수 있다 나는 그림자를 비닐봉지에 구겨 넣는다

 

   검정비닐 안에서 그림자는 구름이 된다 기린이 된다 안경이 된다 풍선이 된다 아무도 없는 복도가 된다 무수히 변신하는 그림자 흉내 내느라 나는 팔다리가 길어진다 눈웃음이 많아진다

 

   거짓말을 꺼내려고 검정비닐을 풀어 헤친다 모자는 새가 될 수 있다 모자가 되려던 그림자가 날아오른다 나는 검정비닐로 된 모자를 쓴다 그림자가 머리카락으로 흘러내린다

 

   발밑에 빗물처럼 그림자가 고여 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든다 그림자는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상한 우유처럼 흐르는 저녁 검정비닐을 뒤집어쓴 고양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주머니가 다 젖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 반쯤 찢어진 그림자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

 

 

 

 

임지은 - 1980년 대전 출생.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