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들꽃 - 윤흥길
( moon향 읽음)
아들과 함께 읽은 이 책은 중학교 추천도서다. 어느 출판사의 중학 교과서에 실린 단편이기도 하다. 길지 않은 내용이기에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엔 한국전쟁 중 흔한 이야기로 보였던 것을 몇 번 읽고 필사를 하다보니까 가련한 소녀의 짧은 생이 마치 세월호와 함께 사라져버린 경기도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그것처럼 허무하게 다가왔다.
한 소년이 들꽃 같은 소녀 '명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지막이 속삭인다. 한국전쟁 중에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지저분한 남자 아이를 만나 자신의 집에 데려오지만, 후에 알게 된 명선은 계집아이였다. 소년은 때꼽재기를 달고 있는 녀석의 서울 말씨에 낯선 정서를 느낀다. 그의 어머니는 밥을 축낼 아이를 데려왔다고 지청구를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금반지 하나를 내밀며 밥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된다. 소년의 집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부모가 피난길에 죽었고 어쩌다가 숙부를 놓친 사연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녀가 내놓았던 금붙이 하나의 유효기간(?)은 금방 끝나버렸다. 머슴처럼 써 보려고 잡일을 시켜봤자, 실실 빠져나가기만 하고 천방지축으로 동네를 싸돌아다니고 놀기만 하면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밥 세끼를 요구하는 그녀다. 소년의 어머니는 이제 처치하기 곤란한 짐짝 같은 거지아이를 어떻게 떼어낼까 생각하며 명선을 타박한다.
미운 오리새끼로 전락한 명선은 금반지 하나를 또 내밀면서 땅바닥에서 주웠다고 한다. 이것으로 인해 소년의 부모는 그녀가 분명히 다른 금반지도 갖고 있을 거라는 짐작으로 자꾸 추궁을 하자, 그날 밤 명선은 소년의 집에서 도망친다. 식구들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금품을 생각하며 그녈 붙잡기 위해 사방팔방 헤맨다. 동네에는 명선이의 금붙이에 대한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졌다. 다음 날 마을의 높은 나무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꺼이꺼이 소릴 지르는 알몸의 그녀가 발견되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질색을 하며 나무에 올라가 그녈 구해 내려온다. 소년의 어머니가 헐벗은 그녈 치마폭으로 감싸면서 보니까 그녀의 가슴께에 패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이 의미심장한 패를 읽은 그들은 그녀를 데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이제 여자아이의 옷을 입게 되었다.
만경강 다리라는 교각이 마을에 있다. 북쪽에서 이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자연 그 마을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마을 꼬마아이들의 눈으로 볼 때는 세상에서 가장 긴 그 다리가 무시무시한 폭격으로 끊어졌다. 그들은 어른들의 걱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위험천만한 그곳에서 놀이를 한다. 소녀는 위태로운 다리 끝에서도 겁을 내지 않고,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곡예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그를 그녀는 겁쟁이라고 놀려댄다. 거대한 교각 바로 위 무너져 내리다 만 콘크리트 더미에서 그들은 꽃송이 하나를 발견한다. 바람을 타고 온 꽃씨 한 알이 두껍게 쌓인 먼지 속에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그녀가 꽃이름을 물어보자, 소년은 잘 모르면서도 마음대로 이름을 지어 “쥐바라숭꽃······.”이라고 가르쳐준다. 그녀는 앙증맞은 노란 꽃의 이름을 부르며 좋아한다.
명선이의 의미심장한 뒷배경을 짐작하면서 그녈 상전 대접하면서 데리고 있는 소년의 부모는 온갖 지혜를 짜내어 그녀가 어딘가에 더 가지고 있을 금붙이들에 대해 알아내려 해보았으나, 금반지 얘기 언저리에만 닿아도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버티곤 했다.
그 부서진 다리에서 어느 날엔가 그녀는 또 곡예 장난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 때 그들의 머리 위로 굉장한 폭음이 울렸다. 비행기 편대가 떠가고 있었다. 다른 것은 도무지 무서워할 줄 모르면서도 유독 비행기만은 병적으로 겁을 내는 서울 아이한테 눈길을 주었을 때, 보이는 것은 멀어져 가는 들꽃 한 송이. 그것이 바로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소녀의 죽음 이후, 소년은 엿가락처럼 두 동강 난 만경강 다리 위에서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곡예를 연습한다. 녹슨 철근들을 무서워하면서도 그녈 추억하면서 한 뼘 한 뼘 건넜다. 결국 그 일을 해내고 말았다. 그들의 밀어였던 “쥐바라숭꽃”도 이젠 소년을 겁쟁이라고 놀리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때 소년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구부라진 철근의 끝자락에 끈으로 동여맨 조그만 헝겊 주머니였다. 일전에 그녀가 이름모를 꽃을 꺾을 때보다 더 위태롭게 다가갔다. 가슴을 죄는 긴장감 때문에 소년은 가쁜 숨을 참으면서 그 주머니를 손에 넣은 후 열어보았다. 동그라미 몇 개가 빛을 발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잡아보려는 순간 그것은 아스라이 강물에 떨어지고 말았다. 들꽃 한 송이처럼······
지난 주말부터 월요일까지 사흘간 틈틈이 <기억 속의 들꽃>을 필사하였다. 오랜만에 타자를 하다보니까 굳은 손가락들과 어깨가 뻑뻑해졌으나, 필사를 해놓고도 오타와 띄어쓰기 같은 부분을 살피느라 이 단편을 5번 이상 읽었다. 읽고 또 읽을수록 애잔한 이야기다. 명선이가 전쟁 통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보니, 작고하신 권정생님의 <몽실언니>의 애환이 떠오르면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이 소설이 후반부에서 더 길어졌다면, 소년은 전후의 삶을 무겁게 살았을 것이다. 황순원님의 <소나기>에서처럼 소녀는 떠나가고 소년만 남았기에. 소년이 맘대로 “쥐바라숭꽃”으로 불렀던 이름 모를 노란 들꽃은 과연 무슨 꽃이었는지 궁금하다. 민들레나 꽃다지였을까?
6.25를 관통하는 배경 때문에 화자의 시선은 전쟁과 가난 속에 버려진 아이에 대한 상처와 갈등을 서술하고 있다. 소년의 부모가 소녀의 금붙이를 탐하는 것은 생존문제가 앞선 어른들의 생리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불편한 진실이며 또한 시대적인 아픔인 것이다.
윤흥길 선생님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회색 면류과의 계절’로 등단하였고, 1977년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제4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1983년 ‘꿈꾸는 자의 나성’으로 제15회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왜곡된 역사현실과 삶의 부조리를 풍자하면서도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집 <황혼의 집>, <돛대도 아니 달고>, <장마>, <에미>, <완장> 들을 냈다. 지인이 '장마'를 추천해주었는데, 구해서 읽고 싶다.
※기억 속의 들꽃 필사본 : http://blog.daum.net/yjmoonshot/2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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