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천강문학상 시부문 대상
꽃피는 칼 - 최정아
칼자루도 없이
칼은 새파랗다
봉안鳳眼이 조각되어 있는 칼날, 칼이 하는 일은 바람을 베는 일이지만
자투리 필요한 한 뭉치 바람이 스스로 와서 베일 때가 많다.
이 칼은 광석이 아니다. 양쪽 날을 가지고 있는 검劍의 끝은 여전히 벼려
지는 중이어서 휘어져 있다. 누가 산속에 칼을 꽃아 두고 갔나. 새파랗게
녹슬면서 가끔 꽃도 피우는 그 칼을 누군들 쉽게 뽑겠는가.
칼 한 자루를 오래 감상했다
향기가 일획으로 지나간다.
정점으로 향한 떨림의 순간, 바람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고 칼은 별자리
방향을 따라 빛이 바뀐다.
칼은 스스로 시들어 칼집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간다.
칼 가는 사람도 없이 파랗게 날을 세우고 휘두르는 힘이 다 빠지면 절옆
으로 휘어진다. 한 데 엉키는 칼끝을 조심해야하며 봄이면 멀리 동쪽에서
찾아오는 꽃이 있어 서리와 동풍을 빼내야 한다.
일합一合의 불꽃도 없이
꽃피운 칼
갈라지는 칼끝에서 꽃잎 떨어진다.
스프링 벅
노트를 펼치자 칼라하리 사막이 보인다
스프링 벅의 발굽으로 내 노트엔 많은 것이 지나갔다
계절을 삭제해버리자 물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불길을 따라가면 강이 나온다고 적혀있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노는
아슬아슬한 스프링 벅은 위험하다
펼쳤다 접히는 갈피마다 스프링이 튕겨 오른다
스프링을 달고 있는 뿔들
어떤 형태로 묘사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 달을 놓친 날
무릎들로만 걸어가는 가족을 본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을 하고
말없는 무릎들이 낡은 버스를 타고 질주의 좌석에 앉아있다
이럴 때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엎질러진 기억을 줄줄이 엮어 끌고 오는
구름의 뒤통수를 아버지라 불러보려다
앞만 보고 달리는 스프링 벅을 생각한다
바위산을 오르내리며 푸른 풀밭을 찾아 떠돌다
스프링 노트를 찢다보면
뿔만 남아 있는 산양들이 된다
골목을 오르내리며 푸른 풀밭을 찾아 떠도는
산양들이 지나간 곳마다 스프링 노트가 찢어졌다
구름의 귓속말에도 현혹 된 적 있다고 적혀있다
피가 지구를 한 바퀴쯤 돌아서 오는 걸 알 수 없다
그때 후드득 노트가 찢어졌고
산양들이 바위산으로 올라가고
집집마다 석양이 켜진다.
회오리 분청사기
회오리 하나가 분청 화병에 들어오래 머물고 있다.
몇 백 년 동안 한 쪽으로 감긴
회오리를 풀지 못하고 있다.
감겨진 바람은 반대 방향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안다 해도 깨어져 버리면 그만이다.
회전도 늙으면 그 색깔부터 바래져가고
뭉쳐진 바람이 가두고 있는 공명은 뚜껑이 없다.
공기를 묶으려면 주의가 필요하다.
뭉쳐진 바람을 왜 장식으로 올려놓았는지
손을 넣었다 빼면 엄청난 회오리풍 손금이 묻어나올 것 같다.
일직선으로 달리는 폭풍우는 없다.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후
틈이 없는 회전으로 여전히 돌고 있는 바람
그 바람 다 굳어지면 파편으로 빛날 것
날아가는 실밥이 순식간에 회오리를 깨트린 적이 있다.
분청 화병의 주둥이 안쪽에 들어 있던 것은
더도 덜도 아닌 탁음의 전부였다고 여겼던 때가 있다.
파도의 포말이 만든 고등은 분청사기 색깔이다.
회오리 돌기가 있는 사기에는 내장이 들어있듯
하나의 몸으로 오래 살고 있는 화병
분명 아슬아슬한 내장이 들어있을 것이고
한쪽으로 감겨 풀지 못하는 것들은
비장함과 돌아눕지 못 한 그늘이 함께 감겨있다.
가만히 귀를 대보면
묶인 바람소리 들린다.
모든 바람 소리는 파손의 전조(前兆)다.
최정아 (본명 최정순) - 1953년생(호적나이 1950년생), 경기도 수원 출생 장안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수료, 2009년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당선 시집「바람은 색깔을 운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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