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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라는 뼈 - 김소연 시집(공유)

moon향 2016. 8. 10. 13:42

詩의 뼈를 읽다

 

                                                                                                                                   

   -  주영헌 (http://blog.naver.com/yhjoo1/90100979497)

 

 

  얼마 전 새로 구입한 시집 한권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김소연 시인의 『눈물이라는 뼈』란 시집이다. 시집 소개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적당한 시집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시집을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를 읽다가 「눈물이라는 뼈」라는 시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시집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 보다 더 재미있는 글쓰기 소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사실 시집 소개를 한참 쓰다 지우고 다시 이 글을 쓴다)  

 

  이 시집의 제목『눈물이라는 뼈』에서의 ‘뼈’라는 개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단어이다. 흔한 단어는 아니지만, 기억나는 몇 편의 시가 있다. 그 각각의 시에선 ‘뼈’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으며, 어떤 유사점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런 작업이 시집한권 소개하는 것 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면 처음 쓰려고 마음먹었던 시집『눈물이라는 뼈』의 시 「눈물이라는 뼈」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눈물의 뼈란?

 

  눈물에 어떤 뼈가 있을까? 먼저 눈물의 뼈를 확인하기 위해선 눈물을 만들어야 한다. 억지로 눈물을 흘리려고 해도 눈물이 나지 않아 생수에 굵은 소금 몇 알을 희석하여 눈물 비슷한 맛을 만들었다. 그 인공 눈물을 만들어 가만히 만져보니 뼈 비슷한 것이 만져진다. 채 녹지 않은 소금이다. 뼈란 살 속에서 몸을 지탱하는 단단한 조직으로 된 것. 염분이 녹아있는 물이 살이라고 한다면, 뼈란 ‘그 단단한 조직  나트륨 덩어리가 아닐까’ 하는 유추에 도착하게 된다. 시의 제목이 ‘뼈’에 중심을 맞추고 있다면 시의 내용 중 나트륨이나 소금, 그것도 아니면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문장이나 단어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암늑대가 숲속에서 바람을 간호하는 밤이었대. 바람은 상처가 아물자, 숲을 떠나 마을로 내려갔대. 암늑대가 텅 빈 두 손을 호호 불며, 우듬지에 앉은 지빠귀를 올려다보는 밤이었대. 섭생을 위해서 살생을 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늑대 이야기에, 한 아이는 밑줄을 긋고 있었대. 바람은 그 지붕 위를 저벅저벅 밟고 다녔대. 암늑대는 노란 지빠귀를 올려다보고, 노란 지빠귀는 늑대를 내려다보았대. 둘은 눈을 떼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았대. 그래서 겨울밤은 감옥이 되기 시작한 거래.

 

「눈물이라는 뼈」 부분

 

  앞 문장을 읽어 보아도 애써 유추한 추론, 소금이나 나트륨 같은 짠 무엇은 언급 자체가 되지 않았다. 사실 끝까지 이 시를 읽어 봐도 그런 단어는 찾을 수 없다. 사실 이 시에서 말하는 ‘눈물이라는 뼈’의 ‘뼈’는 물리적인 무엇은 아닐 것이다. 사실 이 시가 진짜 뼈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처럼 좋은 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눈물이라는 뼈’는 그 단어만으로는 개념이 모호해서 그 정확한 의미를 그 추론하기란 어렵다. 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도 대략적인 의미만 눈에 들어올 뿐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도움이 될 만한 문장 몇 개를 더 읽어 본다. 바로 이 시집의 제일 앞에 떠 있는 섬과 같은 몇 개의 문장이다.

 

사람의 울음을 이해한 자는 그 울음에 순교한다

- 김소연

 

어떤 눈물들은 차분하기 투명하며 열렬했다.

그런 눈물과 닮고자 했다.

나의 문학이.

그리고 나의 삶이.

내게 뼈를 보여주신 당신께.

고마움과 미안함과 황홀함을 전한다.

- 시인의 말

 

   눈물은 울음에서 출발한다. 그 많은 울음을 한 방울로 모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눈물이다. 그래서 눈물은 짠 것이 아닐까. 바로 농축된 울음. 물론 모든 눈물이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악어의 눈물처럼 거짓되고 꾸며진 눈물도 있다. 그래서 시인은 어떤 눈물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렇듯 어떤 눈물들은 차분하고 투명하며 열렬했다고 했다.  필자에게도 비슷한 시가 있다.

 

      온 몸에 가득 찬 슬픔은

눈물이 아니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흐르는 것은 잠시 멈춰있거나 어딘가로 다시 흘러가 처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찾아가는 것들

내 어머니가 첫아이를 잃었듯 나도 첫아이를 잃었다

슬픔도 輪回하는가

 

「윤회」 부분

 

  이 시에서도 말하는 눈물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다. 김소연 시인이 말한 울음에 순교할 만한 울음, 바로 농축된 눈물이다. 모든 슬픔이라는 개념이 농축된 눈물. 그러면 그 눈물은 얼마만큼 농축된, 얼마의 밀도를 가진 눈물이라는 말인가? 「눈물이라는 뼈」의 뒷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바람을 간호하던 암늑대의 긴 혓바닥이 나뭇가지처럼 딱딱해질 때, 비로소 아이는 늑대의 섭생을 이해하는 한 그루 어른이 되는 거래. 그때 바람은 떠났던 숲으로 돌아가지 못해 더 큰 목소리로 운다. 눈물이 사라진 어른들은 믿을 자신이 없어. 아이도 모로 누워 남몰래 운대. 밤새 흘러버린 눈물로 마당이 파이기 시작하면, 바람은 사라지고, 새로운 돌부리들이 죽순처럼 쑥쑥 마당을 뚫고 올라온대.

 

「눈물이라는 뼈」 부분

 

  이 시집의 해설에선 해설자는 이 시를 동화같이 읽었다고 했다. 일종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우화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관점도 일리는 있다. 동화와 같은 구성과 상상력이 이 시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설자가 간과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이 시의 깊은 곳, 내면에 흐르고 있는 시인의 슬픔, 바로 눈물의 뼈 같은 것이다.

  시인의 나이(여자의 나이를 밝힐 필요는 없겠다. 사실 인터넷으로 조금만 조회를 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나이, 그렇다고 너무 많지는 않지만 젊다는 것과는 시차가 있다), 그 나이쯤 되면, 성별과는 상관없이 한번쯤 자신의 생을 되돌아 볼 것이다. 중간점검 정도로 얘기해도 될 것이다. 나이라는 것 허투루 먹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는 만큼 몸에 쌓이는 것도 있고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있다. 순수함은 유실되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이를테면 ‘세상의 때’ 같은 것이 돌처럼 쌓이게 된다. 바로 늑대의 섭생을 이해할 정도의, 누군가의 죽음이나 누군가의 고통이 나의 섭생이 되고 있다는 슬픈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 슬픔이 돌이 된다고 했다. 슬픔이 뭉치면 돌처럼 뼈처럼 단단해 질 것이다. 결국 그 슬픔을 이해하고 있는 시인은 그 슬픔으로 인해 순교할 것이라고 시인은 담담히 말하고 있지 않던가. 시인이 시집의 제목으로 『눈물이라는 뼈』라고 정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시인이 줄기차게 말하고 싶은 자신 내면의 슬픔, 아니 우리 모두의 슬픔 그 ‘슬픔이라는 뼈’를 동화 같은, 우화 같은 시에 빗대어 담담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늘의 뼈란?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부분,  민구 시인의  조선일보 등단작

 

  ‘눈물의 뼈’만큼이나, ‘나무 그늘의 뼈’라는 것은 더 황당한 소재이다. 아무리 그늘을 바라보아도 뼈 비슷한 것은 찾을 수 없다. 뼈라는 개념에 대해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난해하다. 사실 민구시인은 ‘나무 그늘의 뼈’라는 개념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복잡한, 철학적 난제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직립으로 서 있는 것에는 단단한 축이 있어 그 축을 ‘뼈’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 정도라고 할까. 또한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뼈대로 본다면, 그 뼈가 흐릿하게 투영된 나무 그림자에도 뼈가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시에서 말하는 뼈를 추론할 수 있다. 민구시인이 생각했던 개념이 여기까지였을 가능성도 있다(물론 이것도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끝내 버리면 이 시는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지 않은가.

  ‘그늘의 뼈’라는 개념은 앞서 김소연 시인의 시에서 보듯 단순한 논제는 아니다. 뼈란 어떤 생명체의 중심을 이루는 요소, 건물의 철근같이 그 생명체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기둥과도 같은 존재이다. 특히 시와 같은 장르에선 ‘뼈’란 물리적, 생리적인 것을 넘어 기본중의 기본, 바로 근원(根源)이라는 의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김소연 시인의 시에서 눈물의 뼈는 눈물의 근원(눈물의 흘리는 사람)의 근원(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 성찰)이었다. 민구 시인의 시 ‘나무의 그늘에도 뼈가 있다’라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나무의 그늘에만 그 시선을 고정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 시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나무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텍스트는 있다면 그것은 달이다. 나무의 그늘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보통은 나무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비추는 어떤 존재로부터 시작을 한다. 빛이 없다면 그림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 그림자는 나무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무가 아닌 달을 투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 달은 어떤 존재인가. 보통 시에서 달은 관찰자 또는 타자의 형태로 묘사가 된다. 하지만 시인은 이 시에서 달을 다른 형태로 묘사했다. ‘우물에 가서 몸을 불리는 달’ ‘부릅뜨고 나를 노리는 달’과 같이 非객관화 된 자아체로 묘사를 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아는 달과는 다른 달이다. 어쩌면 시인 자신을 이 달에 투영할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민구시인의 시에는 달이라는 소재가 많이 등장을 한다. 시인을 달의 시인으로 불러도 좋을 정도다.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달과 시인 사이에 어떤 정서적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시인의 시 한편을 더 읽어 보면,

   

달이 먼저 나를 물기도 한다

줄을 풀고 창문으로 너무 들어온 달이 구석에 나를 몰고 어금니를 드러낸다

오줌발이 얼마나 센지 사방 벽으로 튀어 잘 지워지지 않는다

달은 나무를 잘 탄다

어두운 강을 곧잘 건넌다

물결에 비벼도 지워지지 않는 저 온순한 발자국은 한겨울 빙판을 내리치는 커다란 해마 수천수만의 얼음조각들이 밤하늘에 박혀있다

순식간에 하늘을 나는 박새에 오른 달, 민첩하다

고양이 꼬리를 물다가 돌아보는 순간, 지붕 위를 걸어나가며 케케케 웃고 있다

멀쩡한 사내를 부축하는 달, 문지방에 걸터앉은 달, 작두로 깍은 발톱이 거기로 튀었나? 굶주린 소가 여물통을 바라본다

물에 뜬 시체를 가만히 덮고 있는 담요여

상갓집 늦은 조문객이 맨 근사한 타이여

공중에 집 한 채 놓고 숨죽여 울던 검은 짐승은

지금 해와 교미 중이다

 

「움직이는 달」전문

 

  이 시는 달이 이동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시다. 물론 그 묘사라는 것이 스케치와 같은 직접 묘사는 아니다. 시인이 상상의 눈으로 그려낸 간접묘사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달은 움직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든지 시인의 시야가 묘사하고자 하는 사물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렇듯 두 시는 다른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소재만 놓고 본다면 닮은 구석도 많다. 예를 들어 달과 같은 환경적 조건만 따지면 말이다.

  두 시를 비교해 보면, 모두 달이라는 조건도 있고 나무라는 조건, 심지어는 종류는 다르지만 새도 등장을 한다. 어찌 보면 유사한 풍경을 다른 방법으로 써 놓은, 같지만 다른, 다르지만 같은 시라고 느껴진다. 그렇게 두 편의 시가 유사하다면 「오늘은 달이 다 닳고」에서 등장한 ‘그늘의 뼈’도 「움직이는 달」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뼈라는 개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통 뼈를 몸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물론 맞다. 보통의 뼈는 다 피부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뼈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피부를 뚫고 외부로 나온 뼈들이 있다. 예를 들어 물고기의 가시라던가, 뼈와는 다르겠지만 보통 뼈라고 통칭할 수 있는 이빨과 같은 것들이다.

  나무 그늘이라면 나무의 가느다란 잎사귀가 투영된 그늘일 것이다. 잔가지도 있고 가시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늘은 달이 다 닳고」에서의 나무그늘은 잔뼈가 많은 물고기를 닮은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움직이는 달」에서 나를 물려고 하는 달그림자는 사나운 맹수의 이빨(뼈)같지 않은가? 이런 비유적 관점으로 보니 모든 그늘에는 뼈가 있을 수도 있겠다.

  사실 첫 번째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뼈는 철학적 개념(철학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에 근거하여 출발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관점이 맞을 것이다. 만약 철학적으로 이 시를 끌고 가기 위해선 이 뼈와 맞장구 칠 수 있는 의미 있는 문장이 있어야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문장 보다 ‘이때 달은 비누다’라는 감각적 문장을 선택했다. 결과론적으로는 이러한 선택이 옳은 것이 되었다. 이 문장의 덕으로 인해 신춘문예로 등단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시가 철학적 문장을 담는 것 좋은 선택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시라는 것에 정답이라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지금 최고라고 칭송받는 시인이나 시도 수 십 년이 지난 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평가절하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길 수도 있다. 민구 시인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적 성찰이 좀 더 가미가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사실 이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달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이처럼 잘 표현 했으니 말이다.  

 

 

  詩는 내, 외부의 뼈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글을 쓰면서 시 쓰기는 세상의 모든 뼈의 개념을 찾아가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시라는 것 말하는 것처럼 줄줄 써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과 고뇌 이후에 만들어지는 것이 한편의 시이다. 뼈도 그렇지 않은가. 뼈 중의 뼈라 부르는 사리와 같은 뼈는 고승이 평생을 수행해서 마지막 순간에 얻어지는 것이다. 사실 시인은 수행자와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승려는 그 생 전체를 수도를 위해 바치고 시인은 모든 정신과 마음을 한편의 시를 쓰기 위해 바치니까.

  필자는 시를 쓰면서 수행자가 자주 쓸 것 같은 단어들을 많이 사용한다. 그렇다고 종교적이나 생활에 있어 특별한 연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앞서 얘기했듯 종교적인 연관성을 떠나 시 쓰기나 불교적인 수행모두 내 안과 밖의 ‘뼈’를 찾아가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뼈의 끝으로, 새로운 뼈를 찾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용인문학 발표

 

[출처] 詩의 뼈를 읽다|작성자 yhjoo1  공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