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 안도현
접기만 해서는
상자가 될 수 없어
접어 반듯하게 세워야지
모서리를 만들어야 하는 거야
종이의 귀퉁이가 뾰족해지는 거
그게 모서리잖아
네가 뾰족해진다고
겁내지 않을 거야.
너는 바깥에서 모서리가 되렴
나는 안에서 구석이 될게.
그러면 상자가 되는 거잖아.
상자 안에 처음부터 무엇이
빼곡 들어 있었던 건 아니야
우리가 상자가 되면
맨 먼저 허공이 들어찰 거야
가만히 있어도 배가 부를 걸?
상자에 가만 귀 기울여 볼래?
병아리 소리가 새어 나올지도 몰라
상자 가득 사과를 담으면
아, 그 애의 잇몸이 보일지도 몰라.
('화장지 - 유강희' http://blog.daum.net/yjmoonshot/4542)
※안도현 동시집 <기러기는 차갑다>를 읽으니 '詩 같은 동시'가 많다.
'상자' 동시에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했다.
1. 모서리가 없으면 상자를 만들 수 없다!
2. 모서리가 있으면 반대편엔 반드시 구석이 생긴다!
상자를 '가정(Home)'으로 가정해 보았다.
모서리는 밖을 향하고, 구석은 안을 향하니......
전통적으로 보면 남자가 모서리, 여자는 구석일까?
젊은 세대 중엔 육아를 자청하는 남자들도 많으니
반대의 경우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2연 중반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이는 누구인가?
'너는 바깥에서 모서리가 되렴
나는 안에서 구석이 될게'
시적인 화자는 종이를 접다가 상자가 되고자 한다.
상자를 만드는 것과는 주체가 확실히 다르다.
상자를 만든다면, 화자에게 상자는 목적의 대상이 되지만
상자가 되려면, 화자는 상자의 일부 혹은 전부가 되어야 한다.
종이를 접기만 해서는 상자가 될 수 없다면서
나는 구석이 될 테니 너는 모서리가 되라고 한다.
모서리가 될 누군가가 필요한 상황이다.
구석이 될 누군가를 찾는 것보다는 빠르겠지.
모서리는 환하고 구석은 어두운데......
하나가 모서리면 다른 하나는 구석이 되어야 하는 상자의 현실!
어찌 보면 자기를 버리고 숨겨야 하는 구석을 고른 화자에게
외부세계로 진출 혹은 확장하려는 욕망이 없었을까?
상자 안에 처음부터 무엇이 빼곡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면서
맨먼저 들어오는 허공으로도 배가 부를 거라고 한다.
사람들은, 번지르르 포장이 된 상자 외부에
뾰족한 각이 잡힌 모서리를 보며 미소 짓겠지만
상자 안에 담겨져 있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은가?
상자 네 귀퉁이가 구석구석 자리를 잘 잡고 있어야
상자 안에 내용물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상자는 잘 빠진 모서리가 전부가 아니라
구석에서 모서리를 밀어주는 힘이 존재한다.
구석이 힘을 잃으면 모서리도 찌그러지겠지...
'상자'를 가정(Home)으로 상상하니
'병아리 소리'와 '그 애의 잇몸'은
깔깔 웃는 꼬마의 모습으로 변했다.
엄마가 아프지 않아야 집안이 평안하지...
갑자기 친정엄마가 입원을 하셨다.
팔순이 넘으신 아빠가 걱정이다......
어서 회복되어 퇴원하시길 바라며,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들락날락하지만
가까운 데 있는 자식이 아무래도 더 가기 마련이므로
평소보다 이래저래 긴장이 되고 시간 활용도 어려워
블로그에 오질 못했다ㅠㅠ
평생, 모서리만 담당하신 아버지와
말없이 구석을 지키신 어머니!
안과 밖의 위치가 마뜩찮은 건 아니지만,
상자 하나를 위해 너무나 충실히
사시느라 점점 연로해지셨음에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눈물이 난다.
슬픈 동시다, 오늘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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