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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울어짐에 대하여 / 문숙

moon향 2011. 9. 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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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짐에 대하여 / 문숙

 

 

한 친구에게 세상 살맛이 없다고 했더니

사는 일이 채우고 비우기 아니냐며 조금만 기울어져 살아보란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노쳐녀로만 지내던 그 친구도 폭탄주를 마시고

한 남자 어깨 위로 기울어져 얼마 전 남편을 만들었고

내가 두 아이 엄마가 된 사실도

어느 한때 뻣뻣하던 내 몸이 남편에게 슬쩍 기울어져 생긴 일이다

체게바라도 김지하도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다

혁명을 하고 시대의 영웅이 됐다

빌게이츠도 어릴 때부터 삐딱한 사고로

컴퓨터 신화를 일궈 세계 최고 부자가 되었고

보들레르도 꽃을 삐딱하게 바라봐 악의 꽃으로 세계적인 시인이 되었다

지구도 23.5도 기울어져 계절을 만들고

피사탑도 10도 기울어져 세계적인 명물이다

노인들의 등뼈도 조금씩 기울어지며 지갑을 열 듯 자신을 비워간다

 

시도 안 되고 돈도 안 되고 연애도 안 되는 날에는

소주 한 병 마시고 그 도수만큼만

슬쩍 기울어져 볼 일이다

 

 

 

 

비운다는 것 / 문숙

 

사랑도 거덜 나고 신념도 흔들리고

한세상 화끈하게 말아먹고 싶은 날

우주만물의 무상성을 인정하라는 한 선배 충고에 풀이 죽어

게장단지 앞에 놓고 부엌 구석에 식은밥처럼 쭈그리고 앉는다

단지 뚜껑을 열자 꽃게가 얌전하게 엎드려 있다

삐딱하게 옆으로 기며

개펄을 거칠게 움켜잡던 집게발도 가지런히 오므렸다

몸은 딱딱한 껍질만 남기고 속을 모두 비웠다

간도 쓸개도 없이 살아온 내력이

내 입 안에 텁텁하게 고인다

흐물흐물 몸 밖으로 중심을 흘려보내고

이제 발라먹을 게 없다

자신을 참 잘 죽여 놓았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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