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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획특집]우리 시사에서 과대평가된 시인, 과소평가된 시인(1)

moon향 2013. 12. 19. 15:42

[기획특집]우리 시사에서 과대평가된 시인, 과소평가된 시인(1)
계간 시인세계
 
‘장미는 장미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향기로울 것이다.’(셰익스피어)

현대시 100년 동안 우리 시사詩史를 빛낸 시인들은 많다. 시를 이루는 무늬와 빛깔, 목소리와 개성, 평생 추구해온 이상과 이념은 다르지만 시인들은 각자 시의 이름으로 우리 시사를 비옥하게 하였다. 그 많은 시인들 가운데, 그 시대와 사회에서 넘치는 찬사와 조명을 받은 시인들도 있겠지만, 작품성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소외되었거나 잊혀진 시인들도 많다.
 
시대와 사회의 굴곡으로 작품의 본질보다 너무 지나치게 평가받았던 시인, 혹은 그 시대와 역사의 민중논리에 영합하지 못했던 까닭으로 끝내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시인을 우리는 기억한다. 올바른 시사詩史의 전개를 위해 《시인세계》는 한국 현대시 100년을 돌아보고, <우리 시사에서 과대평가된 시인, 과소평가된 시인>을 꼼꼼히 따져서 기획 특집이다.                                                                 
                                                                                                           -편집자

<총론>

평가와 지적 유행

                                                                                         유    종    호 | 문학평론가

잊혀지는 이름들

알랭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학생 시절의 일이다. 아마 휴전 직후쯤의 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란 제목아래 몇몇 교수의 짤막한 도서 추천사가 대학신문에 나 있었다. 영문학과의 이양하 선생이 알랭의 『행복론』을 거명하고 찾아 읽기를 권하고 있었다. 다른 몇 분이 추천한 것도 있었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고 또 이선생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다만 이양하와 알랭이란 고유명사와 『행복론』만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추천자의 권위와 책제목의 매력 때문에 언제고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우선 책 구하기가 어려웠고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그 책을 구해 읽은 것은 학교를 나와서 한참만의 일이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해서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다만 책 첫번째 항목 내용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젊은 시절, 알렉산더 대왕이 명마를 선사 받았는데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제어하지를 못했다. 말을 골똘히 관찰한 알렉산더는 그 말이 제 그림자가 무서워 날뛴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래서 말의 코빼기를 태양을 향하게 한 채 얼르고 나서 성큼 말 등에 올라타 그 말을 제어하게 되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나서 정념情念의 참다운 원인을 알아내야 비로소 그 정념을 관리할 수 있다는 지혜를 전해주고 있다.
 
모두 일상의 비근한 예를 통해서 자근자근하게 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영위하는 법을 말해주고 있는 책이다. 『행복에 관한 어록』이란 제목으로 1925년에 간행되었을 당시 60편의 어록(propos)이 수록되어 있었으나 1928년 93편을 수록한 새판이 나와서 많은 독자를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건 그는 많은 분야를 다룬 어록을 통해 프랑스에서 많은 독자를 얻었다. 풍부한 교양과 유연한 합리주의 정신으로 삶과 예술에 관해 통찰을 보여준 그는 1951년 작고하던 해  문학국민대상이란 영예를 받았다.

알랭은 서구 문물 수입에 아주 정력적이었던 이웃 일본에서 30년대부터 널리 알려져 비교적 많이 읽힌 철학자요 에세이스트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알랭을 아는 사람이나 읽은 사람은 별로 없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비단 알랭뿐만 아니라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등도 젊은 세대들에겐 대체로 낯선 인물로 남아 있다.
 
전후에 널리 알려지고 읽힌 사르트르나 까뮈에게 완전히 가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사르트르나 까뮈의 수용은 어떻게 해서 왕성하게 이루어진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실존주의란 새 사상의 수용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다. 실존주의가 단순히 새로운 사상이라는 피상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전후에 팽배한 불안과 고뇌에 대한 철학적 단초가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사르트르나 까뮈는 한편으로 루카치나 골드만 등의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푸코나 데리다 등의 탈구조주의 이론가들에 의해서 가려져 잊혀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세대마다 그 세대가 수용하고 숭상하는 사상가나 문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시대인들에게는 공통의 갈증이나 관심사가 있게 마련이고 그래서 일종의 지적 유행 비슷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전 세대가 열성적으로 수용한 문인이나 사상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 세대가 그들을 버리는 것은 자신들의 주요 관심사나 고민거리와 잘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새 세대가 등장하면서 특정 사상가나 문인이 정기적으로 버림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란 당대의 대세에 매우 민감한 존재이다.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헛기침이나 하품은 굉장히 빠르게 전파되고 전염된다. 지적 유행이나 사고의 성향에서도 이러한 다수 추종현상은 빈번히 발견된다. 새로운 것을 선택하고 헌 것을 버리는 것은 단순히 전자제품 브랜드에 한하지 않는다.

오늘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듯이 보이는 지난 시대의 양식가良識家 알랭은 “소설, 회화, 아니 어떠한 종류의 작품을 대할 때에도 개개 인간은 좋은 심판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모여 있으면 인간은 좋은 심판자의 집단이 된다”고 그의 「문학에 관한 어록」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인간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밖으로 표현하는 놀랄 만한 선의 때문이라고 그는 부연 설명한다. 얼마쯤 모호한 얘기다. 그러나 어쨌든 알랭은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좋은 작품은 길이 수용되게 마련이라는 일종의 예정조화설을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플라톤의 작품이 모조리 입수 가능한 ‘플라톤의 기적’ 현상에 탄복하고 있는 것이다.

평가의 부침

알랭이 탄복하고 있는 ‘플라톤의 기적’을 예술 부문에 적용하면 이른바 예술가치의 지속성의 문제가 된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인 예술작품이 어떻게 해서 시간적·공간적으로 상거相距해 있어 전혀 다른 사회적 조건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계속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예술사회학이 마주치고 제기한 가장 곤란한 문제의 하나이다.

이에 대한 가장 피상적이고 통속적인 해명 시도는 영원한 인간성을 내세우는 관념론적인 접근이다. 시간적·공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이란 것은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본성에 착실하게 기초해 있는 예술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호소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역사화’하는 경향이 있는 오늘날 영원불변하는 인간 본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 개념을 폭넓게 잡아서 인간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억압과 피억압의 사회관계에서 가치 지속성의 원천을 보려는 관점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너무나 추상적인 일반론이 되어 구체적 세목을 갖추지 못한다.  

문학과 예술의 상대적 자족성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유파 가운데는 예술작품의 수용을 끊임없는 재생산 과정으로 포착해서 설명하는 관점도 있다. 가령 고대 그리스 비극은 현대 독자들이 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당대 관중들에게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9세기의 독자가 읽는 춘향전과 20세기의 독자들이 읽는 춘향전은 사실상 동일한 텍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은 움직이는 과정이지 정지한 대상이 아니며 20세기의 독자는 과거의 텍스트를 새로 구성해서 새롭게 써서 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 가치의 지속성이란 개념 자체가 잘못 구상된 것이며 잘못 제기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는 재생산 가능성의 계기가 풍요한 작품이 결국은 고전이니 명작이니 하는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혹은 지속적으로 수용되는 셈이다.

이것은 당대 작품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사안일 것이다. 동일한 텍스트를 세대마다 다르게 구성하고 새로 써서 읽어낸다. 그것은 세대마다 역사를 새롭게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민국가의 역사나 세계사뿐만 아니라 개인사의 경우에도 주체의 나이와 처지에 따라 의미와 중요성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고전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서구의 문학 전통에서 그 중요성과 빼어남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도전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르기우스는 언제나 호메로스의 그늘에 가려 이를테면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전쟁과 그에 따른 망명과 유랑을 체험한 세대들에게 베르기우스는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띠고 새로 태어난다. 호메로스의 그늘에서 벗어나 이제 당당한 고유성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쪽의 경우에도 가령 정지용의 「향수」나 백석의 고향 시편은 난개발과 산업화로 자연 훼손과 전원 파괴가 현저한 오늘날 발표 당시엔 갖지 못한 새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한때 역사와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일리 있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던 청록집의 자연 시편들도 생태계의 위기가 거론되는 오늘 새로운 창조 체계 속에 귀속하게 된다. 자연 숭상과 자연에의 귀의가 이제는 새로운 부가가치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한 한에서는 작품도 움직이는 과정 속에 있다는 말은 옳은 소리다.

변화하는 사회 역사적 조건이 작품을 새로운 창조 체계 속에 귀속시키듯이 변화하는 지적 취향과 유행이 작품을 새로 만들어 낸다. 우리 문학에서는 이르는 바 모더니즘의 문학이 그 비근한 예가 될 것이다. 새로움을 중요한 가치판단의 척도로 표방하면서 등장한 모더니즘은 그 구체가 무엇이든 선행 문학을 낡은 것으로 공격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김기림의 모더니즘이 ‘진부한 내용과 고루한 형식’이라며 가장 호되게 비판한 것은 이른바 ‘센티멘탈 로맨티시즘’이었고 그 주된 표적은 사실상 김소월이었다. 또 ‘내용의 관념성과 말의 가치에 대한 소홀’이란 이름 아래 불신한 것은 카프파의 시 경향이었다. 김소월 등의 조선주의나 임화 등의 프롤레타리아 시편들은 당대의 주요 시적 경향이었다. 이를 비판한 모더니즘은 새로운 시적 경향을 나타내면서 새로운 시적 유행을  낳았다. 경향과 유행이 바뀌면서 그때 그때의 대표적 시인들의 평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1920년대부터 독자적인 시적 성취를 보여준 정지용이 응분의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이다. 30년대 중반에 그때까지의 작품을 망라한 처녀 시집을 발간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카프 문학의 쇠퇴와  독자들의 식상이라는 유행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시적 경향이나 유행의 변화는 당연히 평가에서의 변화와 부침을 야기하게 마련이다. 가령 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반에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임화의 시적 위상은  30년대 이후 하강했다가 해방 직후의 정치적 계절에 이번엔 ‘문화권력’의 실세라는 사정도 가세해서 크게 상승한다. 모더니즘의 등장과 함께 시인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상승했던 김기림은 해방 직후의 정치적 노도질풍기에  좌파적 현실주의 색채를 겸비함으로써 위상의 하강 없이 새로운 균형을 얻게 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평가에서의 위상 상승과 하강, 그리고 당대의 사회 상황 그리고 문학적 유행 사이에서 가시적인 함수관계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과대평가와 과소평가

특정 시인이 과대평가되고 있다든가 혹은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얘기를 흔히 듣게 된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고 보면 매우 모호한 얘기다. 가령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통계적 자료를 근거로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또 이때 평가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일반 독자인가 아니면 문과 학생들인가? 또는 감식력 있는 고급 독자들인가? 아니면 전문적 시인들인가? 혹은 장르 불문하고 일반 문인들인가?  평가 수행자에 대한 검토 없이 막연하게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나의 관찰이다.
 
물론 앙케이트를 통해서 20세기 한국 시인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하는 시인 열 사람을 서열화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응답자가 분명하기 때문에 시인에 의한 시인 평가란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 결과에 대해서도 특정 시인이 과대 혹은 과소 평가를 받았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시인이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할 때 그 근거는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다시 나의 관찰에 의하면 가령 교과서나 사화집에 자주 수록되거나 이차 문서에서 자주 거론되고 비평 대상이 되거나 추종자가 많아 문학 수업에 관한 읽을거리에 자주 이름이 등장하거나 하면 대개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과대 혹은 과소평가란 생각은 적정하고 온당한 응분의 평가란 생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파생적 개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평가가 적정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에 상치되는 평가를 과대 혹은 과소평가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과연 적정하고 온당한 평가에 대한 비평적 합의가 가능할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문학관이나 현실관에 따라서 저마다 다른 평가가 공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누구나 이를 인정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우리는 평가의 적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 우리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과대평가 내지 과소평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는 계기를 검토해 볼 것이다.

가령 만해 한용운도 일부에서는 과대평가의 사례로 거론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필생의 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결코 전문적인 시인은 아니다. 그리고 40대 중반이 되는 1926년 유일 시집인 『님의 침묵』을 선보인 후 다시는 시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후에 보여준 몇 편 안 되는 시편은 대체로 빈약한 소품이요, 또 주제상으로나 글체상으로나 『님의 침묵』과의 연속성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며칠 밤 사이에 시집 한 권을 써냈다는 말이 전설처럼 돌고 있지만 그것은 과장된 얘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생애의 극히 짤막한 특정 시기에 시를 쓰고 나서 그 뒤에 시작에 소홀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시인이다. 그는 이른바 문단이라는 동업자 집단에 관여하거나 출입하지 않았다. 훌륭한 시인의 조건은 많은 수작을 써냈다는 것 말고도 수준 미달의 졸작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만해가 20세기 한국시에서 가장 깊이 있는 시편들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나 허술하고 빈약한 시편 또한 수다하다. 또 쓸 만한 작품들 가운데도 민망한 대목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 「가지 마셔요」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자기 나름의 시학과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출발하기 이전의 시기에 그는 불가사의한 위엄을 갖춘 시편을 보여주었다. 그 점 그는 김소월과 더불어 20세기 초기의 별격別格의 시인으로 소중히 읽히면서 기억되고 있다.

한 권의 시집을 보여준 비전문의 아마추어 시인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때문에 더욱) 그에 대한 찬사와 숭상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해방 이전에도 시인 만해에 대한 개별적·산발적 경의 표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방 이전 시평을 활발하게 보여준 김기림이나 박용철이나 임화의 글에서 만해에 대한 언급은 찾아지지 않는다. 비록 그들의 시론이나 시평이 어디까지나 문학 시평時評 흐름의 글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해에 대한 전면적 묵살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해방되면서부터 시인 만해의 성가는 상승곡선을 타게 된다. 해방이 계기가 되어 일시 귀국한 『초당』의 재미 작가 강용흘은 만해가 타고르와 비겨 손색이 없는 세계적인 시인이며 한국문학의 대표적 문인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 그는 『님의 침묵』의 최초의 영어 번역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강용흘의 찬사를 뒤이어 그의 숭상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일제 말기에 불가피하게 보기 민망한 행적을 보여준 대부분의 문인과 달리 그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요, 또 일관되게 일제 치하에서 비타협의 길을 걸어간 희유한 지사였다. 그것은 승려라는 특수 신분에서 오는 가외의 행운이기는 했으나 그의 명성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에 대한 숭상은 물론 우파 문인 사이에서 퍼졌으나 온건 좌파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령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 쪽에 가담하여 활동한 김기림은 한 시편에서 이렇게 적고 있는데 그가 만해를 우리 시의 가장 큰 별로 노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강용흘의 만해 평가의 계보를 잇고 있는 셈이다.

나기 전부터 시의 맥으로 이낀 어리석은 종족
피 아닌 계보가 보석처럼 빛나서 더욱 영롱타
도연명과 한용운과 노신과 타골
단테와 보드레르와 그리키와 오닐          
                                                            ――  「시와 문화에 부치는 노래」 중에서

정부 수립 이후 좌파 시인들 특히 월북한 시인들에 대한 언급이 사실상 금지됨으로써 20세기 우리 시의 정전正典도 크게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지용, 김기림, 백석, 이용악, 오장환, 임화 등의 작품은 사화집에서도 배제되었고 시문학사에서도 언급되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객관적인 상황도 작용하여 그들의 공백을 메우면서 해방 전파에서는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이상 등이 크게 부각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반드시 그래서는 아니지만 1970년대에 『님의 침묵』 전편 해설을 낸 송욱은 만해를 극찬해 마지않았다. “이 나라의 신문학은 한문과 작별하여 모국어로서 표현한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신문학은 한문과 아울러 사상과도 그만 작별하고 말았다. 신문학사 전체를 통해서 오직 하나의 예외는 시집 『님의 침묵』이 있을 뿐이다!” 하고 송욱은 책 서문에 적어놓고 있다. 『님의 침묵』을 깨달음의 경험을 내용으로 하는 증도가證道歌라 보고 해설한 송욱은 만해를 그릇 큰 사상시인으로 파악하여 칭송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서정주를 위시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만해상萬海像을 공유하고 있는 셈인데 미당은 『한국의 현대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만해는 개화 후의 우리 신시대 시인들이 대부분 다 그런 것처럼 시를 심미적 가치나 유행 사상에 의해서 운영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문학 의식은 좀더 넓은 것으로서, 재래 동양인의 문학 의식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즉 문학을 철학이나 종교적 탐구와 병행시키는 그런 문학 의식 말이다.

이렇게 만해는 20세기 우리 문학에서 가장 그릇 큰 사상시인 혹은 철학적 시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셈이다. 사실 만해의 「알 수 없어요」 「비밀」 「예술가」 등 일련의 작품은 증도가이건 아니건 깊이 있는 서정시로서 독자들에게 간곡하게 호소한다. 따라서 작품량이 많지 않았던  해방 이전의 시인 가운데 놓고 볼 때 이런 최상의 작품만으로도 정상급의 시인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렇긴 하지만 시집 전체를 놓고 볼 때 과연 시편 전부를 최상의 시편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된다.
 
시집이 증도가라 하더라도 그것이 선禪 자체의  가치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하는가, 혹은 만해가 보여주는 선에 대한 통찰이나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단순하지 않다. 기타 선의 근대적 변용과 그 가독성에서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인가, 혹은 선의 독자적 이해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따라서 증도가로서의 가치보다도 사상시로서의 시적 위엄이라는 관점에서 『님의 침묵』에 접근해 가는 문학 독자들에게는 만해가 선사禪師로서는 모르지만 시인으로서는 과대평가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만해는 과연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실증적 통계적 자료를 놓고 다른 시인들과의 비교 속에서 어느 정도 적정성 있는 해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주관적·인상적 수준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증도가 아닌 서정시로 접근할 때 우리는 송욱의 만해 평가가 과대평가로 기울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몇몇 걸작 시편을 남긴 만해가 다른 시인에 비해서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다만 높낮이에 난조를 보이면서 경이로운 깊이를 성취한 비전문 시인이라는 단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해의 경우에 볼 수 있듯이 시인에 대한 평가는 시 자체만이 아니라 시인의 인간적 면모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가령 이육사와 윤동주는 각종 사화집이나 교과서에 가장 많이 수록되고 또 심심치 않게 비평 담론에 등장한다. 생각건대 「광야」나 「서시」를 모르는 고교 졸업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의 뇌리에 시인의 전형으로 각인된 면도 없지 않다.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손으로 된 일역판 개인 시집이 나온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엄격히 따지고 보면 이육사도 작품량이 많지 않고 성취도의 높낮이도 썩 고르지 못한 편이다. 윤동주는 이육사와 비교하면 성공적인 작품량도 많은 편이고 시적 개성도 한결 단단한 편이다. 또 그의 불행한 요절과 순결한 영혼의 구도적 자세가 시인됨의 이상형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육사나 윤동주나 비타협적 생활 태도와 일제의 희생자라는 사실이 자연스러운 후광을 작품에 부여하면서 시인들을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때로는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속단을 갖게 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체로 작품량이 많지 않았던 해방 이전의 시인 가운데 놓고 볼 때 상당수의 명편을 보여준 시인 윤동주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시인 평가에서 개인사와 인간적 면모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컬트 현상

세대마다 자기 세대에 대해 상징성을 지닌 시인을 가지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한 시인이 요절을 비롯한 개인사적 불행을 당하게 되면 일종의 컬트(cult) 현상이 생겨나게 된다. 최근의 예를 들면 가령 기형도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직설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 같은 세대에게 자기발견의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시기에 들려온 갑작스러운 최후는 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더욱 간곡하게 하였고 그것은 비록 대규모의 것은 아니나 컬트 현상으로 귀결되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산문가 이상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지만 시인 이상에 대해서는 유보감을 가지고 있다. 몇몇 읽을 만한 작품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수다한 시작품이 사실 잡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필자에게는 시인 이상이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의 산문에 대한 경의의 시로의 자동적 이월移越,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 촉발하는 이차문서의 지속적 남발, 그림이나 건축에서 보여준 다채로운 재능에 대한 경탄, 짧고 불행했던 삶과 이국땅에서의 전설적인 죽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룩한 일종의 컬트 현상이라 생각한다.
 
최근에 와서는 탄압이나 강제에 의한 부자유 체험이나 사회 운동 이력이 시인 평가에서 한몫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과대평가된다고 생각되는 계기들을 뒤집어보면 ‘과소평가’의 속사정이 드러난다. 대체로 작품 경향이 당대의 풍조나 유행과 동떨어져 있는 데다가 상대적으로 은둔적인 생활을 영위하여 ‘튀는’ 바 없는 시인들은 세인의 주목도, 비평적 조명도 좀처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장미는 장미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향기로울 것이다”란 대사가 나온다. 이것은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엄연한 경험적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에드먼드 롤스 교수 팀은 사물의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연상 작용이 실제로 냄새를 느끼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장미를 호박꽃이라고 부르면 덜 향기롭게 느껴지지만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사물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면 냄새도 나아진다는 것이다. 후각이란 맥락에서 나온 얘기지만 선입견이나 주입된 풍문의 영향력 일반을 얘기할 때도 적용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평이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풍문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마련이요, 이에서 초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술사에서 거론하는 유명한 삽화가 있다. 1837년 베토벤의 삼중주와 픽시Pixis란 이의 삼중주가 함께 연주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연주회 프로그램에 작곡가가 뒤바뀌어 있었다. 관중들은 픽시의 작곡이라고 되어 있는 베토벤 삼중주에 무반응이었으나 베토벤 것이라고 오해하였던 픽시 작품의 연주가 끝난 뒤에는 열렬한 박수를 보내었다.
 
이 때 청중은 음악에 소양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교양인들이었다. 선입견이나 세평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는 말은 예술 향수에도 일부분 적용되는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자의 이름을 가린 시행을 보여주고 논평을 가해보라고 한 리차즈 흐름의 실험이 만약 우리 사이에서 시행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이른바 전문 독자들 사이에서도 참담하거나 포복절도할 성질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시에 대한 믿을 만한 주체적 판단은 문학 애호가나 지망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의 하나이겠지만 그 길은 멀어 보인다. 물론 취향과 판단은 별개의 범주이다. 자기 취향이나 이념 성향과 조화되지 않는 작품의 경우에도 성취도를 인정하는 비평적 관용의 기풍이 우리 사이에서는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불경이나 성경을 반드시 불자나 기독교 신자만이 읽는 것은 아닐 터인데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평가에 있어 작품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시인 평가는 문자 그대로 작품 더하기 인물 평가가 되기 첩경이다. 일단 평가받으면 과대평가되기 쉽고 그 반대 경우도 참인 것 같다. 

유종호    문학평론가. 연세대 석좌교수. 저서 『유종호 전집』(전 5권) 『시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다시 읽는 한국 시인』 등이 있음.

<과대평가된 시인 1> 서정주

서정주를 위한 변명

                                                                                      신    철    하 | 문학평론가

소회  
 
이론은 없고 현실만 난무한다고 탄식한 한 지성의 심회를 기억한다. 오늘의 우리 삶이 지극히 부박하며 나아가 인간적 가치를 진지하게 논하는 것 자체를 깔보는 풍조가 만연돼 있는 듯한 모습은 특히 지식사회에 대한 심각한 경고의 메시지가 되고 있다. 지식문화 자체가 위험 수위에 이를 정도로 경박하며, 나아가 야만성을 노정하고 있다는 직시의 배후에는 현 단계 문화의 지속성에 대한 전면적 회의가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삶과 문화를 야만의 그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어긋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더 진전된 듯한 사회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는, 가령 대학을 예로 들더라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상상 이상의 야만성과 간교한 책략이 횡행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도하게 된다. 거의 만연되어 있는 부패, 부조리, 패거리화는 시정잡배의 행태를 능가할 정도로 야만적이어서 그것이 이성을 가진 집단이라고 감히 말하는 것 자체를 허망하게 한다. 야만의 시대를 살면서 그 망령과 싸워야 하는 번뇌를 다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 더 한심하고 지리멸렬한 것은 그것을 향해서 야만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돼 있는 두터운 묵시적 관습의 현실일 것이다.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생태민주주의’를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여기서 다 나열할 여유는 없다.1) 분명한 것은 실존적 자유의 본질에 이르려는 소망으로, 전면적으로 부패한 듯한 사회적 삶을 향한 싸움의 형식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는 뜻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민의 부패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생태 아나키적 사유나 진지한 의식화는 향후 사회적 삶과 실존적 행복을 향한 주요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문학 장에 던져본다. 파장은 크지 않을 것이다. 어느 때보다 담론기술이 최고의 수준으로 번성하고 있는 문학 판의 현황을, 더 강화된 듯한 문학상업주의와 더 부정적인 의미로 실존적 개체들의 내면화를 지향하는 저간의 사소한 글쓰기 정황을 견주어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최근 갑작스레 부상한 듯한, 좀 속된 표현으로 매끈한 손가락 끝으로 조립하는 레고식 글쓰기의 아류적 현실을 응시하면서, 유사직종에 몸담았던 동료로서 느끼는 심회는 언젠가 한 지면에서 이근안식 패러디로 ‘담론기술자’라고 말한 그 기술자의 양산을 거의 확신하게 할 만큼 우후죽순처럼 번성하는 현황, 그것을 충동하는 매체들의 번성을 또한 목도한다.
 
나는 뒤로 숨는다. 그것은 전략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문학과 지배적 언술들에 대한 저항의 의지, 아니 쟁론의 형식을 위한 예비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 단계 문학 장을 감싸고 있는 제 요소들은 더 작은 단위로 재구조화해야 하며, 실존적 개인은 더 처절하게 밀실의 공간으로 침잠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생태민주주의가 문학적 입장에서 현 구도를 재구조화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의 헛된 망령을 의미 있는 생활담론의 실존적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고투와 함께 지역화를 지향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런 생각의 배후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 글(잡지)의 편집인인 김요안 씨의 전화에 곤혹스러워했으며,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스스로에게 자책했고, 더 한참 후에는 내가 나아갈 바와 물러설 바를 더 명확히 해야 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결과적으로 거두어 들였어야 했다.
 
서정주라는 화두 자체도 문제려니와 내 현재적 위치에서의 생태적 딜레마는 더 문제였다.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의 한쪽에 한심하게도 질긴 인연과 우정으로 만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그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는 내 후배이며 한편으로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그것이 구분되기 힘든, 속되게 말해 어떤 인간적 영역에 더 머물러 있는 실존이다. 나는 내가 공부하고 내면화한 사유의 한 축을 응시하면서 그와의 우정을 수락하기로 자위했다(그러나 좀더 냉철하게 생각할 때, 이런 일은 한 번으로 족해야 할 것이다).

식은 감자(?)
 
서정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나는 불현듯 그가 죽기 전후를 생각해봤고, 그 주변에 어른거린 몇 파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마침내 비교적 최근의 김춘수를 겹쳐 현재화해 보는 데까지 이르렀다. 왜 그가 나타났는지를 더 곰곰이 추적해봐야 할 것이겠지만, 그가 죽을 때 보여줬던 문단과 그 주변의 몽매에 가까운 스냅 삽화들을 또한 견주어 보았다. 그 생각은 고약하게도 김춘수를 서정주보다 더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만들었다.2)

그래도 김춘수의 자기관리와 문학적 텍스트 관리의 간교함(이 말을 대신할 ‘세련된’이나 ‘성숙한’ 혹은 ‘치밀한’ ‘정치한’ ‘트릭’ 등의 어사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김춘수의 시와 그에 대한 꽤 많은 수의 비평, 석·박사 학위논문이 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평가는 아직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다는 점에서 그와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이제 시작 단계에 있음을 주시한다) 보다는 서정주가 조금 더 인간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그 고약함은 인간적으로 대소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깊은 회의가 전제되어야겠지만, 그럼에도 후자의 시를 신뢰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다.
 
말하자면 내 딴에는 후자의 수사적 기술과 삶의 분장은 별로 감동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 도달했다. 이에 비하면 서정주는 이광수의 그것과 유사하게도 꽤 문제적 인간일 수 있다(물론 이광수와의 단순비교는 위험한 일이다). 우선 그는 치명적으로 이미 젊어서 친일행위를 명시적으로 한 문인이며, 그 이름을 거명하는 것만으로도 불결할 만큼 한국의 민주주의를 식민지시대 이전으로 돌려놓았던 5공화국과 그 권력자를 용비어천가에 상응하는 수사로 찬미한 위인이다.
 
그는 말하자면 상처투성이의 시인이기에 앞서 불량제품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들에 그가 자신을 반성하거나 연민하는 모습을 본 기억도 별로 없다. 그의 그것을 심각하게 문제삼을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진정성을 화두로 삼아야 할 문학인이자 글을 업으로 삼는 교수였다는 점에서다.
 
그런 면에서라면 좀 거칠게 말해 그도 시와 삶이 따로 논 파렴치 시인으로 매도당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것까지를 포함하여 한편으로 그는 이 몇 겹의 상처들을 한국적 삶의 그것으로부터 길어 와 주조하려는 모습을 엿보게 하는 풍운아적 시인이기도 했다. 바로 그것, 그러니까 민족적 언어의 풍운아적 재현이 지속적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그는 제공한다. 그의 어떤 침묵과 그의 시적 방랑은 그의 실존이 역사와 만났을 때 그가 감당할 수 있었던 모순의 최대치를 함유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그는 문학적 형식으로 기록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직 식은 감자는 아닌 것이다.

문학사
 
문학사는 단순히 문학(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진 기록사로 끝나지 않는다. 간명하게 말해 그것은 온갖 욕망과 모순의 덩어리로 뭉쳐 있다. 더 복잡한 차원의 헤게모니, 시대, 세대, 문학집단, 사가의 욕망이 뒤엉키고 배제·선택된 자리에 몇 시인과 텍스트는 누더기인 채 잠시 거처를 마련한다.

한국의 문학사는 비평가(들)에게 헤게모니의 장악을 위한 싸움의 장으로 나올 것을 은밀하고도 충동적으로 부추긴다(임화의 선동적 문학사 발언이 언표화된 이후, 백철과 특히 조연현의 언명들은 김현으로 하여금 노골적으로 자신의 앞세대를 세대투쟁의 한 장식품으로 전락시키게 만들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각의 링에 갇힌 권투선수처럼 사가는 자신의 검으로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의 싸움꾼이 되어야 할 터이다.

하여 적어도 문학사적으로 서정주를 건드리는 일만큼 곤혹스럽고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경우도 별로 많지는 않을 것이다(이런 발언은 적어도 80년대 이전, 아니 90년대 이전이라면 거의 문제의 기미조차 불가능할 정도였을지 모른다). 그는 그가 도저하게 뿌려놓은 민족어의 성채로 인해 그의 후배들에게 멀미를 감당하지 못하게 하고야 마는, 과장된 수사를 허용한다면, 어떤 깊이의 한국적 서정의 시인일 수도 있겠다. 그를 향해 “부족방언의 마술사이자 시인부락의 족장”(유종호)이란 라벨을 붙여 주었을 때, 그것이 단순한 호기나 찬미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 이제 그 뉘앙스는 여전히 그와 그의 문학을 향해 있는 영광이기에 앞서 뼈아픈 민족적 트라우마의 무엇이 된다. 마음은 그래서 복잡해진다. 질긴 인연처럼 삶과 문학이 분리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교묘한 분장으로, 뒤이어 조령모개식의 해석이 상황의 논리를 업고 횡행해왔던 경우를 지적할 수 있다. 인간은 버려도 시는 그럴 수 없다는 객담이(?) 그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것까지를 포함한 서정주의 정신사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을 향한 작업이 흥미롭게 도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해둔다면 그 작업은 어쩌면 만질수록 덧나는 서정주라는 화두를 정면으로 문학사적 지평에 세울 수 있는 기록이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에 파문이 일거나 덧날 수 있는 가능성 중 하나는 그의 영향력과 그 기득권을 묵시적으로 인정해온 관습적 메커니즘을 배반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 사회의 화두 중 하나인 일제 청산이 실질적으로 난항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서정주에 대한 평가를 금기로 가둘 수는 없으며, 심지어 ‘미당에 대한 평가는 끝났다’(김화영)고 단언하는 한편으로의 그 속내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을 믿으라고 협박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것을 예견해서였을까. 김진석의 꽤 의미 있는 페이퍼가 마침내 제출되기는 했었다. 그는 서정주 시에 엿보이는 초월적 서정주의, 나아가 한국적 그것은 ‘파시즘적 탐미주의’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그에게 매우 끈질긴 정치적 감각이 있었음을 훌륭하게 증거해냈다.
‘서정주의 문학은 문학 텍스트 안에서는 순수와 형이상학적 영원을 표방했지만, 실제로 문학을 포함하는 사회적 차원에서는 스스로 그 순수성과 자율성을 훼손하면서 문학을 권력 제도에 기생하게 했다고 할 수’3) 있다.
 
그러니까 서정주에게 엿보이는 풍류와 멋은 그의 변장된 다른 쪽의 서정이었던 셈이다. 다시 김진석의 주석에 의하면 서정주는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양지에 서 있었는데, 보다 적극적으로는 정부의 관리에서부터 이승만의 전기를 집필하거나 전두환의 용비어천가를 쓰는 일에까지 지속적으로 권력의 편에 철저하게 복무한 위인이다(그가 해방 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문화부장을 거쳐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역임했다는 사실, 또 정부 수립 후 조직된 한국문학가협회에서 시부위원장을 맡았을 뿐 아니라, 후에는 최고위원으로도 활동했고 예술원이 창립된 이래 계속 회원으로 있으면서 문학 분과 위원장을 역임했다는 기록은, 그가 문학을 순수하게 자율적인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명시한다).
 
거기에 더하여 70년대 이후 문단의 패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그는 추천제도라는 문예지 권력을 이용해 수많은 왜곡된 도제관계의 문단권력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가게 된다. 그 영향력은 커서 그에 대한 텍스트적 평가는 ‘서정주 시의 발전은 한국의 현대시 50년의 핵심적인 실패를 가장 전형적으로 드라마한다’라는 김우창의 개량주의적 비판을 제외하면 ‘미당에 대한 평가는 이미 끝났다’(김화영) ‘우리말의 말 맛을 살려 이처럼 완벽한 언어구조물을 만들 수 있는 시인은 서정주 외에는 달리 없을 것’(이남호) ‘대지적 삶과 생명에의 비상’(김재홍) ‘오랜 세월을 견디며 단단히 구워진 상징’(신범순) 등에서 엿볼 수 있듯, 최고의 수사와 해석의 범람이 지속적으로 진행돼 왔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것은 말 그대로 문학 장을 향한 묵시적 관습이 되고 시대와 세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거의) 확정된 언어는 그 말의 본래적 생명력을 거세당한 채 집단 최면의 언어로서의 역기능을 (거의) 자동화된 수순으로 확대·재생산할 뿐이다. 그 결과 서정주는 한국 문학사에 어떤 이의제기 없이 최고의 위계에 자동편입되는 결과로 현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김지하의 탁월한 해석이 있다. 그의 해석적 위계를 여기서 시비 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판단으로는 그것까지를 감당할 만큼 독창적인 힘이 한 시를 둘러싼 발언에 스며 있다. 물론 그는 잘 알려져 있듯이 자신의 사상적 기반인 생명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부정적 예로 서정주를 지목하고 있긴 하다. ‘율려律呂’라는 한국적 전통의 음악이 그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서정주는 율려적 전통의 노래를 근사하게 재현한 민족적 가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래에 있어야 할 주요한 요소인 진정한 그늘이 그의 언어 심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의 노래는 가성의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김지하가 관심을 기울여 읽은 시는 「상가수의 노래」다.
 
질마재 上歌手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喪輿면 喪輿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上歌手는 뒤깐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 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明鏡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 좋게 밀어 넣어 올리는 쇠뿔 염발질을 점잔하게 하고 있어요.
明鏡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   (시집 『질마재 신화』)
 
이 시는 서정주의 시적 기교와 깊이를 잘 반영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적 정서의 원융을 최고의 높이로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가시적인 승화의 이면을 한 겹 벗겨보면 진정한 문학이 내재하고 있어야 마땅할 생명성으로서의 ‘그늘’이 존재하지 않는다.
 
김지하는 그 생명성을 율려(律呂:한국의 전통음악)로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서정주의 시에는 판소리에서의 시김새라고 말하는 삭인 소리의 절정에 해당하는 율려로서의 ‘수리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타고난 맑고 크고 높은 소리에 비유할 수 있을 ‘천구성’, 그러니까 최고의 타고난 재주와 기교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수리성이 미당 서정주 선생에게는 없어요. 이 사람은 본래 태어나기를 재주꾼으로 태어나서 『질마재 신화』 전체를 보면 이쪽에 등장하는 민중들이 일상성과 무궁성을 통하고 땅에서 직접 하늘과 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그늘인데, 이 그늘에 감동이 없어요. 수리성이 없어요. 왜 수리성이 없는가? 시김은 시김인데 삭이는 과정이 철저하지 못했고 삭일 만한 근거가 없어요. 한이 쌓이지 않아요. 왜 그렇게 되었느냐?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사람이 바로 자기 고향 사람들인데요. 조선 말기 동학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고부입니다. 동학혁명이 고부에서 나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때부터 시작한 사람들이에요. 그 뒤 일제 36년, 그 뒤 6·25, 그 뒤 독재체제예요.『질마재 신화』는 이 거대한 역사의 회오리가 조금도 반영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그때 어디에 갔다 왔느냐. 자기는 외국에 도망갔다고 하더라도 질마재에 살고 있는 민중은―그렇죠, 자기가 민중이라고 주장했는데―그 역사의 고통의 와중에 어디 가 있었느냐는 거예요. 도무지 고통이 없어요. 한이 쌓이지 않았어요. 삭일 건덕지가 없어요.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자기 재주 때문에 그늘이 형성은 되지만 수리성을 만들지 못해요. 거칠거칠한 무기교의 기교를 만들지 못해서 생생한 삶의 비밀한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4)이라는 날카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서정주의 문학을 좀더 깊이 있게 감상하고 해석하려는 과정에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인간적 진정성과 문학적 핍진성의 문제는 순금을 채굴하는 캄캄한 동굴 입구에 서정주의 문학을 돌려 세워놓고야 만다. 그것은 곧 지금까지 이루어진 서정주와 그의 텍스트를 둘러싼 문헌들에 대한 진지한 재독을 강제한다.
 
그렇다면 문학사 속에 안착한 듯이 보이는 서정주의 단단한 팻말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진행형의 그것이며, 그 진행형의 상태도 겨우 걸음마를 내디딘 것일지 모른다는, 심각하고도 긴장된 해석적 모티브들과 기필코 만나야 하는 운명을 역설적으로 오늘의 우리 문학 장에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1) 이 생각을 “신철하, 생태민주주의와 아나키(『애지』23호.2005.08)”에서 산만하게 개진하긴 했다.

2)  최근 한 잡지를 뒤적이다 눈에 띄는 문건을 발견했다. 사실 나는 근 2~3년 동안 잡지와 신문을 거의 외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도였다. 차단당한 정보 대신 그것과 관련한 의문과 상상력은 무한의 확장을 거듭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그 상상력에 빗대어 다시 묵은 잡지들을 몇 뒤적이면서 새로운 작가와 비평가들의 등장에 느꼈던 낯설음과 그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내는 발언들에 조금은 놀랐지만, 그 느낌을 저작하면서 재독해나가는 동안 그 생경함과 새로움이 크게 자극될만한 수준의 것들이 아니라(물론 높은 수준의 의식적 치열성과 밀도를 보여주는 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악적으로 경계했던, 내가 꽤 오래전 ‘PC식 글쓰기’라고 명명했던 그 담론기술의 교묘한 위장들로 분칠돼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면서, 또 다른 곤혹스러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갈등을 경험했다.
 
 그 대신 다음과 같은 글 ‘김춘수 시의 한계와 비극은 인간조건의 정직한 인식을 향해 있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가려 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그것은 현실과 무관한 위조된 현실, 가공의 낙원에 지나지 않는다’(장석주, 언롱의 한계와 파탄,『시경』,2004)라는 지문을 읽어내려 가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나든 그런 얄팍한 속단보다는 그의 새로운 글쓰기의 모험을 좀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던 것은 큰 수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3) 김진석, 초월적 서정주의에 스민 파시즘적 탐미주의(『주례사비평을 넘어서』,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2002) 221면. 이하 인용은 따옴표로만.

4) 김지하,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 실천문학사, 1999. 43면
 
신철하   충북 충주 출생. 문학평론가. 저서 『비평과 형식』 『역사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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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울문학
글쓴이 : 감마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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