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퍼스의 거리
당신은 컴퍼스의 긴 다리. 나는 짧은 다리. 당신이 중심을 잡으면 난 하나의 완전한 동그라미를 그려낸다. 당신이 서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당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나는 좁은 동그라미 속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 안정적인 반지름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당신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기로 한다. 그럴수록 당신의 방은 넓어져 갔고 당신은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진다. 나는 당신을 축으로 하나의 물방울을 그린다. 당신이 뛰놀 수 있는 커다란 물방울을 그린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물고기처럼 첨벙거리는 당신이 있다. 낄낄대며 웃는 당신. 술병 속에 갇힌 당신. 오늘도 난 당신을 축으로 안정적인 반지름의 거리를 계산해내고 천천히 당신의 주위를 선회한다. 당신은 내 파란 물방울 속에 갇히는 줄도 모르고 낄낄대며 웃는다. 나는 물방울의 소리를 듣는다.
해마와 물음표와 갈퀴
저녁 13시.
신발을 벗고 현관문에 들어서자
난닝구 바람의 아버지가 휙 돌아서며 무섭게 쳐다본다.
해마 같은 아버지.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가 술집 여자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물음표가 내 목을 꽉 조른다.
갈퀴 같은 손으로 내 목을 조르며 코너로 몰아세운다.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던진 물음표가 아버지의 손목을 낚아챈다.
어딜 갔었어? 누굴 만난 거야? 뭐하다 이제 왔어?
물음표… 물음표… 물음표가 물음표를 낳는 밤.
졸지에 딸을 술집 여자로 만드는 아버지의 물음표.
아빠, 아빠. 켁 켁 켁. 나는 좀 놀면 안 돼요?
이것이 어디서?
물음표가 난무하는 동안 나는 캔맥주처럼 찌그러져 운다.
울다 묻는다.
아빠는 왜? 아빠는 왜? 아빠는 왜?
물음표가 자꾸 입을 막는다.
갈퀴 같은 물음표. 꼬리가 긴 물음표.
나는 물음표를 들고 아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아빠는 목을 길게 빼고 물음표의 갈퀴를 뽑는다.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와 이해받지 못하는 물음표.
이해받지 못하는 물음표와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
네 개의 물음표가 두 개의 물음표를 매달고
각자의 방으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눈물콧물로 일기를 쓴다.
일기장 한 장을 물음표로 가득 채운다.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 물음표에 목을 매달았다.
콜라병 속의 내가
콜라 같은 날 낳고 엄마는 행복했을까.
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들이 다가와 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다. 넌 콜라라며 콜라가 사는 나라로 가버리라고 한다. 나는 모래더미 속에 얼굴을 묻는다. 나만 홀로 캄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는 콜라병 속에 날 가둔다.
콜라병 속의 내가 콜라병 밖의 엄마를 본다.
엄마는 콜라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빛을 꿰어 넣는다. 엄마의 눈물 같은 빛이 콜라병 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울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간다. 사이다 같은 아이들이 내 주위를 맴돈다. 넌 콜라라며 톡 톡 톡 쏘아댄다. 돌멩이를 던져댄다. 난 콜라병 속에 다시 나를 가둔다. 엄마가 만들어준 콜라병. 아프지 않을 콜라병.
콜라병 속의 내가 콜라병 밖의 세상을 본다.
툭 툭 툭 틈만 나면 나를 흔들어대는 세상. 나는 흔들린다. 세차게 흔들린다. 반항하듯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기포를 천장까지 끌어 모으며. 누군가 내 생의 한가운데 빨간 딱지를 붙인다. 나는 위험하다. 뗄 수 없는 빨간 딱지를 붙인 나는 위험하다.
엄마는 기포를 숨긴 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난 언제든 분출하기 위한 꿈을 꾸며 산다.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대며 내 몸의 탄산을 끌어 모은 채 자유롭게 뚜껑 밖으로 흘러가는 꿈을 꾼다. 누구의 유리잔에도 담겨지지 않는 꿈. 플로리다에서 건너온 한 흑인 남자와 함께 콜라의 비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꿈.
콜라병 밖으로 주르륵 흘러나오는 슬픔.
아무도 모르는 뚜껑 속의 내가 세상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다. 위험한 콜라가 새어나가고 있다.
계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당선작 [심사평]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에 투고한 응모작은 총 83명이었다. 전반기보다 응모 편수가 줄어든 것은 아마 곧 있을 신춘문예와 시기가 겹쳐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진출한 작품 가운데 황중하의 「숏컷」 외 4편과 이인의 「동박, 동백꽃」 외 4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우리 두 사람은 합의를 보았다. 황중하의 시들은 환유적 사유가 강한 특징을 보여준다. 요즘의 비전통 시법에서 멀지 않은 기법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어 믿음이 갔다. 말의 부림도 활달하다. 머리에서 머리숱, 머리 자르기와 유방 자르기와 엉덩이 도려내기로 환유되는 신체 훼손의 상상을 속도감 있게 전개시키면서 동시에, “내 머리카락은 검은 비가 되어 미용실 바닥을 적셔요”(「숏컷」 부분)라는 상상이 우리들의 시 읽기를 기분 좋게 했다. 또 「삼 분 동안의 감옥」에서는 뜨거운 컵라면을 먹으면서 열 살의 소녀, 스무 살의 소녀, 전과를 가진 남자, 옆집 아저씨, 중국집 배달원을 환유해낸다. 부사와 의성어, 구와 문장을 자주 반복하면서 속도와 주제의 강도를 고조시키는가 하면 “13시 저녁”(「해마와 물음표와 갈퀴」 부분)이라는 당혹감으로 독자를 미혹에 빠뜨린다. 미혹은 굳어진 대상과 세상을 의심하게 하여 새로운 대상과 세계를 창조하는 힘의 원천이다. 시는 이런 미혹에 기여하라고 인류가 만들어낸 유산이다.
황중하 시인의 당선소감 - 맛있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행운을 안고 무작정 집을 나섰습니다. 가장 예쁜 옷을 입고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거리를 걸었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에 어깨를 들썩이며 살짝살짝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듯 걸었습니다.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햅번처럼 저녁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행운은 여기까지란 걸 압니다.
더 이상 아마추어라는 굴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겠습니다. 오렌지처럼 톡톡 터져 나오는 감성으로 아삭아삭 씹히는 맛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글 쓰는 고통을 즐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가장 오래된 숲과 바람의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이 노래가 저를 어디로 데려갈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리듬에 몸을 맡긴 채 신비로운 모험을 시작하려 합니다.
저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믿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시인동네』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원석처럼 투박한 제 자신을 더욱 정갈하게 세공하여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창과 교수님들과 부모님, 당선을 축하해준 친구와 지인들께도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맛있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황중하
1982년 경기도 광명 출생. 안산대학교 간호학과 졸업.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 문예창작학과 3학년 재학 중.
E-mail : yiffie20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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