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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평가된 시인 1> 박목월 박목월 시의 넓이와 깊이 김 옥 성 | 시인, 문학평론가 박목월은 1939년 등단 이후 1978년 타계할 때까지 40년 가까운 기간동안 5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그는 자신의 시적 세계를 관류하는 일정한 정신적 지향성에 토대를 두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와 미학을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500여 편의 시는 자연탐구, 인생(생활)탐구, 자아탐구, 존재탐구, 신앙탐구 등 몇 가지의 굵직한 주제로 나뉜다. 기법적인 면에서도 한편으로는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를 견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로 압축된 형식에서 산문적 진술까지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박목월은 시작 기간에 비해 지나치게 적거나 많지 않은 적당한 양의 시편을 생산하였는데, 형식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나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시적 사유와 상상의 측면에서 한국현대시사의 다른 어떤 시인에게도 뒤지지 않는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한 박목월의 시적 성과에 비한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 박목월의 시편이 과소평가되어 온 이유는 물론 다양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다음 두 가지를 주된 원인으로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청록집』(1946)이 갖는 문학사적 비중 때문이다. 『청록집』을 계기로 시인으로서 박목월의 이름 앞에는 ‘청록파’라는 관사가 영구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청록집』은 한편으로는 박목월을 ‘자연의 시인’, ‘향토적인 시인’으로 한국현대시사에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여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청록집』, 『산도화』(1955) 계열의 초기시편이 박목월 시의 본령으로 설정되면서 중기, 후기 시편을, 시적 긴장이 결여되었거나 시를 포기하고 생활과 종교로 나아간 것으로 바라보는 현상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중기, 후기 시는 초기시에 비해 미학적으로 낮은 등급의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박목월 시의 연구사에서는 초기시에 대한 논의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박목월의 중기, 후기 시편은 미학적 완성도의 면에서 결코 초기시에 뒤지지 않는다. 다만 주제와 기법의 면에서 미학적인 전략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박목월은 ‘서정시에서 말 한 개 밉게 놓이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지론에 입각해서 초기시뿐만 아니라 중·후기 시편에서도 시어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기발표 작품을 『박목월 자선집』(1973)에 재수록하면서 많은 부분 가필한 것은 그 점을 방증해준다. 둘째,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 때문이다. 그는 모더니스트들처럼 낯설고 신기하고 진보적인 미학을 추구하지도, 미당처럼 격정적인 목소리로 전통으로서 고대적인 사유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박목월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친숙한 소재들을 시적 세계에 풀어놓는다. 박목월의 시적 사유와 상상은 상당한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고 있지만, 그것을 담담한 진술 속에 내밀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연구가들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와 같은 연유로 박목월 시는 과소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박목월 시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면들이 재조명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크게 다섯 가지 정도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생활 지향적 서정시학’의 측면이 있다. 중기 이후 박목월은 일상적 생활과 시의 원융圓融한 경지를 추구한다. 많은 논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일치된 의견을 내보이고 있지만 생활과 시의 원융한 지평에 대한 본격적인 논구는 미진하다. 일반적으로 시적 자아는 시인과는 다른 일종의 가면이다. 하지만 박목월은 『난·기타』(1959)와 『청담』(1964) 등의 중기 시편에서 시적 자아와 시인이 혼연 일체가 되는 생활 지향적 서정시학을 추구하게 된다. 신변잡기적인 생활에서 소재를 구하고 자질구레한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생활 지향적 서정시학은 자칫 시적 긴장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박목월의 생활 지향적 서정시학은 시어나 시적 사유와 상상의 차원에서 엄격하게 조탁된 것으로, 생활을 시의 지평에 통합시키기 위한 미학적 전략의 산물이다. 한국현대시사에서 생활 지향적 서정시학을 추구한 시인들로는 박목월과 더불어 조병화, 홍윤숙, 정한모, 김윤성, 김종길, 천양희, 한광구, 김종해, 임강빈 등이 있다. 이들의 시편은 시의 영역에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한 까닭에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현대시사에서 생활 지향적 서정시학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로 심층적인 탐구를 요한다. 박목월의 생활 지향적 서정시학은 그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유사한 경향의 시인들의 시편과 비교하여 특이성과 시사적 의의를 구명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가족 상상력의 관점이다. 한국현대시사에서 박목월만큼 가족에 관한 시를 많이 남긴 시인도 드물다. 박목월 시의 가족 상상력에서 핵심적인 이미지는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박목월 시에서 “아버지”는 생활인으로서 시적 자아인 ‘나’이며, “어머니”는 생활인이자 종교적 인간으로서 시적 자아의 ‘고향’이며 ‘근원’이다. 최근에 종교적 관점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후자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반면 전자, ‘생활인으로서의 시적 자아’인 “아버지” 이미지는 여전히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현대시사에서 전개된 가족 상상력의 관점에서 볼 때 박목월 시의 “아버지” 이미지는 획기적인 것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백석, 이상, 미당 등의 시에서 가부장적 질서가 파탄난 가족과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방황하는 시적 자아를 만날 수 있다. 이때의 자아에게는 가부장적 지위나 책임감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달리 주로 중기시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박목월 시의 “아버지”는 다시 가부장적 질서를 회복한 가정의 가장이다. 식민지 시대 시인들의 시편에서 자아가 ‘방황하는 청춘’의 초상을 반영한다면, 박목월 시의 자아로서 아버지는 성숙한 생활인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박목월 시의 가장이 봉건사회의 가장 이미지를 고스란히 계승하는 것은 아니다. 시적 자아는 생활인으로서 봉건적인 가장의 책임감을 강력하게 느끼지만, 동시에 시인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갖는다. 그리하여 그는 생활과, 시, 종교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중기 시편의 가족 상상력은 일제 강점기 시인들의 것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그것의 시사적 위상과 의의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경상도 방언의 미학이다. 이것은 박목월 시 연구에서 가장 미진한 분야 중의 하나이다. 박목월은 『경상도가랑잎』(1968)에서 경상도 방언을 활용하여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의 한 단면을 집중적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주었다. 한국현대시사에서 사투리를 활용하여 하나의 시적 공간으로서 전통적 공동체를 형상화한 시인으로 백석과 서정주가 대표적이다. 백석과 서정주의 시편에 나타난 전통적인 공간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하고 심도 있게 이루어졌다. 반면 박목월 시의 전통적인 공간에 대한 논의는 깊이 있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무엇보다도 백석과 서정주가 신비롭고 축제적인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박목월은 그러한 분위기를 내밀하게 감추고 전통적 공동체의 일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박목월은 전통 사회에서 취한 “장날”, “장맛”, “논두렁길”, “문고리” 등과 같은 향토적인 소재와 사투리를 결합하여 ‘가난’과 ‘인정’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공동체의 소박한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한 소박한 삶에는 전통적인 종교관념과 인생관, 세계관 등이 내함되어 있다. 박목월이 낮은 목소리로 전통적인 삶의 일상을 제시한 까닭에 『경상도가랑잎』에 대한 평가는 영세한 편이다. 많은 연구가들에 의해 심층적으로 탐구되어온 미당의 『질마재 신화』(1975)와는 대조되는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박목월의 『경상도가랑잎』에 『질마재 신화』 시편의 전범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박목월의 사투리 시편은 독자적인 시적 세계를 확보하면서, 한편으로는 백석의 사투리 시편이 보여준 시적 방법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 미당의 『질마재 신화』가 탄생하는 데 기여한 점에서 시사적인 의의가 크다. 박목월이 ‘생활’에 서정주가 ‘종교’에 무게 중심을 두긴 했지만 시적 사유와 상상의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양자는 용호상박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사항들을 고려하여 박목월의 사투리 시편들을 재검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넷째, 종교적 관점이다. 최근 들어 주목할 만한 연구 경향 중의 하나가 박목월 시의 형이상학적 토대로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한 것이다. ‘청록파’, ‘전통적인 향토 시인’이라는 규정으로 인하여 1978년 타계할 때까지 박목월 시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의는 오세영에 의해 이루어진다.(「박목월론」, 『현대시와 실천비평』, 이우출판사, 1983.) 이후 간헐적으로 논의되어 오다가 최근에 집중적으로 심도 깊게 재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박목월의 기독교적 시학이 지니는 고유한 면모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당이 무속적이고 불교적인 고대적 사유와 상상을 시의 전면에 노출한 반면 박목월은 기독교적 사유와 상상을 내밀하게 감추어놓고 있다. 물론, 『어머니』(1967), 『크고 부드러운 손』(1979) 등의 시편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편들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은 자연, 생활, 존재에 대한 사유와 상상의 심층에 내밀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박목월의 기독교적 시학의 총체적인 면모를 온전히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최근의 논의는 ‘향수’, ‘근원의식’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논구하고 있다. 이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박목월의 다양한 시편들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이 어떻게 작동하며 어떠한 특이한 시적 사유와 상상을 생성하게 되는가가 연구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학은 특정 종교의 세계관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창조적인 사유와 상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윤동주, 박두진, 김현승 등의 시편과 구분되는 박목월의 기독교적 시학의 특성과 그것의 시사적 의의가 점검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박목월 시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로 존재탐구를 들 수 있다. 박목월의 존재탐구의 시학은 『무순』(1976)에서 본격적으로 추구된다. 하지만 박목월은 그 이전부터 다양한 시적 사유와 상상을 보여주면서도 자아를 에워싼 세계와 자아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의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러한 존재론적 탐구는 철학적·종교적 사유의 단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미학적인 경지에 도달한다. 박목월은 천상과 지상, 자아를 에워싸고 있는 사물들, 그리고 그러한 세계 내에 거주하는 자아의 의미를 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시적 주체는 마치 건축을 하듯 존재론적 의미로 가득 찬 우주를 구축해나간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지상에 발을 딛고서 천상을 우러르는 자아와 그 자아를 둘러싼 세계의 우주론을 하나의 시적 세계에 담아낸다. 한국현대시사에서 이와 유사한 존재탐구의 시학을 보여준 시인들로 오세영, 이형기, 정진규, 조정권, 임영조, 박제천, 임보, 김영석, 최동호, 김종철, 이재무 등이 있다. 박목월의 존재탐구 시학은 이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면서, 존재탐구의 시학이 한국현대 시사에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는 데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가령, 오세영은 「그릇」 연작 시편에서 박목월의 「사력질」 연작 시편이 보여준 존재탐구의 시학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시학을 모색한다. 그러한 점을 고려할 때 박목월의 존재탐구 시학 또한 시사적 비중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본질적으로 서정시는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된 세계를 화해와 조화로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박목월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다채롭고 깊이 있는 시적 사유와 상상을 펼치면서 그와 같은 서정시의 본령을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고수하여 왔다. 지금까지 한국 현대시 연구자들은 모더니즘 계열의 신기성과 현란한 기법, 전통주의 계열의 고대적이며 격정적인 상상력, 리얼리즘 계열의 진보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의 탐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한 탓에 일상적인 것과 친숙한 것을 추구하는 박목월의 시는 깊이 있게 탐구될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하였다. 물론 박목월 시에 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편이지만 풍요로운 사유와 상상에 대한 다채로운 논구나 시사적 위상과 의의에 대한 평가의 면에서 볼 때는 빈약한 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초기시의 자연 이미지를 제외하고, 박목월 시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 재조명되어야 하는 시적 사유와 상상의 다섯 가지 국면을 검토해 보았다. 이러한 국면들은 특정한 시기의 시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뒤섞인 채로 전개되면서 특정한 국면이 특정한 시기에 부각된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경향은 시사적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박목월 시의 다양한 경향은 선행연구에서도 누차 언급된 바 있지만, 박목월 시의 변모과정이 개괄되는 과정에서 피상적으로 논의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박목월 시의 시사적인 위상과 의의가 정당하게 평가되기 위해서는 다채로운 사유와 상상이 보다 심층적으로 탐구될 필요가 있다. 김옥성 서울시립대 강사. 1973년 전남 순천 출생. 2003년 《문학과경계》 신인상으로 등단. 논문으로 「김현승 시에 나타난 전이적 상상력 연구」 「한국 현대시의 불교적 시학 연구」 외 다수. <과소평가된 시인 2> 박인환 박인환, ‘검은 신神’에 담긴 진정성 이 홍 섭 | 시인, 문학평론가 1. 미완의 시인 박인환은 ‘미완의 시인’이다. 그의 일생은 서른을 갓 넘어 닫혀 버렸고, 그의 시세계는 어느 한 가지 잣대로만 평가하기에는 뭔가 미흡하고, 결핍된 채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물론 시가 늘 새롭게 해석되어지는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시인들도 생사의 차원을 떠나 언제나 ‘미완의 시인’이다. 그러나 같은 요절시인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 시세계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나아간 시인의 경우, 그의 요절은 시적인 차원에서의 요절을 넘어선다. 우리 시사에서는, 죽기 직전 삼수갑산三水甲山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세계를 노래한 시를 마지막으로 남긴 김소월의 경우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적어도 시의 세계에서 김소월의 불귀不歸의식은 한 세계가 도달한 극점이자 완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인환과 늘 대비되어지는 김수영은 어떤가. 그가 48세의 나이로 버스에 치여 사망하던 해인 1968년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성性」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풀」 등이었다. 이 작품들은 비록 김수영이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평생 추구하고 열망했던 ‘자유’가 그의 내면과 시의 안팎에서 어느 정도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풀」은 그 성취의 한 상징이다. 31세에 요절한 박인환은 그보다 두 살을 더 살다 간 김소월처럼 어떤 극점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그보다 17년이나 더 살다 간 김수영처럼 시인이 일관되게 추구한 세계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시적 성취는 어떤 싸움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지 못한 채 미완인 채로 이 세상을 떴다. 식민지 체제가 공고화되던 1926년에 태어나 20세에 광복을 맞고, 25세에 전쟁을 겪었으며 전후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던 1956년 사망한 박인환에게 있어 이 세계란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일까. 세계를 인식되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때, 그의 짧은 생애 속에서 너무나 급박하게 전개되었던 이 세계를 그는 어떻게 인식하고 구성해 나갔을까. 박인환의 시들은 이런 질문들과의 대화를 간절하게 요구한다. 이 요구는 때때로 읽는 이를 지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것에의 동참 없이는 불행한 시대를 살다 간 시인의 시세계를 온전히 들여다볼 수 없다. 2. 사족들 나는 모더니스트로서의 박인환에 대해서 별반 관심이 없다. 그를 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연구한 대부분의 글들은 자꾸만 그에게 화려한 코트를 입히려 한다. 그리고는 이내 이 코트가 그의 이국 취양 속에서 나온다고 분석한 뒤, 그의 시가 앞 세대의 모더니즘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덧붙인다.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들이 생경한 시어들, 감상주의, 허무적 제스처 등등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따져보면 기실 이러한 한계들은 동시대 시인들의 공통된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했고, 사적 영역에서는 우리말을 써야 했던 이 세대의 시인들에게 있어 언어의 한계는 공통된 문제였다. 박인환보다 5년 먼저 태어난 김수영은 박인환이 태어나던 1926년 그나마 서당에 다니며 한문공부도 할 수 있었지만, 박인환에게는 이러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언어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나, 그에게는 끝내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김수영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환의 시에서 자꾸만 시어를 문제 삼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 할 만하다. 또한 그의 감상주의와 허무적 제스처를 단지 시적 한계로만 바라봐야 되는지도 의문이다. 불과 70여 편밖에 되지 않는 그의 시들에서 아메리카 여행시편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시편들이 전쟁으로 인한 폐허의식과 상실감, 그리고 여기서 오는 허무를 노래하고 있다. 우리 시사에서 전란 중의 피폐함과 전후의 상실감이 박인환 시에서처럼 잘 반영된 시가 있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세계를 단순히 한계라고 치부해버리면 그의 시가 지닌 진정성을 놓쳐 버리기 쉽다. 한계나 극복이란 말은 다분히 윤리적이고 상대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미래에의 전망이 투명한 시대에서나 쓰일 수 있는 것들이다. 전쟁이 끝난 지 3년 만에 생을 마감한 시인에게 넌 왜 그렇게 허무해, 너 너무 감상적인 거 아니야 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앞서의 예처럼 너무 가혹한 처사이다. 나는 그보다는 그의 시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검은 신神’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이 시대의 한 상징이 될 수 있는지, 있다면 시사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를 묻는 것이 더 생산적인 질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3. ‘검은 신神’ 박인환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해방 다음해에 그가 문단에 나왔다는 것은 그의 시의 출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거리를 맥박에 비유(「거리」)하거나, 지하실에서 남아 있는 도시의 속력速力과 투명한 감각을 찾아내는(「지하실」) 등 그의 시선은 확실히 도시문명적인 것들과 새로운 미래를 향해 들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모던풍의 도회적 감각에만 빠져든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의 야만적 제재는/ 너희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욕/힘있는 대로 영웅 되어 싸워라/자유와 자기 보존을 위해서만이 아니고/야욕과 폭압暴壓과 비민주적인 민정책民政策을 지구에서 부숴내기 위해/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라고 노래한 시 「인도네시아 인민人民에게 주는 시」에서는 식민지하에서 자라나고, 해방공간에서 새로운 제국주의와 맞서게 된 불행한 세대의 자각이 진지하게 배어나온다. 이 두 세계는 서로 이율배반적인 세계가 아니라 해방공간의 청춘들이라면 누구나 직면한 세계였으리라 짐작된다. 이를 두고 두부모 자르듯 모더니즘적인 면모와 리얼리즘적인 면모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공과功過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그는 갓 데뷔한 혈기왕성한 젊은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많은 시편들은 전쟁기간과 전후에 씌어졌다. 특히 전쟁체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시들은 초기시의 들뜸이 제거되고, 자신이 직면한 세계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돋보인다. 「고향에 가서」 「어린 딸에게」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土地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繪畵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神의 토지 거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엔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중략)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뿐이다. 비 내리는 斜傾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工兵이 나에게 손짓을 해 준다. ―― 「고향에 가서」 機銃과 砲聲의 요란함을 받아 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중략)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 「어린 딸에게」 앞의 작품은 전쟁 중 그의 고향인 강원도 인제를 지나며 쓴 시이다. 전쟁 중 박인환은 종군기자로 전선을 오갔으므로 이 작품도 아마 이 때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평화롭던 고향을 전쟁이 날려버린 비극이 잘 드러나 있다. 마지막 연에서 알 수 있듯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그의 시선은 과장이나 요란한 수식 없이 냉철하다. 전쟁 중 태어난 갓난 어린 딸에게 닥친 비극적 상황과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쓴 뒤의 작품은 전쟁의 참혹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가 전쟁 기간 동안 <후반기> 동인을 결성하고, 모더니즘의 계보를 잇기 위해 노력했다는 문단사적인 기록들은 이런 작품들 앞에서 그리 큰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 보다 중요했던 것은 이 비극적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낼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고 보는 게 더 옳은 접근법일 것이다. ‘검은 신’의 탄생은 그래서 주목을 요한다. 인용시 「고향에 가서」에서도 등장하는 신神은 전쟁의 비극을 겪으면서부터 그의 시에 줄곧 반복해서 등장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검은 강江」 「미래의 창부娼婦」 「밤의 미매장未埋葬」 「밤의 노래」 등은 물론, 직접적으로 신을 다루고 있는 「불행한 신神」 「검은 신神이여」 등에 이르기까지 ‘검은 신’의 이미지는 반복된다. 그에게 있어 신은 전쟁의 폐허를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자, 존재구원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 신은 참혹한 전란 속에서 그을리고 검게 타버린 ‘검은 신’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고독하고 창백한 존재로 그려지던 신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검은 신’으로 바뀌어간다. 이와 비례해 시인의 목소리에 담긴 절망감도 더 짙어간다. 다음 작품은 그 절망의 절정을 보여준다. 저 墓地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死滅된 것은 무엇입니까. 1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아간 나의 親友는 어데서 만날 수 있습니까. 슬픔 대신에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중략) 하루의 1년의 전쟁의 처참한 추억은 검은 神이여 그것은 당신의 主題일 것입니다. ―― 「검은 신이여」 마치 신에게 대드는 듯한 어투로 씌어진 이 작품은 직정적인 목소리가 오히려 호소력을 더해주며 그의 허무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인에게 있어 신은 더 이상 숭고하고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비극을 관장한 ‘검은 신’일 뿐이다. 질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격정적인 호소가 ‘그것은 당신의 주제主題일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순간, 시인에게 남은 것은 짙은 허무일 것이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목마와 숙녀」)할 뿐이라는 그의 노래는 이 허무를 담담하게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목마가 주인을 버렸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는 주객전도의 사유와 4회나 반복되는 ‘거저’라는 시어는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4. 질문들 박인환이 ‘미완의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마음은 일순 편안해진다. 문학사의 함정과 위험은 한 무리의 시인들을 집단화하고, 여기서 벗어난 시인들을 배제시킨다는 데 있다. 김소월은 김소월이고, 박인환은 박인환이고, 김수영은 김수영일 뿐이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논하지 않았지만 똑같이 전쟁을 경험했어도 박인환에게는 ‘검은 신’이, 김수영에게는 ‘백색의 세계’가 탄생했다. 김수영이 끝없이 자신을 갱신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 ‘백색의 세계’에 대한 희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모더니스트는 김수영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 시인이, 그것이 개인적이든 시대적이건 간에 무엇을 화두 삼아 밀고 나갔으며, 그것이 시 속에서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가를 따져보는 일일 것이다. 겨우 10년 동안의 문단 활동 속에서 해방기의 혼돈과 전쟁, 그리고 전후의 폐허를 겪어야 했던 한 시인이 존재의 불안과 공포를 ‘검은 신’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해내고, 당대의 허무의식을 주인을 버리고 떠난 목마를 통해 담아내 동시대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은 마땅히 평가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의 시가 ‘센티멘털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될 만큼 그렇게 가볍고 진부한 것일까. 그가 반복해 불러내고 있는 ‘검은 신神’이 마네킹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질문해볼 일이다. 이홍섭 1965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0년 《현대시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각각 등단. 시집 『강릉, 프라하, 함흥』 『숨결』 『가도가도 서쪽인 당신』 출간. <과소평가된 시인 3> 전봉건 전쟁 속에 핀 희망과 타자에 대한 사랑 문 혜 원 | 문학평론가 전봉건은 1928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했고, 1950년 《문예》에 「원願」, 「사월」, 「기도」 등이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1988년 작고하기까지, 김종삼, 김광림과 함께 낸 공동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비롯해서 개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 『춘향연가』, 『속의 바다』, 『피리』, 『북의 고향』, 『돌』, 시선집 『새들에게』, 『트럼펫 천사』, 『아지랭이 그리고 아픔』, 『기다리기』, 시론집 『시를 찾아서』를 발간했고, 몇 편의 시극과 산문집들을 발간했다. 6·25에 직접 참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시들은 전후시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김수영, 박인환, 김종삼 등에 비하면, 전봉건은 널리 알려진 시인은 못된다. 오랫동안 그의 시는 전후 모더니즘의 한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만 연구되어 왔고, 개별적인 시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의 시에 대한 연구는 크게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진다. 전후에 씌어진 시들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적인 특성, 관능성과 에로티시즘적인 요소 그리고 이와 연관된 생명에 대한 애정과 희망, 6·25를 원체험으로 한 실향민의 정서 등이 그것이다. 또 이와는 별개로 형식면에서 「춘향연가」,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장시 혹은 연작시라는 형식면에서 설명한 글들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시집 해설이나 단평 등을 제외한다면, 본격적인 연구 업적은 많지 않은 편이다. 이처럼 전봉건의 시가 연구나 이해의 대상에서 소외되어 온 데는 문학 내외적인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문학 내적으로 볼 때, 첫째는 그의 작품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이다. 1950년 등단해서 1988년 작고하기까지 근 사십여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그는 개인시집으로 총 여섯 권의 시집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분량이다. 『사랑을 위한 되풀이』(1959) 이후 『춘향연가』(1967)를 발간하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속의 바다』(1970) 이후 『피리』(1979)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또한 거의 십 년에 달하는 것을 보면, 그가 다작의 시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넘쳐나는 시상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시 한편 한편을 갈고 닦는 유형에 속하는 시인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시가 긴장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동력원이지만, 문단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둘째, 시적인 경향이 다양하고 어느 의미에서는 상반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김춘수가 “심미의식은 모더니즘에 연결되어 있지만 단순하게 모더니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모더니즘과 전통주의의 경계에 걸쳐 있다”(김춘수, 「전후 십오 년의 한국시」, 『한국전후문제시집』, 신구문화사, 1957)고 말한 것처럼, 전봉건의 시는 때로는 모더니즘 취향으로 때로는 전통서정시 측면에서 설명된다. 실제로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느 토요일」이나 「JET·DDT」, 「0157584」 등에서는 모더니즘적인 색채가 두드러지지만, 「춘향연가」와 같은 작품은 전통적인 소재와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상반되는 경향은 일정한 시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혼재한다. 그의 시는 모던한 소재들을 다루면서도 서정적인 어조를 잃지 않고, 그러면서도 서정주나 박재삼으로 대표되는 전통파적인 시인들과도 구별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리리시즘과 모더니즘의 변증법적 긴장을 보여준다’(이승훈, 「전봉건의 시론」, 『한국현대시론사』 고려원, 1993)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느 쪽 경향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 지대에 남게 된다. 셋째, 그의 시 및 시론에 두드러지는 예술지향적인 경향을 들 수 있다. 그는 전쟁을 소재로 한 시들을 쓰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았고, 그러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믿었다. “전쟁의 마당에 피는 꽃의 색깔도 내게는 그것들이 생래로 지닌 분홍빛이거나 노랑빛이거나 흰빛이거나 그러하다. 그러기에 나는 그것들의 색깔은 그것들이 생래로 지닌 색깔 그대로이다”(『새들에게』 자서)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아름다움이 전쟁의 참혹함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시 혹은 예술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잘 알려진 「피아노」, 「음악」 등의 시는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이다. ……음악이여. 너는 전장을 포복하는 군단의 불면이 겹 쌓여 탄피와 같이 굳어진 나의 눈시울 그 속에도 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총알 맞아 쓰러졌던 내가 다시 깃발처럼 일어서면서 눈저리게 똑똑히 보았느니 그것은 머리에서 별빛 냄새가 나는 처녀의 둥근 빛무리 같은 알몸이었다. ―― 「음악」 부분 결국 전쟁터에서 그를 지켜낸 것은 총이나 대포 같은 살상 무기나 투철한 애국심, 반공 정신 같은 사상이 아니라, “장미로 수놓인 하늘 같은/ 노오랗고 새빨갛고 또 무슨/ 여러 가지 빛나는 색깔의 과실 같은/ 그리고 그러한 수없이 많은 과실들과/ 과실들 사이로 보이는 들과 바다 같은/ 샛말간 날개 같은” 음악의 위무의 힘이다. 아름다움을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참담함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은, 시는 주장일 수 없다는 그의 시론의 바탕을 이루는 믿음이 된다. 여기에 전쟁과 분단, 4·19와 5·16 등 급박하게 계속되는 사회적인 사건들은, 문학인들에게도 문학 외적인 이슈들에 대한 태도를 표명할 것을 요구했다. 순수 참여 논쟁은 이러한 외적인 압력이 문단내적인 이슈로 연결되면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논쟁이다. 전봉건 역시 이 같은 문단내외적인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봉건은 순수문학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김수영과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김수영이 「난해의 장막」(《사상계》, 1964.12)이라는 글에서, 《문학춘추》, 《세대》, 《현대문학》에 실린 시론들을 비평하는 가운데, 전봉건과 김구용의 글을 비판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김수영은 그들의 시론이 “양심이 없는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기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봉건은 김수영의 글이 “과잉되게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저돌적이고 황당무계”하다고 비난하면서, 조목조목 글의 부분을 옮겨가며 비판을 가하고 있다. 또 김수영은 시인의 양심과 사회 참여를 주장하고 있는데, 김수영의 대표작인 「거대한 뿌리」는 자신이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실의 사람들과 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즉 “그 속에 끼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층의 사람들의 이해를 거부하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실제로는 이론과 시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후에 전봉건은 당시의 논쟁을 회상하면서, 김수영의 참여시 이론은 표현보다 사상이 앞선다는 것인데 그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김현, 「전봉건을 찾아서」, 『시인을 찾아서』, 민음사) 전봉건이 지적한 주장과 행동, 이론과 실제 시 사이의 불일치는 김수영뿐만 아니라, 문학인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전봉건은 문학의 사회 참여란 그 자체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전봉건의 태도는 진솔한 것이긴 했지만, 문학인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현실에서는 소극적이고 현실도피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김수영이 참여 시인의 대명사로 불리워지며 지금까지 각광을 받는 것과 대조적으로 전봉건의 시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여기에도 그 원인이 있다. 전봉건의 결벽한 성격 역시 하나의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중동부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한 후, 1953년 출판사인 <희망사>에 취직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현대시》, 《문학춘추》의 편집을 맡아보았고, 1969년에는 《현대시학》을 창간하고 작고할 때까지 주간을 맡아 조정권, 이하석 등 유망한 시인들을 배출해냈다. 그러나 그는 신인을 배출하고 지면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것으로써 자신의 문단적 입지를 확보하려 하지 않았다. 서대문구에 있던 《현대시학》 사무실은 돈이 없어 사무실 평수를 줄이고, 나중에는 이중섭 화백의 그림을 팔아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사심이 없고 깔끔한 성격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러한 결벽성은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을 쉽게 만들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이상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전봉건은 함께 활동했던 시인들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아웃사이더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만큼 전쟁의 비극성을 건조하면서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예는 드물다. 그는 전쟁을 소재로 하면서도 참혹함을 과장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건조한 시선을 유지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그리고 한쪽 눈을 감았다」, 「0157584」 등은 전쟁의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죽음과 삶의 대비를 과장없이 담담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쟁의 참혹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처럼 냉정한 현실인식의 한켠에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6·25에 참가해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그것을 원체험으로 한 시들을 남겼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있다. (“불탄/ 나뭇가지마다 찌든 전사자의/ 아직도 검은 외마디소리들을 발려내기 위하여/ 수액은 푸른 상승을 시작하고/ 155마일의 철조망이 에워싼 무인지대에서도/ 하늘은 푸르고 새들은 노래하고/ 꽃들은 한들거렸다.” ―「강물이 흐르는 너의 곁에서」) 이러한 믿음은 타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전봉건에게 있어 시를 쓰는 일은 그 자체가 타자에 대한 사랑을 구현하는 기획투사 행위이다. 가난한 누구보다도 더 가난하고, 상하고 상한 누구보다도 더 애처롭고 끔찍하게 상하였기에 노래하리라. 세계의 가장 슬프고 아픈, 낮은 목소리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더 높은 목소리로. 전쟁보다도 더 강한 목소리로 노래하리라.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라. 노래하리라. 바위보다도 더 깊은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하리라. 총알이 뚫고 간 나의 손금 위에서 나는 사랑을, 나의 폐허, 나의 손, 오 나의 조국에서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 「사랑을 위한 되풀이」 부분 그의 대표작인 「춘향연가」는 타자를 향한 사랑이 육체를 가진 인물로 설정되어 구체화된 예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에로스는 생명의 리듬이고, 나아가 전우주적인 생명의 질서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 나타나는 관능성은 주체의 내면으로의 매몰을 극복하고 우주적인 것으로 옮겨가고자 하는 시도인 셈이다. 실향과 분단을 소재로 한 시들 역시 ‘타자를 향한 사랑’이라는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전쟁 체험은, 역설적으로 타자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전봉건의 시는 전쟁을 원체험으로 하고 있다. 직접적인 전쟁 체험을 소재로 한 초기시뿐만 아니라 실향을 노래한 후기시 역시 이에 바탕하고 있다. 그는 끝까지 전쟁과 분단이라는 사회적인 소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예로 후기에 씌어진 『북의 고향』(1982)은 개인적인 실향의 아픔과 민족의 분단이 하나로 용해되어 나타나 있다. 문학의 사회 참여가 시와 별개의 주장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김수영이 참여시를 주장하며 지식인 및 학생층의 지지를 받고 박인환이 멜랑콜리한 댄디즘으로 대중에게 어필할 때, 전봉건은 혼자 남아 생명과 남아 있는 희망을 노래했다. 또한 김구용과 김춘수가 일찌감치 시의 비정치성을 선언하고 관념의 깊이로 천착해 들어갈 때 역시, 홀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의 시는 참전과 실향, 가족과의 이별이라는 상황을 겪으면서도 개인적인 아픔에 매몰되거나 상황의 참혹함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생명에 대한 지지와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외적인 상황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시세계를 끝까지 고수했던 그는, 한마디로 ‘시인’이었던 것이다. 문혜원 제주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현재 아주대 강의교수. 1989년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 저서로 『한국 현대시와 모더니즘』 『한국 현대시와 전통』과 평론집 『흔들리는 말, 떠오르는 몸』 『우리 시의 넓이와 깊이』 『문학의 영감이 흐르는 여울』 등이 있다. 문화로 하나되는 세상, 대한민국 NO.1 문화예술언론 <문화저널21> [저작권자 ⓒ문화저널21 (www2.mhj21.com) ] |
출처 : 시울문학
글쓴이 : 감마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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